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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17-19절(시련을 통과하는 믿음) - 서명성

by Preacher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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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17-19

시련을 통과하는 믿음

서명성 목사 2016.2.7.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지난 두주 동안 히브리서 11장에서 살펴본 것을 정리해볼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아벨은 믿음의 제사,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삶 전체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제물만 드렸습니다. 평소의 삶이 뒷받침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를 기뻐하셔서 아예 하늘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악이 관영하던 시대에 살던 노아는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 받았습니다. 아직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 방주를 만들며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땅위에 호흡 하는 모든 것이 멸망을 당하는 가운데 그의 가족 8명은 살아남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가나안에 살면서 땅과 자손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눈에 보이는 가나안 보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본향은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 아니었습니다. 그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소망입니다. 바라볼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아직 보지 못했으나 볼 것을 믿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본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갈 종착역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확신과 증거를 가지고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이런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본문은 믿음의 또 다른 면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본문은 창세기 22장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climax가 되는 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가 되어 나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치르는지 살펴보면서 아브라함과 같이 낯선 곳에서 이민생활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받으며 누리며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의 여정에도 시련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한지 4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삭을 낳기까지 처음 25년의 생활은 참으로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자식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낯선 땅에서 땅도 제대로 없이 지냈습니다. 끊임없는 긴장과 불안으로 연속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커다란 위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은 모습을 보고 지레 겁을 먹은 그랄 왕이 군대 장관을 데리고 와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평화조약을 맺자고 할 정도로 아브라함은 그 일대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창 22:1). “그일 후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받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던 때입니다. 이삭에 대한 사랑이 날로 깊어져 갈 때입니다. 나보다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말씀하십니다. 이삭 앞에 여러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점층법을 사용하여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부각시키고 나서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번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제물을 죽여서 불로 태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왜 바쳐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습니다. 정말로 이삭을 제물로 받으시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priority가 무엇인지 알기 원하셨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알기 원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 자신의 형편을 말하며 통사정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자식을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도로 데려가겠다구요? 말도 안 됩니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나요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기도하면 금방 응답이 오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전에 좋다고 붙들던 것들을 점점 내려놓게 만드십니다. 우선순위가 바뀌고 가치관을 달라집니다. 시간, 재물, 건강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이제는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넘어지거나 신앙의 더 깊은 단계로 가기를 주저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더 이상 세상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마귀의 시험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인간들과의 관계를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들이 말씀대로 순종하는지를 알아보고 그들을 겸손하게 하셔서 마침내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 어려움이나 고난이 따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내의 사람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치르는 시험은 학생으로 따진다면 졸업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 많은 시험을 치렀습니다. 잘 푼 적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적도 있었고 실망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끈질긴 사랑으로 붙드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험을 치르는 동안 아브라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믿음의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믿음의 시련을 당하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17절) 원어에는 “믿음으로”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순종하여 이민 길을 떠났던 것처럼 시험의 이유를 알지 못하나 믿음으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먼저 나오는 “드렸으니”는 현재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바치는 희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히 드려진 것으로 인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나중에 나오는“드렸느니라”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들을 바치는 희생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외아들’로 번역된 모노게네스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3:16에도 나옵니다. 독생자 즉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의미보다는 독종자 즉 ‘한 종류 밖에 없는,’‘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적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적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삭만이 ‘약속들을 받은 자’즉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이 ‘약속의 자녀’는 9절의 ‘약속의 땅’과 함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혈육으로 따져 단순히 외아들이라는 의미보다는 유일하게 약속을 받은 아들, 독특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아브라함이 주저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길을 떠났습니다. 아마 아내인 사라에게도 제대로 알리지 않고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동안 아브라함이 고민을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1번,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인지라 전혀 고민하지 않고 처음부터 바로 순종했다. 2번, 아무리 아브라함이 믿음이 사람이지만 아들을 바치는 것을 인하여 생각이 많았다. 어떤 것이 맞을까요? 19절을 보면‘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문제를 두고 깊이 생각했음을 암시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리아 산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인간적인 갈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이 정리되고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

 

2)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아브라함이 사흘 길을 가서 그의 종들과 나귀를 남겨두고 이삭과 함께 제물을 바칠 곳으로 떠납니다. 그때 사환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가서 예배를 드린 후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는 겁니다. 아들을 죽이러 가면서 아들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곁에 있는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 실현 불가능한 말을 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꼬옥 붙들었습니다.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기가 막힌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붙들었습니다. 내 아들은 죽지 않는다.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내 아들을 다시 살려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말씀을 붙드는 신앙입니다. 현실은 그를 답답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들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그는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모리아 산으로 갔기에 아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죽이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아들을 주실 거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 같은 사라의 태에서 이삭을 창조하신 이가 죽은 이삭도 얼마든지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우리의 삶도 그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빚어가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변 상황이 안 풀린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 날마다 읽고 묵상하는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며 그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나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담긴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입니다. 내려놓으라, 포기하라, 맡기라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이삭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아브라함은 번제에 사용할 불과 칼을 가지고 모리아 산에 있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로 갑니다. 같이 길을 가면서 이삭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전에 보면 아버지가 번제를 드릴 때마다 반드시 양을 준비하였는데 오늘따라 번제를 드린다면서 양이 없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이삭이 부르니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하며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부자 사이의 깊은 애정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여러분이 아브라함의 입장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덜컹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 지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믿음으로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하나님이 말씀하신 장소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려 놓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의 아들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여기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흠 없는 제물임을 보여줍니다. 십대의 아들인 이삭은 늙은 아버지가 자기를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묶는 것을 알았을 때 충분히 반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의 명령에 완전히 순종하듯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창세기 22장 10절에서 아브라함은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잡는다’는 말은 제물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단어로 일반적으로 희생제물의 목을 따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반복하여 부르심으로 급박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시며 급하게 아브라함의 행동을 제지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며 예배하고 이 세상에서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를 몰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야 비로소 아브라함이 온전한 믿음의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근처에 숫양 한 마리가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숫양을 잡아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다시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큰 복을 주시고 그의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할 것이며 그의 자손이 원수의 성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세상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22:16) 합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상징인 희생의 십자가를 지신 것을 예표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무거운 짐이 지워진 하나님의 독생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삭을 살리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은 아벨처럼 제사를 드리는 행위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지를 확인하는 순종 테스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사실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평소에 하시지 않던 일을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고 도덕적으로도 모순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오직 사라에게서 낳은 이삭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시겠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도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설사 이삭을 제물로 바친다 해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통해 약속을 이루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세월 동안 아들을 기다리게 하셨고,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큰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가 시험받을 때에도 믿음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만약 이삭이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 때문에 분명히 이삭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절망적이거나 의심스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문제만을 바라보고 염려하거나 낙심한 적은 없습니까?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2) 부활을 믿는 믿음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기꺼이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이유를 19절에서 설명합니다. ‘다시 살리실 줄’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부활이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자를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인 것을 믿었습니다. 즉 부활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도로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죽음 직전에 구원받은 이삭처럼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믿음과 우리의 믿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확실히 성취되고 증명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이런 소망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영광스러운 육체의 부활을 믿으며 이 세상을 초월해 살아가려는 참된 성도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3) 최상의 것을 드리는 믿음

 

100세에 나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했습니다. 아들을 제물을 바치고 나면 하나님의 약속이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 구체적으로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가 가진 가장 귀한 존재인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였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마리아가 자신의 소유 전부와 맞먹을 정도의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리는 스토리가 나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주님의 칭찬이나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베푸신 놀라운 용서의 경험과 구속의 감격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야말로 모든 섬김의 기초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것도 과분한데 게다가 섬기도록 자신을 세워주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안다면 마음을 다하여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기 전에 용서받은 죄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은 그것을 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라기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할 정도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이 와 닿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을 때 우리는 자투리가 아닌, 쓰다 남은 것이 아닌 최상의 것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밀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함으로써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신앙여정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종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순종의 테스트이며 우리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어야 하는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우리 마음에 갈망하는 바를 포기할 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의심치 않고 믿은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요, 그 약속이 자신의 자손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본 자요,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최상의 것을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느끼며 그 강권적인 사 랑에 이끌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시간, 재물, 달란트 등 모든 것을 최상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믿음에 굳게 서서 말씀을 붙잡고 고난을 이겨내며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는 주님의 칭찬과 위로와 평강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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