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6장 19-29
구원의 기회를 결코 미루지 않는다!
이삼규 목사 20141221
행 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행 26: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행 26: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행 26: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행 26: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 26: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행 26: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행 26: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행 26: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사슬에 매인 한 사람, 바울이 서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시기심과 원한 때문에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를 고소한 죄목이 무엇입니까? 강도? 살인? 반역? 방화?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강도, 살인, 반역, 방화범들이 많았겠지만, 유대인들은 바울을 그런 죄목으로 고소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죄들 중 단 한 가지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늘의 사람’이 ‘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지금 ‘땅의 사람들’은 ‘하늘의 사람’을 향하여 이를 갈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번 태어난 자들’이 ‘두 번 태어난 자들’을 핍박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늘의 사람’이 ‘땅의 사람들’ 앞에서 그의 신앙을 변증하는 것을 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 선 사도 바울의 모습과 태도는 인간적 눈에는 초라하게 보일지 몰라도 신앙적 눈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기품이 있게 보입니다. 그의 변증은 너무나도 논리 정연하고 유려합니다. 그는 말만 그럴듯하게 꾸며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변증에는 깊은 학식과 솔직함이 배어납니다. 그는 아그립바의 동정심에 호소하지 않고 자신의 논지를 그에게 정확하게 이해시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의 체험에 대한 고백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변증이 될 정도로 솔직하고 감동적입니다.
유대교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여기에서 바울이 엄격한 유대교 신자였던 점을 고백하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단순히 유대교를 버린 배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배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헌신짝 버리듯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회심 전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지만 유대교 신자로서는 구약과 랍비들의 교훈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유대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완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창세 이후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분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증은 왜 자신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변증을 쉽게 풀어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우리의 조상들이 믿지 않았던 것을 받아들인 적이 이제까지 없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이 자리에서 나를 고소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결코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유대교를 믿고 바로 유대교의 이름으로 나를 고소하여 오늘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나는 바로 그 유대교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유대교의 배교자로 간주하지 마십시오. 나는 유대교를 버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서는 변명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유대교가 대망하던 메시아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을 찾은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자기도 처음에는 무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핍박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하늘의 빛이 너무나 강하게 그를 비추었고, 그로 인하여 3일 동안 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제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그리하여 유대교의 완성 자이신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이후, 나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헌신해 왔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신 분이십니다. 이제 나의 사면은 구주가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한 후에 다시 부활하여 유대인과 유방인의 빛이 되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슬에 매인 것도 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당당하고 논리 정연한 변증을 들은 아그립바 왕은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진리를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를 그에게 제시하면서, 그가 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확실히 설명해준 것입니다.
“왕이시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가 되셨다면, 당신을 위한 구주도 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유대교의 좁은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를 발견했다면,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당신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정확하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의 말에는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복음 전도에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뿐 아니라 바울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였을 것입니다. 바울의 변증이 끝났을 때 아그립바가 뭐라고 말하였습니까?
“네가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뻔했다”
행 26: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의 말에 깊은 감동을 느낀 아그립바는 “사도 바울, 당신의 말이 나를 기독교로 개종시킬 뻔 했소. 당신의 변증이 나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뻔했소”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그립바의 반응을 보고 바울은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그는 순간적인 잔꾀를 부린 즉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대답은 경박하거나 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기품 있고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오늘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소원하는 것은, 당신과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될 뻔하다 마는 것은 참으로 저주스러운 일입니다. 아그립바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라고 별 생각 없이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일생 최대의 비극적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실수는 난파, 지진, 전염병 같은 재앙들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았지만 뒤돌아서 가버리는 사람, 복음을 들었지만 거부하는 사람, 가룟유다처럼 천국의 문에 입 맞추었지만 돌아서서 지옥으로 가버리는 사람 등 이런 사람들도 속으로는 ‘내가 언젠가는 믿으리라’고 다짐하면서 복음을 거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의 궁극적 선택은 복음의 거부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의 비극은 필설로 나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그립바의 “될 뻔했다”는 말은 그의 미래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그의 “될 뻔했다”라는 말은 그가 꿈꾸어 왔을지도 모르는 ‘이상적 세상’에 대한 희망의 물꽃을 완전히 꺼버리는 비극적 표현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비극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입니다. ‘될 뻔했다’가 아니라 ‘되었다’라고 끝나야 합니다.
성(聖) 유다가 될 뻔한 사람
우리가 가룟유다에 대해 묘사할 때 다소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는 악마가 아니며, 우리처럼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탄이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 아무리 그를 타락시키고 파괴한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인간입니다.
요즘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든 수원 토막살인 사건이 있습니다. 박춘봉이라는 중국동포가 동거녀를 죽여 토막 내어 시신을 유기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그를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그도 인간입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사람도 인간적 심성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이나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까지 그들도 여전히 인간입니다. 가룟유다도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 인간으로서 모든 면에서 철두철미하게 악하고 저질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그가 평소에 악하고 저질적으로 행동했다면 주변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팔아먹을 것이라고 금방 의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심지어 예수님의 회계를 맡았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은 30 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후 그가 예수님이 정죄 당하신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그 은을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들에게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한 후에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여 나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가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는 그것을 후회하며 가책을 느낄 정도로 심장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가책을 느꼈다거나 그의 심장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성(聖) 유다(St. Judas)가 될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될 뻔했습니다. 사실 처음에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일들을 행하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사탄이 그를 유혹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 유다가 될 뻔했으나, 결국 가룟유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룟유다 이후 유다라는 이름은 저주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본래 ‘찬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뜻을 가진 유다라는 이름이 가룟유다 이후에 그 이름을 따서 유다라고 이름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방긋방긋 웃는 아기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 주겠습니까? 하지만 가룟유다도 회개했더라면 한순간에라도 ‘예수의 신실한 종 유다’라는 이름을 얻고, 역사 속에서 ‘성 유다’로 불렸을 것입니다. 그는 성 유다가 될 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장로님이 될 뻔 했던 사람, 권사님이 될 뻔 했던 사람, 안수집사가 될 뻔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구원받을 뻔한 사람
형무소에 가면 종신형을 사는 죄수들이 있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옥살이를 하는 그들도 과거에는 착한 사람이 될 뻔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과거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들이 사형수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 믿자고 전도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그때 전도를 받아들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생활을 시작하였더라면 그 자리에 그들이 있겠습니까?
그들도 처음에는 작은 죄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작은 범죄로 시작하여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무기수들도 한때는 선량한 시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저택, 자동차, 직업을 갖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고 안정된 시민으로 살아갈 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어두운 창살 뒤에 있습니다. ‘될 뻔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실제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사탄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마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참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가다가 중지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게 하십시오. 내가 참신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믿으라는 대로 믿으십시오. 성경이 행하라는 대로 행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신다면 그분은 그분의 일을 여러분에게 확신시키실 것입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오늘 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신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과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게 됩니다. 구원의 기회를 결코 미루지 마십시오. 구원받을 뻔한 사람이 아닌 구원받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 --------------------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 25장 1~12절(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 이준원 (0) | 2023.08.10 |
---|---|
행 26장 13-23절(다시 한 번 나누는 회심 및 사명 간증) - 이준원 (0) | 2023.07.25 |
행 26장 1~12절(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 이준원 (0) | 2023.07.02 |
행 26장 24-32절(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복음) - 이삼규 (0) | 2023.06.23 |
행 27장 14-27절(희망을 가지십시오) - 유은호 (2) | 2023.06.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