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5장 1~12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이준원 목사 2019.12.1.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제가 감기에 걸려서 코가 막히고 콧물이 나오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오래 전에 감기에 걸려 목이 쉬어서 거의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도 했는데, 오늘은 목소리가 잘 나오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이 보시기에 목소리도 안 좋고 코를 계속 풀기도 하니까 몸이 상당히 안 좋은가 보다 하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실 몸은 아프지가 않습니다. 콧물만 나오고, 거의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오히려 며칠 전 몸이 많이 안 좋았을 때는 목이 굉장히 아파서 침만 삼켜도 아팠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기침도 나지 않고 콧물도 안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보셨다면 아픈지 모르셨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몸이 안 아픈데도 증상이 보이니까 훨씬 아프다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도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겉으로 안 좋은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목회편지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별 증상이 안 나타나며 겉으로는 할 일을 다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 썩어 있으면 훨씬 더 심각한 상태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제였고 예수님은 그것을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예배를 드리자마자 나가면서 막 싸우는 것을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멱살을 잡고, 예배를 하고 나가는데 큰소리를 지르며 싸웁니다. 예배를 마치고 공동의회 등 회의를 하면서도 막 싸웁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럼 도대체 방금 전 드린 예배는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방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가면서 멱살을 잡고 싸울 수가 있습니까? 그럼 그 예배는 도대체 무슨 예배였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에 금방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오래 다닌 직분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예배를 해도 왜 그렇게 되는가? 우리가 성경 전체를 볼 때, 예배를 하기는 하지만 거짓 예배자들이 있고 참된 예배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거짓 예배자들이 나오고 참된 예배자가 나옵니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신임 총독 베스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 (1-5절)
1)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베스도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1절)
신임 총독 베스도가 유대 지방 제12대 로마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베스도는 판단력, 행정력, 지도력 등 모든 면에 걸쳐 이전 총독이었던 벨릭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에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자신의 관할지역 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먼저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 일 후에” 갔다고 되어 있는데 3일째 되는 날 갔다는 겁니다. 신임총독 베스도가 가이사랴에 처음 도착한 날이 첫째 날이고, 그 다음날이 둘째 날, 그 다음 날이 셋째 날 즉 ‘삼 일째’입니다. 그러니까 가이사랴에 도착하고 나서 다음 날 하루만 쉬고 예루살렘 방문을 갔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가이사랴까지의 거리는 당시 배를 타고 최소한 열흘 이상 항해해야 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열흘 이상 배를 타고 왔다면 사실 배 멀미도 했을 것이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지금 크루즈처럼 큰 배나 좋은 배도 아니고 바람에 따라 노를 저어 가는 배인데, 열흘이나 왔는데도 불구하고 황제의 명을 받아서 온 베스도는 결코 편하지 않은 여행길이었겠지만, 하루만 쉬고 가이사랴에서 60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현지로 방문을 간 것입니다. 그곳의 종교지도자들도 만나고 사정을 확인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스도는 벨릭스와 달이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2절)
베스도 총독의 예루살렘 방문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예루살렘의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높은 사람들, 즉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 장로들 등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지도자들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만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울을 고소합니다. 신임 총독이 왔으니까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가장 먼저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3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신임총독 베스도에게,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지금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한 번 해달라고 하고 만 것이 아니라 계속 아주 집요하게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암살단을 매복시켜놓았다가 그를 죽이려는 것입니다.
이 암살단이 누구입니까? 2년 전 벨릭스가 있을 때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여 명입니다. 그 사람들이 2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2년 동안 살아 있는데 어떻게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겠습니까? 맹세를 할 때 잘해야 하는데 함부로 했습니다. 슬쩍슬쩍 먹으면서, 어쨌든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하며 있었습니다.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자기가 한 말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말을 꺼내놓았지만 지키지 못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계속 진행합니다. 어쨌든 이들의 목표는 오직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을 해달라고 요청해서 오게 되면 중간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려고 합니다.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4-5절)
총독이 처음 부임하면 자기가 부임한 지역의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웬만하면 들어주겠지만, 베스도는 여기서 뭔가를 간파한 것입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기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밀리면 자기가 여기 있는 동안 힘들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약간의 기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예루살렘으로 바울을 옮겨달라는 그들의 집요한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야단치는 게 아니라 정중하게 거절하며, 그 이유도 좋습니다. ‘왜 여기서 해야 하는가? 이미 가이사랴에 잡혀 있으니까, 당신들이 그리로 와서 거기서 재판하자.’라는 겁니다.
2) 변화되지 않은 거짓 예배자들
이것을 보면, 지난 23장과 24장에서 나온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처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소요로 로마 천부장이 그를 잡아서 요새에 잡혀 있었는데, 그때도 40여 명의 암살단원들, 바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그 사람들이 안토니오 요새와 산헤드린 공회 사이에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옮길 때 급습해서 죽이겠다는 암살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도 똑같은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천부장 루시아가 그것을 막고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바울을 이송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 종교지도자인 장로들이 더둘로라는 사람을 고용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직접 찾아가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지금 24장과 25장 사이는 한 장 차이지만, 기간은 2년이라는 시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2년이라는 긴 기간이 지났는데도, 유대 사회에서 최고로 높은 사람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2년 전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암살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똑같은 악한 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럼 다른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표현이 있는데, 2절에서 ‘대제사장’이라고 하지 않고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한 명입니다. 그리고 임기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아론의 후손들 중에서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아들이 이어서 대제사장직을 계승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 때는 딱 한 명밖에 대제사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대제사장’이라고 단수로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라고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잡히실 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요 18:3)이라는 식의 표현이 나옵니다. 유대 땅이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지만 권력자에 따라서 대제사장을 교체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직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는데 교체를 당하게 되니까 이전 사람과 지금 사람이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 때는 장인인 안나스가 대제사장이었다가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3장과 24장에서 대제사장은 아나니아였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그가 벨릭스 총독 말기에 13절에 나오는 아그립바 왕(헤롯 아그립바 2세)에 의해서 아나니아가 이스마엘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임총독 베스도가 부임했을 때는 대제사장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로 표현한 겁니다.
아나니아도 이스마엘도, 계속 바울을 고소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마엘도 이름만 안 나왔다 뿐이지, 2년 전에 더둘로와 함께 와서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발할 때 “장로들”(24:1)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나 오늘의 본문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신임총독 베스도에게 바울을 다시 고발할 때, 전임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대제사장들”(2)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2년이 지났지만,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매일 각종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사장으로서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만 제사를 드렸다 해도, 1년이면 50번 이상이고 2년 동안이면 100번 이상 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서 일주일에 두 번씩 제사를 드렸다면, 2년 동안 200번 이상 제사를 드린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난 2년 동안 그렇게 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들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악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2년 전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바울을 증오했고, 2년 전과 똑같이 의로운 바울을 고발했고, 2년 전과 똑같이 의로운 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몰래 암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공식적으로는 바울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고발하는 척하면서 바울이 오는 길에 죽이려고 매복하여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뭡니까? 로마제국의 법을 바울이 어긴 일이 없기 때문에 총독 법정에 가보아야 바울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재판하기 전에 그냥 중간에서 몰래 죽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악합니까? 자기들도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단지 미움 때문에 또 증오 때문에 중간에 매복하고 있다가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이들이 무슨 깡패 두목들입니까, 조직폭력배 우두머리입니까? 이들은 대제사장이고, 종교지도자이고, 산헤드린 공회원(지금으로 하면 국회의원)입니다. 최고로 높은 그 사회의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놀라운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입니까? 그런데 이 최고의 종교지도자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고 있는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겠습니까?
이들은 지난 2년 동안 수많은 제사를 집행하고 백성들을 인도하며 영적지도자로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함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제사 즉 예배를 드렸어도, 성전에서 드린 그 수많은 예배가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의미한 종교적 형식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3) 나는 거짓 예배자인가, 참된 예배자인가?
사실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은 이 말씀을 볼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금방 교회에 나오신 분들은 아니지만, 저처럼 몇 십 년 교회 다닌 분들, 태어날 때부터 다닌 분들, 어릴 때부터 다닌 분들은, 이런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화석화이고, 화석화를 넘어서서 완전히 악하게 된 것입니다.
2년이라는 기간이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지난 2017년 12월 첫 주일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때부터 지금까지 2년 동안 주일예배에만 꼬박 참석해도, 우리는 100번 이상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 100번 이상 예배를 드렸는데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2년 전에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던 사람을 혹시 지금도 계속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더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2년 전에 하던 어떤 불의한 방식의 일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또 2년 전에 남을 험담하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나쁜 말을 하던 것을 지금도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면, 그럼 100번 이상 드린 우리의 예배가 도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 예배가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였을까, 우리는 정말 자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예배를 2년이 아니라 몇 십 년을 드린들 과연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정말 심각하게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생각하면 됩니다. ‘나 자신이 예배를 이렇게 드리면서 뭐가 변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심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특히 저처럼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예배가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예배가 살 때 삶이 변화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일주일 동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환경에서도 우리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고 제대로 은혜 받지 못하고 제대로 말씀을 붙들지 못하고 그냥 삶 속으로 나간다면, 평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자신의 삶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며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공 예배에서 성공할 때 개인 예배에서도 성공합니다. 그런데 예배의 핵심은 단순히 은혜 받는 게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헌신과 결단입니다.
옛날에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딱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예배를, 우리는 이렇게 마음껏 아무 때나 드릴 수 있게 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나아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살아온 것, ‘내가 이렇게 열심히 잘했습니다.’ 아니면 ‘잘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하는 것을 다 들고 나와서 ‘그래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다 왔습니다.’ 하며 드리는 겁니다. 헌금함에 헌금을 넣을 때 돈만 넣는 게 아니라, 헌금봉투를 넣으실 때 그렇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일주일 동안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참 잘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면 ‘해보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해보겠습니다.’ 하는 그 마음을 여기에 넣어서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한 가정 한 가정이 넣은 것을 함께 모아 봉헌하는 것입니다. 돈만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삶을 바치는 시간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입니다. 만약에 그런 예배를 우리가 매주 드린다면 어떻게 이런 모습이 계속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는 설교만 듣거나 성가대의 찬양만 들으며 감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보는’ 게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예배 본다’고 하는데, 예배를 보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얘들이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나 보자.’라고 하십니다. 예배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예배 봤다.’라고 하는 말은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것이니 아주 조심해야 할 말입니다.
예배는 보는 게 아닙니다.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붙들고 특히 말씀 한 가지를 붙들며 ‘하나님, 제가 이번 주에는 정말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가서 살고, 그 산 것을 가지고 돌아와 드리면서 다시 한 번 말씀 붙들고 결단하고 나가서 살고, 또 돌아와서 결단하고 나가서 살고... 이런 것이 반복된다면 2년 동안 100번의 예배를 드릴 때 어떻게 삶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삶이 변하지 않으면 이상한 게 아닙니까? 그런데 예배에 아무리 많이 참석했어도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면,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면, 예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예배를 제대로 안 드린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 여기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거짓예배자였다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결국 사랑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라고 하며, 율법을 하나로 줄이면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롬 13:9). 사실 그 이웃 사랑 안에 하나님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삶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게 없다면? 남을 해코지하지 않았고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안 한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피해를 안 준 것이 끝이 아니라,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또 한 번 하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을 예배 때 결단하는 겁니다. 결단하고 나가서 살고, 와서 또 결단하고 또 나가서 살고, 또 오고 그러는 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와 개인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항상 그렇게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살고 와서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또 받고 결단하고 나가서 또 살고, 그것을 가지고 와서 또 드리고, 또 결단하고 나가 살고 와서 또 드리고... 바로 이겁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삶은 이렇게 형식적인 종교주의자처럼 되지 않고 참된 예배자로 나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참된 예배자 바울 (6-12절)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6절)
베스도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8일을 머물고 가이사랴로 되돌아갑니다. “팔 일 혹은 십 일”이라고 했는데 큰 상관은 없습니다. 오가는 날수를 다 합치면 10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8일 정도 있었습니다. 이때 여러 가지 접대도 받고 중요한 사람들도 만나고 그랬기 때문에, 열흘 정도 만에 예루살렘 방문과 시찰을 끝냈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유대 총독은 돈이 되는 자리로 유명했습니다. 서로 가고 싶은 자리였고, 그래서 벨릭스 같은 사람이 돈을 많이 챙긴 겁니다. 바울에게서조차 돈을 챙겨보려고 하다가 갔습니다.
베스도도 돈을 챙기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지만, 그가 열흘 만에 가이사랴로 돌아왔다는 것은 베스도가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대제사장들과 유력한 사람들이 베스도와 같이 가이사랴로 갑니다. 거기서 베스도가 말한 것처럼 바울을 고발하려고 같이 간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바로 호출합니다.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7절)
총독이 오라고 하니까 바울이 법정에 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이번에는 2년 전과 달리 웅변가 더둘로와 같이 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해보니까 괜히 돈만 썼지 된 게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관두고 자기들끼리 왔습니다. 자기들끼리 왔지만 이때도 똑같이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이야기한 것이 분명한데, 그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어떤 증거도 대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제국 법이건 유대 종교법이건, 어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고발 내용은 다 모함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답변할 기회가 주어지자 단호히 자신을 변호합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8절)
성경에는 ‘아니하다’라는 표현이 유대인의 율법, 성전, 가이사에게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이 세 가지에 대해 다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고, 성전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고, 가이사(황제)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7절에서 이들이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한 내용이 주로 이 세 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을 범했다. 성전을 모독했다. 황제를 모독했다.’ 등의 세 가지 범주로 바울을 고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가이사’ 또는 ‘카이사르(Kaisar)’를 영어식으로 ‘시저(Caesar)’라고 합니다. 이 말이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예 황제를 시저라고 불렀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기 후계자로 점찍었던 양아들이 옥타비아누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원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어보려고 하다 암살당했고,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첫 번째 황제가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가이사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Augustus)이고, 바로 그가 예수님 태어나실 당시 요셉과 마리아를 비롯해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고향에 가서 호적하라고 한 가이사 아구스도입니다. 그로부터 ‘카이사르’는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9절)
여기서 베스도는 벨릭스와 비슷하게 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벨릭스처럼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베스도의 목적이었다면, 그는 그냥 예루살렘에 처음 갔을 때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서 바로 그때 바울을 불러왔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고, 사실은 베스도가 굉장히 수가 높은 겁니다. 이 사람이 정치적으로 오히려 벨릭스보다 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지금 바울의 단호한 진술을 들으면서, 베스도는 딱 보고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지금 유대 총독으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됩니다. 따라서 바울의 무죄를 알지만, 유대인들의 마음도 어느 정도 달래주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물은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입니다. 그러니까 베스도는 굉장한 고수 정치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0-11절)
지금 베스도가 예상한 대로 바울은 자신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런데 자기 제안을 거절했다고 베스도가 바울에게 벌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이 말이 베스도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는가 하면,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와 그 전 벨릭스 등 총독과 로마군이 로마 시민을 지키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로마 시민으로서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2절)
여기 “배석자들”이라고 나와 있는데 일종의 배심원단입니다. 법률 전문가와 총독 자문단이 총독 재판 때 항상 함께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그들과 상의한 다음에, 로마 시민인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입니다.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니까 가이사에게 갈 것이다.” 그것이 로마 시민의 권리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가야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라고 이미 말씀하셨고,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 교회에게 써서 보냈던 로마서를 보면 그것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가이사랴에서의 재판보다 훨씬 오래 전에 바울은 이미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방문하기를 여러 번 원했는데 가지 못했다. 내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교회들이 모은 구제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스페인으로 가면서 여러분에게 들르겠다.’
로마에 가야 하는데 2년 동안 못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2년 동안 바울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주님, 과연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가 로마로 가야 하는데 왜 여기 이렇게 잡혀 있는 것입니까?’ 벨릭스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인데,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기도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베스도가 부임했을 때 바울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로마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갑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갈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로마 시민은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그러면 내가 황제에게 상소하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결론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날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로마로 가는 길을 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황제에게 상소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선교헌금을 받고 자기도 일하며 선교비를 마련해서 선교 사역을 했고 이곳저곳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로마도 가야 하는데, 이렇게 잡히지 않고 평소 같았으면 또 자기가 비용을 마련하고 선교비를 받으면서 로마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돈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해줍니다. 이런 길이 있는데 왜 안 하겠습니까? 그래서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그러면 로마 군인들이 지켜주면서 로마까지 가야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2년 사이에 풀려났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풀려나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 군인들이 지켜주면서 로마로 가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2년 동안 바울이 어떻게 극복하고 여기에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해, 그의 편지들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가서 감옥에 갇혀 에베소 교회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1).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썼다면, 로마 감옥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4-6)
로마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감사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뭡니까? 나중에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가이사랴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바울은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늘 아뢰며, 늘 기도하며 늘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면서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이 가이사랴 감옥이든 나중에 로마 감옥이든,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 어려운 기간을 버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참된 예배자였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견디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가는 말]
영국 국교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인격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의 진리로써 우리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그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에서 하나로 모아지게 되며,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덜 이기적인 감정이다.”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영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단순히 이렇게 예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매주 이렇게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하나님을 정말 뜨겁게 만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정말 발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붙들며 결단하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러한 참된 예배자로 우리가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은, 비록 바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아무리 예배 행위를 많이 해도, 참된 예배가 아니라 거짓 예배나 형식적인 예배로밖에 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우리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함으로 염려하지 않고 간구하며, 하나님께 늘 아뢰며,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약 --------------------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 25장 13~27절(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방문) - 이준원 (1) | 2024.02.11 |
---|---|
행 25장 1-12절(주님이 주신 비전을 향하여!) - 권율 (1) | 2023.10.30 |
행 26장 13-23절(다시 한 번 나누는 회심 및 사명 간증) - 이준원 (0) | 2023.07.25 |
행 26장 19-29절(구원의 기회를 결코 미루지 않는다) - 이삼규 (0) | 2023.07.13 |
행 26장 1~12절(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 이준원 (0) | 2023.07.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