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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창세기

창 40장 16-23절(때론 망각도 축복입니다) - 안효관

by Preacher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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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0장 16-23

때론 망각도 축복입니다.

안효관 목사 2018-10-14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여러분,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tic syndrome)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과잉기억증후군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대부분 다 기억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대부분 다 기억하는 그런 증상을 일종의 기억장애라는 병으로 분류합니다. 여러분,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려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제 외웠던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시험을 망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겪었던 지난 일들을 다 기억하는 그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왜 환자로 취급한다는 것입니까?

 

그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계에서 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은 ‘질 프라이스’(Jill Price)라는 미국 여성입니다. 그녀에 대한 책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입니다. 1965년에 태어난 그녀의 기억력은 3단계에 걸쳐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1단계는 태어난 해부터 7살까지로, 보통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갓난아기 시절과 어린 시절들을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2단계는 8살부터 13살까지로, 대부분의 날자와 일상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3단계는 14세 이후인데, 그 때부터는 자신이 알고 보았던 사소한 모든 일들을 다 기억한다고 합니다. 몇 년 몇 월 며칠 등 어떤 특정 날짜를 이야기하면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날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과 사고는 무엇이었는지, 심지어 그날 날씨는 어떠했고 저녁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전부 기억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억이 그녀에게 언제나 축복이었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들, 남편을 잃은 기억,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억들이 늘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억들이 그녀를 괴롭혀서 그녀는 자신이 가진 기억력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힘들고 괴로웠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결국 그녀는 2000년 6월 자신의 그런 기억력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신경생물학과 교수인 제임스 맥거프(James McGaugh) 박사에게 상담을 요청했고, 상담과 테스트를 거쳐 지난 2006년 처음으로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질 프라이스와 같은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25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질 프라이스라는 여인이 부럽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나간 과거를 잊어버릴 수 있게 하신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처럼 과거의 모든 사건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면 질 프라이스가 그런 것처럼 우리는 지난날의 아픈 상처와 고통까지도 기억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할 것입니다. 지난날 부끄러웠던 일들을 잊지 못하고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려울 것입니다. 자신이 실수한 것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것들을 모두 기억한다면 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과거라는 기억의 저장장치에서 조금씩 사라져야 우리는 오늘을 힘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 가운데 하나가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저장장치에 기억되어 있던 지난날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부끄러움도 하나씩하나씩 지워지면서 그 아픔과 고통이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억력 세계기네스북기록 보유자인 이스라엘 출신의 에란 카츠(Eran Katz)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하는 것만큼 망각도 중요하다. 인간의 뇌에 주어진 큰 축복 중 하나는 망각이다. 좋은 기억력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면 망각은 ‘잘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과거의 실패, 실망감,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망각이 절대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한 삶, 우리가 추구하는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잊어버리는 망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에란 카츠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잊기 위한 방법 가운데 최선의 것은 용서’라는 것입니다. ‘용서하다’라는 말의 영어단어는 forgive입니다. 그런데 ‘잊는다’는 단어는 forget입니다. 비슷한 단어인데,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용서해야 비로소 잊을 수 있고, 그래야만 우리가 추구하고 기대하는 행복과 보다 더 나은 삶이 우리의 삶에 찾아옵니다.

 

그런 망각이 우리의 삶에 때때로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고, 거기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보디발의 집의 가정 총무가 됩니다. 젊고 유능한 요셉이 가정총무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을 때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젊은 요셉을 유혹한 것입니다. 물론 요셉은 그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입니다.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에게 누명을 씌우고 맙니다.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인 보디발이 요셉에게 내린 벌은 감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보디발의 종입니다. 비록 요셉이 성실하고 총명하게 일을 잘 처리했기에 가정 총무의 자리에 앉히긴 했지만, 종이 주인마나님을 넘보는 죄를 지었다면 그 종은 당장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체면도 살려주면서 요셉을 죽이지 않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 힘이 없는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도 요셉은 성실하게 생활하고, 그런 성실하고 총명한 요셉의 모습을 본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의 죄수를 관리하는 제반 사무를 맡겼습니다. 요셉이 갇힌 감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창세기 39:20)이었습니다. 바로 왕 아래서 신하로 일하다가 실수하거나 잘못하여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두는 곳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 갇힌 사람 가운데 하나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 이야기를 들은 요셉이 그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당신은 3일 후에 복직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셉이 그런 꿈 해석을 해 주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한 사람이 자신도 꿈을 꾸었노라며 해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그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그런데 앞선 사람과 다른 결말을 이야기합니다. 앞선 사람은 복직될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 두 번째 사람은 3일 후에 처형당할 것이라고 해석해 줍니다. 그리고 요셉의 해석대로 3일 후에 있었던 바로 왕의 생일에 한 사람은 처형을 당하고, 한 사람은 복직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여러분, 복직된 술 관원장이 꿈을 해석해준 요셉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잘된 일일까요? 아니면 배은망덕한 일일까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분명 복직된 술 관원장은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의 꿈을 해석해 줄 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창세기 40:14-15) 물론 그런 요셉의 간청에 술 관원장이 ‘그렇게 하마’라고 약속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23절에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라고 말씀한 것에 비춰보면, 그는 요셉에게 분명히 약속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말해준대로 내가 복직이 된다면 당신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알려서 당신을 이곳에서 건져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술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불과 3일 전에 일어난 일이고, 3일 전에 한 약속인데 술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이 복직되었다는 기쁨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복직된 후 정신없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잊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머리속에 요셉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또 기쁘다 하더라도 잠자리에 들었을 때, 처형당하지 않고 이렇게 복직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요셉이 생각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술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린 그것이 요셉에게는 더 큰 복이었습니다. 만일 그 때 술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의 억울한 이야기를 했다면 요셉은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바로가 억울한 요셉을 풀어주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셉은 다시 보디발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살아 있는 한 보디발의 집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가나안 땅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갈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것도 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신분은 종입니다. 노예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허락없이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주인인 보디발이 요셉을 해방시켜주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노예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들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길이 결코 가까운 길이 아닙니다. 몇 십 일은 족히 걸리는 길입니다. 그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먹을 것도 준비해야 합니다.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만일 요셉의 억울함을 바로가 듣고 바로가 요셉을 풀어주었다면 보디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없는 사람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자기의 종 요셉을 가둔 보디발을 바로 왕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의 부정이 드러남으로 인해 어쩌면 낯을 들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술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요셉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 술 관원장이 요셉과 한 약속을 기억하고 요셉을 감옥에서 나오게 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어나오는 말씀에서는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술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감옥에서 요셉을 데려다가 바로 앞에 서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출세의 자리에 앉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2년 전에 술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감옥에서 풀려나게 했다면 7년 동안 계속되는 흉년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함으로 인해서 수많은 애굽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바로 왕이 꿈을 꾸었을 때 술 관원장이 ‘요셉이라면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요셉을 찾으려 했을 때 요셉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가나안 땅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바로의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까지 가서 요셉을 데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 사람만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있던 요셉의 가족들도 긴 흉년으로 인해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세기 15:13-14)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에 계속되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술 관원장이 요셉과 한 약속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당시에 요셉에게는 야속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 관원장이 약속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요셉은 오히려 바로 왕 앞에서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서 7년 동안이나 계속된 혹독한 흉년에서 애굽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까지 양식을 구하러 온 자기 가족들의 생명을 구하고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은혜를 입은 누군가가 내가 베푼 은혜를 잊었을 때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가 나를 잊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더욱 붙잡고 주님께 매달릴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쉽게 문제를 풀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잊었을 때 우리는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더욱 큰 능력으로 내 삶의 문제를 헤쳐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나를 잊었다고, 그래서 내게로부터 받은 은혜를 그가 잊어버렸다고 생각될 때 불평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잊었을 때에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실수로 잊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처럼 기억하고 기념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억력이 쇠퇴하고 다 잊는다 하더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체인 십자가만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머지는 잊어도 괜찮습니다.

 

그 십자가는 망각의 은혜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기억하신다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다 잊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잊으심과 막각의 은혜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난날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을 다 기억하시고 그 죄와 허물에 대해서 징벌하신다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다 잊으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체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도 늘 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잊으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가 내게 행한 마음 아픈 일을 잊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 망각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요셉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첫 번째 아들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므낫세’라는 말은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무엇을 잊어버렸기에 자기의 첫 번째 아들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뜻을 가진 므낫세라고 지었겠습니까? 지난 날 자신의 힘든 세월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형들 때문에 죽도록 고생해야 했고, 노예로 팔려와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모든 지난날을 다 잊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지난 날 아픈 시간들과 고통스러운 경험들만 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그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형들의 죄에 대해서도 다 잊었습니다. 나중에 형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45:7-8) ‘형들이 나에게 몹쓸 짓을 해서 내가 이곳까지 와서 고생고생하여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위해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의 잘못을 다 잊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끌어안고 있으면 가슴 아픈 일들을 굳이 잊지 않으려 안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보다 더 나은 삶, 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데 발목을 잡은 아픔을 기억할 이유가 없습니다. 잊으십시다. 잊으려고 노력하십시다. 그리고 잊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잊어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푹 젖어버리는 것입니다. 망각의 은혜의 결정체인 십자가의 은혜가 내 안에 풍성하면 우리는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여러분, 다람쥐가 가을이 되면 겨울을 준비합니다. 도토리를 부지런히 모아 땅에 묻어둡니다. 그런데 다람쥐는 자신이 양식을 모아 묻어둔 그곳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다람쥐가 땅에 묻어두고서 잊어버린 그 도토리가 나중에 도토리나무가 되어 다시금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선물합니다. 만일 다람쥐의 기억력이 탁월해서 자신이 묻어둔 도토리를 모두 기억해 전부 찾아낸다면 어쩌면 산속에 도토리나무는 씨가 말라버릴지 모릅니다. 다람쥐는 자신의 어리숙함, 자신의 망각 때문에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아야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잊어버림이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안겨줍니다. 때로는 망각하는 것이 더 복된 삶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망각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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