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장 13-16
더 나은 본향
지성래 목사 2013.2.10
예수사랑교회 http://jsmc.kr/
인생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이다. 나그네란 한 곳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때가 되면 그 있던 곳, 그 살던 곳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가야만 한다. 환경보존운동가들이 주창하는 환경 보존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은으로 불리는 문신이었던 야은 길재(吉再, 1353-1419)의 시조 중에,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란 것이 있다.
권력의 무상함과 세월의 허무함을 노래한 시조이다. 야은 길재는 포은 정몽주에게 배웠고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시작된 후에 정조 2년인 A. D 1400년도에 세자 이방원이 그에게 벼슬을 권했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면서 사양하고 경상북도 구미의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 그의 성리학을 배워 영향을 미친 후대 중에 율곡 이이 선생 같은 인물이 탄생하였다. 그는 세종이 즉위하던 A. D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잠시 이 땅에 와서 살다가 이 땅을 후손에게 내어 주고 떠나는 나그네일 뿐이다. 나그네의 특징은 때가 되면 훌훌 털고 떠나가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유료 캠핑장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런 곳에 가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하룻밤 혹은 며칠 동안 텐트를 치고 머물다가 때가 되면 텐트를 걷어서 둘둘 말아가지고 그 곳을 떠나게 되지 않는가. 인생이 이 땅에서 칠십년 혹은 강건하면 팔십년을 산다. 요즘은 훨씬 장수하는 시대가 되어서 어떤 분들은 구십 세가 되어도 피부가 곱고 허리가 곧고 젊고 힘이 있다. 백수 세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때가 되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나가야 한다. 구십 구세까지 팔팔하게 살수 있다고 호탕하게 웃으며 건강학 박사로 온 국민들에게 웃음을 전해 주던 황수관 박사도 67살을 일기로 하나님 앞으로 훌쩍 돌아갔다.
요즘은 주거 환경이 발전해서 삼사십년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환경에서 지낸다. 그 살아가는 곳이 개인 집이든 아파트이든 연립주택이든 지상이든 지하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서 11장 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방 땅에 나그네 되어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과 함께 더불어 장막(帳幕)에 거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 곳 9절 끝에 나오는 ‘장막’이 무엇인가. 양과 소의 가죽을 이어 붙여서 만든 텐트다. 평생을 그런 집에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요즘 우리나라는 이부자리나 침대 매트리스의 진드기를 예방한다는 극세사 이불과 극세사 담요가 유행이다. 지나다니다 보면 그런 이부자리를 길거리에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판다. 그런 부드럽고 따뜻하고 좋은 이부자리를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이삭이나 리브가나 야곱이나 레아나 라헬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저들이 목축하는 이들이었으니까 양털 가죽을 깔고 덮고 살았겠지만 저들이 살아가는 그 가옥 구조는 대대로 장막일 뿐이었다.
여러해 전에 몽골 초교파 여선교사 수련회를 계획하고 몇 십 명의 초교파 몽골여선교사선교대회를 삼박 사일동안 몽골 국경과 러시아 국경의 휴양지인 홉스 골이란 곳에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길도 없는 들판을 한 나절 씩 승합차에 나눠 타고 가서 섬긴 적이 있다. 꽤 아름다운 휴양지라서 산과 숲과 나무와 양 떼와 염소와 말들을 구경할 수 있고 호수를 바라다 경치가 좋았다. 그러나 밤이 오자 난로에 장작불을 펴 주는 저들의 전통 가옥인 ‘게르’에서 잠을 청하는데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져간 옷을 있는 대로 다 끼워 입고 잠을 청하려고 해도 등골이 오싹하고 온 몸이 덜덜 떨리어 오는데 새벽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가던 주거 환경은 오늘 날 몽골 사람들이 유목민으로 살면서 짓고 사는 주거 환경보다도 훨씬 열악한 여건의 장막일 뿐이었다. 그런 저들에게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주거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본향을 사모한 것은 아니다. 본문에 보면 14절부터 16절까지에 각 절마다 ‘본향’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 분명한 삶을 살아갔던 신앙의 선조들이었다.
구정과 같은 명절이 되면 3,000여만 명이 고향을 찾는다고 한다. 남한 인구의 60% 정도가 고향을 찾아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북한에 고향을 두고 남쪽에 피난오거나 월남하거나 탈북하여 새터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일천만 이산가족이라고 하지 않는가. 중국은 더 장관이다. 1월 26일부터 3월 6일까지 춘운이라고 하여 40일간 명절 수송이 이어지는데 올해는 8억 명이 34억 차례의 대 이동을 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여기서 34억이란 차를 평균 네 차례씩 옮겨 타는 환승객의 숫자를 통계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고향을 찾고, 본향을 찾는 나그네 길을 가는 것이다.
약속을 받은 나그네의 믿음.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약속을 품고 살아간다. 그 약속이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인 장래에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가 다가 올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을 믿고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13절에 ‘이 사람들은’이란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가리키는 말이다. 히브리서 11장을 9절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관찰해 보면 ‘promise' 즉 ‘약속’(約束)이란 말을 여러 번 언급되었다.
아브라함은 비록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거류하는 삶을 사모하며 살아갔다. 아브라함이 마음에 품고 살아가던 ‘약속’은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이 동일하게 유업으로 가슴 속에 믿음으로 품고 살아가던 약속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저들은 대대로 장막에 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희망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유업으로 이어가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였다.
10절에 말씀하는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며” 살아갔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란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천국’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내외간에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살아갔다. 이는 요한계시록 21장 2절과 10절에서 언급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일컫는 말씀이기도 하다. 13절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는 말씀은 약속을 못 받았다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히브리서 6장 1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미 약속을 받은 믿음의 선조였다. 히브리서 6장에 보면 12절부터 17절 사이에 ‘약속’이란 말씀이 반복하여 언급된다. 1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다.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스스로 맹세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전능자이시다.
1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은 신앙의 선조이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은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을 변하지 아니하시려고 맹세로 보증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맹세하시며 보증하신 약속이란 무엇인가. 그 약속의 내용은 히브리서 6장 14절에 나온다.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맹세해 주신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나그네 길에서 번성하고 번성하도록 복 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인 성도(聖徒)된 우리들이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은 천대까지 자자손손 번성하는 복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복되고 번성하리라는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왜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거창한 약속을 하나님이 스스로에게 맹세하시는 맹세의 내용으로 받았을 뿐 그 약속을 다 보고 죽은 것이 아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다 믿음을 따라 이 세상을 살다가 죽었다. 죽기 전에 그 약속을 다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는 인생”을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간 나그네들이다.
본향을 찾는 나그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신앙의 선조들은 그 누구나 다 나그네 인생들이었다. 이는 오늘 날 우리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나그네 아닌 이들이 그 누구인가. 유행가에도 있지 않는가. 그 제목은 ‘하숙생’이다. 서울 법대를 나온 가수 최희준(1936- ) 씨가 평생 부르던 노래이다. 그는 나중에 제 15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대학교 3학년 축제 때에 불렀던 샹송이 입상하면서 법대생이었던 그가 평생 가수 생활을 하였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그렇다. 인생은 누구나 다 나그네이다. 영웅호걸 절세가인 그 누구라도 다 나그네이다. 권력자도 나그네요. 재벌의 총수도 나그네요. 세계적인 대 석학이라도 나그네요. 역사에 남을 만한 과학과 의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발명가나 대학자일지라도 나그네이다. 유튜브에 10억 명 이상이 접속하는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나그네이다. 음악, 미술, 문학, 체육, 기술, 학업 그 어떤 분야에 그 어떤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생은 누구나 다 나그네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인생이란 없다. 업적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Life is short, Art is long.)는 말을 남겼다지 않는가.
14절 말씀을 보면 인생은 그 누구나 다 ‘본향 찾는 자’로서의 나그네이다. 이 번 겨울에 한강변을 운전하다가 한강에 찾아 와서 겨울을 나고 있는 기러기 떼를 보았다. 기러기는 오리 과에 속하는 철새이다. 목이 길고 다리가 짧고 몸빛에서 암갈색이 나며 부리 밑 부분이 노랗다. 날개가 길어서 멀리 날기에 적당하고 깃털이 방수가 잘되어서 물에 젖지 않는다. 시베리아 지역과 같은 북극권에 사는 기러기 떼가 가을이면 우리나라에 와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다시 북극 지역으로 번식지를 찾아 먼 길을 날아가서 짝 짓기를 한다. 작은 것은 1. 5kg 큰 것은 4kg이나 된다. 세계에는 14종류의 기러기가 서식하는데 그 중에서 우리나라에 날아오는 철새인 기러기는 흑 기러기와 회색기러기와 흰 이마 기러기 등 여섯 종류의 기러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온다. 기러기의 특징은 회귀성이다. 왔던 제 곳으로 다시 되 돌아가는 것이다. 철새인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거리는 무려 40,000km이다. 기러기 떼의 생태학을 연구하는 조류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V자형을 그리고 선봉에 우두머리 기러기가 날아가면 그 뒤를 V자 대열로 날아갈 때에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공기의 저항을 70% 정도 덜 받게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중간에 동료 기리가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발생해서 날아가는 대열에서 이탈하면 다른 동료 기러기 2마리가 함께 남아서 마지막까지 운명을 같이하고 회복되면 함께 3마리가 힘을 합하여 다시 목적지까지 날아가고 혹시라도 죽게 되면 죽음을 보기까지 지켜보다가 남은 두 마리가 힘을 합하여 목적지를 향해 날아간다고 한다. 기러기 떼가 날아갈 때에 ‘꾸욱 꾸욱'하고 계속하여 소리를 내는 것은 대열의 맨 앞에서 바람의 저항을 가장 많이 받으면서 날아가는 기러기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비하고 신기하지 않는가. 기러기들이 날개 아래에 피하 지방을 축적한 상태에서 40,000km의 먼 거리를 성공적으로 날아가고 나면 몸무게가 절반 쯤 빠질 정도로 수척해 진다고 한다. 이 같은 먼 길의 비행이 선두에서 나는 기러기가 지치면 또 다른 기러기가 계속하여 교대로 그 위치를 바꾸어 가면서 공기의 저항을 가르고 끝이 없이 V자 대형을 유지하여 목적지까지 날아가게 된다. 교훈하는바가 크지 않는가.
충남 서산 남쪽 지역의 간척지인 천수만 지역은 그 면적이 4,600만평 규모의 갯벌인데 그 곳에 기러기와 청둥오리와 황새와 흑 두루미 등 무려 300여 종류의 새들이 하루에 40만 마리 정도가 날아든다고 한다. 그 많은 철새들이 때가 되면 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4만 킬로미터도 멀다고 하지 않고 다 같이 되날아간다.
이미 4천 년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런 믿음을 갖고 이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되돌아갔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세상을 먼저 떠나자 슬퍼하고 애통하는 가운데 장례를 준비하며 가나안 땅 헤브론 지역의 헷족속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 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23:4)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은 가나안의 흉년으로 말미암아 70명의 후손들과 함께 애굽으로 이주하여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총리로 출세한 모습을 만나서 감격하고 아들 요셉의 소개로 애굽의 임금 바로 왕을 만났다. 그때에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라는 말을 하였다. 다윗도 왕이었지만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39:12)라는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양과 염소의 비유로 교훈하신 “오른 편에 있는 자와 왼편에 있는 자”로 비유하신 천국비유이다. 그 천구 비유 말씀 중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25:35)라고 오른 쪽 무리들을 칭찬하셨다. 반면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마25:43)라고 왼편에 구별되어 영벌에 처해질 심판 받을 인생들을 책망하셨다. 이 천국 비유의 끝은 이렇다. 마태복음 25장 46절에 보면,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왼편 무리들로 구별된 영벌에 처해질 무리들은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하여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나누는 생활에 무관심하고 인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들이 병들고 옥에 갇힌 것을 돌보려고 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그 때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사용하신 표현이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라는 말씀이다. 인생은 누구나 다 나그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생의 몸을 입고 오신 독생자이시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박멸하려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변화되고 사도 바울이 된 후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러므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해서 성도된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본향은 하늘나라라고 강조한 것이다. 성도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이 세상 시민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시민이라고 권고하였다. 이런 신앙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에게도 분명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고 편지하였다. 이처럼 신구약의 모든 인물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 왕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성경의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 고백은 우리 성도들은 본향을 찾아 가는 나그네란 말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본문에 보면 14절은, “본향을 찾는 자”, 15절은 “본향을 생각하는 자”, 16절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에 대하여 강조한다. 이 세상도 정을 두고 살면 살만한 세상이지만 이 세상보다 훨씬 더 나은 본향이 분명히 있다는 강조이다. 14절과 15절의 본향은 육신의 본향이다. 즉 고향이다. 아브라함으로 말하면 75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살아갔던 갈대아 우르의 하란 지역이 그의 고향이요 본향이다. 되돌아가려면 얼마든지 되찾아 돌아가 살 수 있는 땅이었다. 그러나 16절에서 말씀하는 ‘더 나은 본향’이란 이 세상에 있는 고향이 아니라 저 세상에 있는 본향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는 것이다. 16절에 보면 더 나은 본향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 나온다.
첫째, 하늘에 있는 곳이 더 나은 본향이다.
둘째, 하나님이 약속된 성도들에게 예비하신 한 성이다.
이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2, 10)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더 나은 본향에 대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 계신 동안에 하신 유명한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요14:1-3)
1876년, 비바람 몰아치는 어느 날 늦은 밤에 노부부가 독일의 작은 도시에 있는 한 호텔로 들어왔다. 하지만 호텔에는 남아 있는 객실이 없었다. 저녁 늦게 이 도시에 도착한 노부부는 찾아가는 호텔마다 만원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이 호텔도 객실이 없다는 말에 노부부는 직원에게 애원했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우린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네." 젊은 직원은 노부부를 그냥 내보낼 수 없었다.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라도 하루 쉬다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노부부는 밤새 프런트를 지키며 근무하는 그 청년직원의 허름한 방에서 그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노부부는 직원에게 물었다. "자네는 장래에 어떤 희망을 갖고 있나?" 직원은 대답했다. "제가 호텔에 있다 보니 호텔 하나 갖고 싶은 게 꿈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꿈이죠."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에게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그를 미국 뉴욕시로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넉넉한 여행 경비로 수표가 들어 있었다. 휴가를 받아 가지고 편지에 적힌 미국 뉴욕 시의 주소를 찾아가 보니 그 곳은 아담한 호텔이었고 노부부가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다. "지금부터 우리 호텔에서 일해 보지 않겠나? 자네가 마음씨 착하고 성실히 일하는 걸 보고 우리 부부가 의논한 끝에 자네를 우리 미국으로 초청하기로 했네.” 그의 나이 25살 때의 일이다. 감동한 청년은 미국 체류 허가를 받아 가지고 그 호텔에서 열심히 일하였고 호텔은 날로 번창하였다. 뿐만 아니라 윌리엄 케러(William Kehrer)인 그 노부부의 외동딸인 루이스 케러(Louise Augusta Kehrer Boldt, 1862-1904)와 사랑에 빠져 다음 해인 1877년에 11살이나 어린 15살의 그녀를 아내로 맞아 가정을 이루고 남매를 낳았다. 이 청년이 바로 그 유명한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Waldorf-Astoria Hotel)과 필라델피아의 중심가인 브로드웨이에 있는 객실 1,090개를 소유한 The Bellevue-Stratford.(Park Hyatt) 호텔 체인을 이룩한 조지 볼트(George Charles Boldt, 1851-1916)이다. 그는 나중에 호텔 경영으로 막대한 재산을 쌓았지만 그에게 중년에 불행이 찾아 왔다. 사랑하는 아내가 난치병에 걸린 것이다. 마음 아파하던 그는 미국과 캐나다 접경의 세인트로렌스 강 중간의 천섬(Thousand Island)중에서도 가장 큰 섬인 하트 섬(Heart Island)을 사서 중세 식 성을 짓기 시작하였다. 공기가 맑고 경치가 아름다운 그 곳에서라면 아내의 병도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아내의 생일인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성을 선물하려고 A. D 1,900년부터 4년간에 걸쳐서 부지런히 공사를 진행하였다. 성 안에 6층 규모의 방이 120개나 되는 거대한 성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내는 성이 완공 되는 걸 보지 못하고 1904년에 4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낙담한 그녀의 남편은 공사를 중단하고 이 섬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이 섬을 찾아 가지 않았다. 결국 그 성은 짓다가 만 미완성의 상태로 오늘 날에 이르며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 명소로 전해지고 있다.
이 세상에도 아름다운 곳이 많다. 화려하고 편리하게 잘 지은 집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 집은 하나님의 나라의 더 나은 본향 집과 다른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요한계시록 21장 4절의 말씀처럼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픔과 슬픔과 질병이 끝이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나그네 인생길에서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과 질병과 고난과 고통과 애통과 사망을 이기며 영생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갖고 이 복음을 이웃들에게 증거하며 살다가 다시 오라 하시면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약속된 믿음을 가진 돌아갈 곳이 분명한 나그네다운 나그네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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