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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13-16절(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십니까?)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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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13-16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십니까?

이삼규 목사 20160207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 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히 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정진홍님의 《마당에는 때로 은빛 꽃이 핀다》글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고향에 가고 싶다. 큰댁 뒷동산에 있던 용틀임하던 소나무는 죽은 지 오래다. 내가 자라던 집은 흔적조차 없다.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서 스무 걸음 떨어진 개울에는 물도 말라버렸다. 거기서 빨래하던 아낙들은 어쩌면 이제는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게 되었을 듯하다. 그런데 가고 싶다. 그래, 고향에 가면, 고향으로 돌아가면, 나는 비로소 나를 사랑하리라. 나는 나를 토닥거리고 싶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피곤한 마음도 상처 난 몸도 쉬게 하고 아프지 않게 하리라.

 

설명절을 맞이하여 고향을 방문하신 형제자매님들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봉독해 올린 말씀을 가지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시다!”라는 제목으로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을 찾는 풍속이 있습니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대 이동을 하였습니다. 고향 가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고 많은 시간이 걸려도 기를 쓰고 고향을 찾아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 즉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듯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아무리 낙후된 시골이요 오지라도 고향에 가면 포근함과 옛날의 따스한 정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어머니 품은 언제나 그리운 것과 같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6.25전쟁이후 남북의 분단으로 인하여 많은 실향민들이 살아생전 고향 땅을 가보려나 하는 기대 속에 살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옛말에 “서럽다 서럽다 타향살이, 처가살이보다 서러울까?”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자성어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살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향하여 죽는다는 말입니다. 짐승도 그러한데 사람이야 더할 나위가 있느냐는 의미로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에 나가 돈을 벌고 평생을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죽으면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와 묻히는 것을 봅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가 향수병에 걸린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 친구가 필립핀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때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조용필 노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향수병에 걸린 나그네의 인생은 어떤 것일까요?

 

1.계속해서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약속의 땅을 향해 끊임없이 걷고 또 걸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 가운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고향, 친척, 조상의 땅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을 향해 먼 길을 떠났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밤중에 몰래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흔히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만 가면 직장도 생기고 돈도 많이 벌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당고모님이 서울 답십리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 답십리는 거의 판자촌 수준이었습니다. 제가 그 집에 한 번 방문해본 적이 있는데 부엌도 없고 연탄 불 때는 조그마한 부엌이 있는데 그 위에다 밥도 해먹고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집도 아주 좁았는데 그 때 시골에 사는 친척들이 서울에만 상경하면 다 그 집에 갔습니다. 그래서 소위 칼잠을 잤습니다. 칼잠이 뭡니까? 방이 좁으니까 옆으로 누워서 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지낸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희 큰 형님도 야반도주를 감행하다가 그만 발각이 되어 붙잡혀 오고 말았습니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객지에 나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때 붙잡아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쯤은 서울에서 잘나가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이 이끄시는 땅을 향해 이전에 평안하게 살던 삶의 터전을 박차고 나간 것입니다. 그의 목표는 유업으로 받을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목적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도착한 후에야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청중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고 이것이 아브라함과는 대조적인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곳에 임시 거주자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반응과 기대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일시적인 거주자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후손들과 더불어 그곳에 거주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우리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곳이 가나안 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도시 혹은 성은 어디였을까요? 그곳은 바로 더 나은 본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님을 믿고 하나님이 지으실 영원한 성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는 나그네입니다.

 

성도는 새 예루살렘(계 21:2-4)에 들어갈 날을 사모하며 이 땅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터가 있는 성은 아브라함이 족장으로 살던 장막과 대조되는 영원한 성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소망이 있는 자는 이 땅에서 사는 장막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성도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까지 나그네 길을 계속해서 걸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듯이 성도는 이 땅에서 새 예루살렘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이 땅은 나그네 길이며, 그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편안하고 즐겁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떤지에 별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성도의 관심사는 장차 거할 더 나은 본향에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이 땅에 두면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거기다가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소망은 사람으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참된 안식이 있는 그 성을 향해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2.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3절에 보면 먼저 간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따라 죽고 기업을 받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다가 갔다는 말씀입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국적이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이 자기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고 본향에서 온 외국인으로 살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한 평생은 나그네 인생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벧전 2:11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거류민”이란 영어로 alien(엘리언)인데 그 뜻은 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우리말 사전에 보면 “고향을 떠나 객지에 있거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를 영어로는 “stranger”(스레인저/스트레이저) 또는 “exile”(엑사이얼)이라고 합니다. exile이라는 단어의 뜻은 타향살이, 유배생활, 유랑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용어로는 순례자라는 뜻을 가진 Pilgrim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본향인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를 헬라어로는 “파레피데모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일시적으로 외국에 체류하면서 생활하는 거류민 또는 길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으로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 본향인 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이 영원한 본국인줄 알고 세상에만 연연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죽어 땅에 장사지낸 사람은 자기 무덤의 비에 무엇이라 써있는지 알지 못하며, 한 사람도 무덤에서 나와 자기 비석을 읽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의 거류민이요 나그네인생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애굽으로 피난을 와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로가 물었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뇨?” 옛날 번역에는 “네 연세가 얼마뇨?”라고 했습니다. 그 때 야곱이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야곱은 자기의 살아 온 인생길이 “나그네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나이가 얼마입니까? 우리는 나이를 물을 때 “몇 살입니까?” 또는 “몇 살 먹었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여기 “살”이란 말은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타향살이, 머슴살이, 더부살이, 셋방살이, 처가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삶을 말할 때 “살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나이를 먹는다.”라는 말도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먹는다.”라는 말은 몸 밖에 있는 것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즉 나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때로는 그 성이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 멀리 조그마하게라도 눈에 보인다면 힘을 내서 걸어 보겠는데 눈앞에는 메마른 땅만 끝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아름다운 성, 즉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 사라도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시고 그 자녀를 통해 수많은 후손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이 약속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던 사라는 믿음으로 잉태할 힘을 얻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외국인으로 혹은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사라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돌아갈 본향이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외국인으로 나그네로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달픕니까? 미국 같은 나라는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갖기가 얼마나 힘이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돈을 들여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바라보면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하나님이 가능케 하시는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사라는 89세에 임신하여 9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생리도 끝났고 도저히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이미 단산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으로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로 힘겹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3.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 ‘소풍 온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는 족장들의 역사는 그들이 떠나온 본향이 아닌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방랑이 아닌 방랑을 했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멀리서 바라보며 믿음의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믿음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본문 16절에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다시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마치 자동차나 비행기가 가는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길도 마지막 종착지인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본향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더 나은 본향”입니다. 이 세상과 비교가 안 되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본향을 영어성경에는 Better country라고 하였습니다. 즉 더 나은 나라라는 뜻입니다. 나그네살이를 하는 이 세상과 비교가 안 되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아벨에서 시작하여 모세까지 16명의 믿음의 장부들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 같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16절 하반 절에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을 위하여 장차 거할 한 성을 예비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God has prepared a city for them).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아노라

 

'21세기 사전' 이라고 하는 책이 요 근자에 나와서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또 많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자끄 아탈리’라고 하는 분이 쓴 것인데 21세기를 전망하면서 ‘모든 분야에 이러한 변화가 올 것이다’라고 예측을 하고 그걸 다 모아 놓고 보니까 마치 사전과 같아 서 '21세기 사전' 이렇게 책이름을 지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21 세기에 사람들의 모습에 중요한 특징은 도시 유목민이라는 것입니다. 그 유목민이라는 말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도시 유목민이라는 거죠. 옛날처럼 방랑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도시에 살면서 유목민이올시다. 그 마음이 생각이 유목민적이라는 것이죠. 많은 사람이 모여 살지만은 고독합니다. 정착도 없고 안정도 없습니다. 소위 아파트 족을 보면 아무 이유도 없이 2년마다 이사를 합니다. 이사 안 하고는 못 삽니다 좀이 쭈셔서. 이거는 유목민의 마음입니다. 한 자리에 정착하지 못하는 겁니다. 별로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도 아니면서 옆집으로라도 이사를 한 번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유목민의 속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목민 중에는 밥 한 끼를 먹지 못해서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 그저 아침부터 밤까지 헤매고 다녀야 하는 그런 불쌍한 그런 방랑하는 유목민이 있고, 또 하나는 나름대로 넉넉하게 물질이나 모든 여건을 갖추어 가지고 나름대로 자기는 '넉넉하다' 스스로 만족하면서 사는 유목민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미처 몰랐을 겁니다. 확실한 유목민입니다. 그런고로 문제는 정착성 없는 나그네라는 점에는 마찬가지인데 어디에 있던 간에 ‘나그네의 성격, 나그네의 가치관, 나그네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살던지 이런 사고방식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유목민 즉 나그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는 아주 좋은 집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예비한 하늘나라에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80-90년 사는 이 땅에서는 넓고 많은 땅을 가지고 있고 집도 여러 채가 있고 아주 저택에서 산다고 하여도 영원히 살아야 할 하늘나라에는 집이 없다면 이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시 90:9절에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瞬息間)에 지나갔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참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짧습니다.

 

여러분은 간절히 기다리는 특별한 날이 있습니까? 사람은 이 땅에서 입시,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자녀의 성공과 같은 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뤄질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지만 성도가 정작 기다려야 할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는 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재림에 고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은 이미 성취된 다른 약속들처럼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본향을 그리워하며 준비 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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