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장 8-12, 17-19
믿음
최태선 목사 2015.6.7.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란 단어보다 친숙한 것은 없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도 없습니다. 믿음이란 분명 이렇게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믿음처럼 피상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각자의 이해와 필요에 따라 가장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오래전 신대원을 졸업하고 형의 동창 분을 만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분이고 그분 역시 기독교에 진지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집에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다고 그분은 존댓말까지 써가며 저를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 만남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그분의 아내의 기도였습니다. 당시는 야베스의 기도가 한창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분의 기도는 그야말로 유창했습니다. 마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의 주석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그런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어 그분에게 다른 책을 가져다주고 어떤 접촉점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런 저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분들의 믿음이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그런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제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 그 유창한 기도를 하시던 아내분이 췌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찾아가 참 믿음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형통함과 복을 구하던 그분들의 믿음이 그분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궁금한 것은 그분이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형 친구가 지금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하지만 거의 확실한 것은 그분의 믿음이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한 번 잘못된 이해를 가지게 되면 그것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일이야말로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인간의 약점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다가 야베스의 기도나 긍정의 힘과 같은 류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한국의 기독교의 전체적 흐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복과 형통만큼 종교인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기독교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뜻있는 스님들 역시 현대불교의 가장 큰 폐단이 '버림의 해탈'을 '소유의 집착'으로 둔갑시킨 기복신앙이라고 탄식합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 36장 57절에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복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기도처럼 "명예롭고, 복이 넘치고, 땅이 넓고, 불행이 없어지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저주받은 인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매 맞고 쫓겨 다니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고 몸에 병을 달고 살아야 했던 사도 바울이야말로 가장 믿음이 없는 사람의 전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기독교의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실패자들은 믿음이 없는 비참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실제로 추구하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이 오늘날 기독교 비극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꿈을 꾸는 사람
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조지아에서 미시시피와 앨러버마에 이르기까지 옛 노예의 아들들이 옛 주인의 아들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게 되는 꿈입니다. 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백인 어린이가 흑인 어린이와 형제자매처럼 손을 잡고, 피부색깔 대신에 인격을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를 하여 평가를 받게 되는 꿈입니다. 나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모스의 예언이 실현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며, 진리가 거대한 분류처럼 흐르게 되는 꿈입니다. 어느 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생명 자유 행복 주구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제퍼슨의 말을 인정하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산골짜기가 솟아오르고, 언덕과 산들이 주저앉으며, 굽어진 곳이 곧게 펴지고, 신의 영광을 모든 인간이 함께 볼 수 있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형제가 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아이들이 흑인이건 백인이건, 유대인이건 비유대인이건, 개신교도이건 가톨릭신자이건, 모두 손을 잡고 "자유가 왔다! 자유가 왔다! 신이여 감사합니다!"하고 영가를 부를 수 있는 날, 나는 지금 그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1963년 8월 23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 연설문의 일부입니다. 1865년 4월 9일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흑은 노예들의 해방이 선언된 지 백 년이 지났지만 미국 흑인들의 비참한 삶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공공장소는 백인과 흑인의 자리가 나누어져 있었고, 흑인들은 출생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고 씻을 수 없는 깊은 영혼의 상처가 새겨지는 처절한 현실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저는 킹 목사의 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문이야 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흔들리지 않는 삶의 모습이며 믿음의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단지 우리가 잘 되어가고, 승리의 가능성이 있으며, 원수들을 물리치고 자리가 역전되는 그런 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완성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일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 완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꿈을 꿀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완성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말했던 것처럼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는 날까지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섬기는 사람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스톡데일 장군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 최악의 장소였던 '하노이 힐턴' 전쟁포로수용소에, 1965년 에서 1973년까지 8년간 그곳에서 20여 차례의 고문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해군 3성 제독입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 짐콜린스(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와 했던 인터뷰 내용입니다.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가 말했다. "아, 그건 간단하지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낙관주의자요? 이해가 안 가는데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갑니다.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또 한 차례의 긴 침묵과 더 많은 걸음이 이어졌다. 그러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에는 성공하리라는 믿음, 결단코 실패할 리가 없다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규율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톡데일은 낙관주의자들을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우린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에 대비하세요."
그런 그에게서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s paradox)"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국에는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동시에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로부터 여기까지 교훈을 얻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톡데일 장군이 단순히 믿음을 잃지 않는 가운데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교훈을 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섬김의 길을 가는 믿음의 본이었다는 더 중요한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는 삼성 장군이었지만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가 포로들을 타이른 것은 단순한 상담자의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포로들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일깨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는 장군이 아니라 종이었습니다. 포로수용소라는 가장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장소에서도 그는 섬김의 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스톡데일 장군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섬김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 일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가장 현저한 특징입니다. 그는 어디에 있던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자리에 머물며 그들을 섬기는 종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종(servant)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거절까지 당한 '거절당한 종'의 모습이야말로 참 믿음을 가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오해 내지는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음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두 사람을 소개하였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꿈을 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믿음을 가진 자는 유배의 땅에서도 섬김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꿈을 꾸고 있어야 하며, 섬김의 도를 실천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꿈을 꾸는 자로 만들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섬김의 도를 멈추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믿음의 큰 틀 속에서 그렇다면 믿음이 왜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지 이제부터 한 가지씩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의 여정 떠나기
믿음은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이야기는 사람이 고향을 떠날 때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서의 믿음의 영웅들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두 행동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듭니다. 그는 무수히 많은 후손의 약속을 받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할 때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문화의 중심지인, 세상의 중심을 떠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가 가고 있는 곳을, 혹은 왜 그런지에 대한 어떤 자세한 설명도, 모른 채 단지 그것이 명령이라는 사실에 의해 떠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알았던 유일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에게 후손을 약속하셨고, 그가 늙었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상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기적에 의해 그가 마침내 아들을 받았을 때, 다시 명령이 주어졌고, 이번에는 그를 절망시켰습니다. 이삭의 희생의 이야기가 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곳에서 위기에 처한 것은 단순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어떻게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이 소년의 생명에 걸려있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소년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한 믿음의 표상입니다. 믿음은 그 안에서 사회가 한데 모으기 원하고, 가족이 자신들의 미래를 돌보고, 사회적 장치가 그것에 의존하는 일반적인 방식들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역과 민족성의 개념 사이의 긴장의 역사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지식을 세상에 가져오도록 보내지는 것과 생물학적 민족의 경계 안에 정착된 개념 사이의 긴장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정착한 자리의 익숙한 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머물러 있는 곳에 아방궁을 세우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그들입니다. 더 큰 영향력, 더 안락한 곳을 만들기 위해 그는 고착되어 있습니다. 삶의 방식 역시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험으로 뛰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 살펴본 것처럼 복과 형통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저울에 달아 계속해서 그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성폭행을 일삼던 목사를 계속해서 쫓아다니고,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되어도 자신의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가장 먼저 떠나는 것입니다. 익숙한 삶의 자리를 떠나고, 익숙한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일은 결코 현명한 결정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까지 할 것입니다. 실제로 달라지는 변화는 견디기 어려운 그리고 그토록 면하고자 노력했던 낮은 자리, 그리고 세파에 속수무책인 무력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그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믿음이 의미하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의미한다.
가장 먼저 믿음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새로운 공동체의 조상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다른 모든 인간 공동체들이 혈통에 (민족적 공동체)의해 혹은 땅에 (지역적 연합)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정의될 수 없었고 믿음에 의해 정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무엇보다 먼저 순종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읽기 시작할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라는 것을 읽고 우리는 종종 잘못된 생각을 가집니다.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볼 수 없는 것 혹은 그 믿음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이유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꿀꺽 삼키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정신적 체조로 생각합니다. 볼 수 없는 것들을 믿고, 믿을 수가 없는 것들을 믿음에 의해 논리의 정상적인 한계 너머로 자신을 밀어 넣는 훈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히브리서 11장의 첫 구절을 그 장의 나머지들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그것은 매우 다른 의미를 가져올 것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즉시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그 좋은 예입니다. 노아는 배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산중턱에 타르를 칠한 나무로 된 헛간을 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이 배라고 생각하고 오늘날의 배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배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그것이 실제로 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뜨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는데 거의 백 년이 걸렸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순종이 이치에 닿은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혹은 작동할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 순종의 결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형통이 아니었습니다. 헌신적인 순종임에도 그들에게 닥친 결과는 낯선 이질감이었고 관계들의 단절이었습니다. 출애굽, 야곱의 도피, 이삭의 희생과 같은 모든 순종들은 언제나 인간 공동체, 가정 그리고 모든 정상적인 관계들을 기꺼이 희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가고 있는 모든 일들은 그들이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지나치기 때문에 주변의 이해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루고 있는 일의 범위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들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절대적인 가치들을 붕괴시켰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것이 가능한지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그와 같은 일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 그들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위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거기에 순종하였습니다.
한 사람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본명이 토레이인 대천덕 신부는 1918년 중국 산동성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15세 때 령양 외국인 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미국 데이비슨 남침례 신학교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뒤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가. 1946년 성공회로 가서 사제 서품을 받고 미국에서 12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습니다.
선원생활과 건축 노동 같은 서민들의 일상적 경험을 두루 섭렵한 대 신부는 1957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성공회의 미가엘 신학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던 그는 손수 땀흘려 일하는 신앙공동체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1965년 외딴 산골 탄광촌에 예수원을 설립했는데, 12명의 노동자 농부들과 함께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해발 920미터의 첩첩산중에 군대용 텐트를 치고 손발에 피멍이 들어가면서 공동체를 만들어갔습니다. 부인과 함께 손수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믿음이 예수원을 만들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은 이런 확신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대 신부는 "반쪽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축복의 홍수 속에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복음의 선포를 그대로 순종하는 실천이 없는 반쪽의 신앙, 곧 불신앙에 빠져 있다는 지적입니다. 반쪽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그의 말이 늘 제게는 도전이 되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하라고 종용했지만 대 신부와 같은 분들이 있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믿음은 순종이고, 반쪽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C. S, 루이스는 "나는 행복해지려고 종교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런 행복은 와인 한 병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결코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믿음의 길은 안락하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험난한 영적 모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들어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가장 먼저 순종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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