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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1장 17-19절(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부활신앙) - 이준원

by Preacher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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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17-19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부활신앙

이준원 목사 2015.4.26. 주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옛날부터 사람들은 ‘과연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인가?’라는 질문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유명한 사람들이 남긴 말들이 참 많습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인생이라는 연극은 아무리 즐거운 내용을 담고 있는 어떤 사람의 대본이라고 해도, 그 마지막 장면은 운명적으로 비극적이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 한줌의 흙이 던져질 때 모든 것은 결국 끝장이 아닌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시인 롱펠로우(Henry Longfellow): “인생은 참되고 진지한 것이며, 무덤은 결코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다.”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모든 것이 무덤에서 끝나야만 한다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처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어도, 죽음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중단된 적은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과연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부활 신앙의 아침을 여시기 훨씬 오래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말씀에 근거한 믿음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존재합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 근거였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통해 태어난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하게 하나님의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7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약속의 후손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99세가 될 때까지 그 약속의 후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100세에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 수많은 후손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폐기되고 다 끝나는 겁니까? 이 순간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 하고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러한 어려움을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은 부활신앙을 통해 해결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만약 이삭이 죽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다면, 바쳐서 죽은 다음 이삭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삭이 부활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것은 창세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가는데 종들과 같이 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 22:5, 개역한글)

 

아브라함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본(개역개정이 사용한 사본)에는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면서도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신앙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후손을 주겠다고 하셨을 때는 그가 인간적으로 도저히 자녀를 낳을 수 없었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밤중에 아브라함을 밖으로 부르십니다.

“저 하늘의 별을 보아라. 저 별들을 셀 수 있느냐?”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습니다.”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정말로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부활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 아들은 분명히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참된 믿음은 말씀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으니까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경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부활을 약속합니다.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전도할 때 성경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는 이렇게 질문을 해보십시오. “그럼 믿지 못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요약해서 말씀해주십시오.” 그렇게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뭘 못 믿는지도 모르면서 못 믿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부활이나 창조나 동정녀 탄생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물 위를 걸은 사건이나, 그런 기적들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하는데,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무슨 중요한 일을 하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 보면, 돼지머리를 갖다 놓고, 그것도 웃는 돼지여야 한다고 하며 그 코에 돈까지 쑤셔 넣고, 거기에 절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는 것인지 의문이 갑니다. 확률적으로 따져 봐도, 전문가가 확률을 계산하면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믿는 것이 그런 것을 믿는 것보다 훨씬 더 확률이 높을 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성경의 그러한 기적들이 못 믿어지십니까?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연구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그냥 읽다가, 그것도 영어성경을, 그 중에서도 주로 thy, thou 같은 고어가 나오는 킹 제임스 번역(King James Version)으로 읽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을 비판할 목적으로 읽고 연구해도 좋습니다. 읽어보시고 연구해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법률가였고 역사학자였던 프랭크 모리슨(Frank Morriso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지만, 성경에는 부활이나 동정녀 탄생과 같이 믿을 수 없는 기적들이 너무 많으니, 그런 것들을 다 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예수의 부활이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법률가답게 1세기의 재판 역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가 생각한 것이 ‘시체 도난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정황을 볼 때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잡혀 죽으실 때 제자들은 무서워서 다 도망갔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열한 명이 모두 일사불란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 시체를 훔쳐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절을 한 것인데, 무덤에 넣어 놓으니까 새벽이 되어 차가운 공기에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하며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가 뭔지를 모르는 말입니다. 역사를 보면 로마의 십자가형에서 살아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끔찍한 형벌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가장 천천히 죽게 만드는 처형 방법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로마 시민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 정도였습니다. 차라리 단 칼에 목을 베는 것이 더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여러 가정을 해보았지만 예수는 정말로 부활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받아들여 모리슨은 참된 크리스천이 되었고, 자기가 연구한 경험을 모아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이라는 책인데, 겉표지에 “원래는 쓰이기를 거부했던 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역사를 통해 한 번의 오류도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경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활도 약속해줍니다.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습니다.

 

2. 시련을 극복하는 믿음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을 가진 것은 그의 삶 속에서 시련을 극복한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가장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희망을 주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지시하시는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창 22:2). 사랑하지 않는 아들이라도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여러 명의 자녀가 있어도 한 명을 희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 다섯 명의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주 친한 친구에게는 자녀가 없어, 한 아들만 양자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친구와 의리도 있고 또 다섯 명 중 한 명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집에 와서 어느 아들을 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장남은 아무래도 장남이지 줄 수가 없고, 둘째는 제일 똑똑하니까 줄 수 없고, 셋째는 늘 몸이 아프니 그런 아이를 보낼 수가 없고, 넷째는 가장 미남이니 안 되겠고, 막내는 막내이니 차마 못 주겠고... 도저히 줄 수 있는 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딱 한 명인 외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남의 손에 죽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비극인데,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시련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게다가 함께 산으로 올라가면서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때 차마 ‘너를 바쳐야 한다.’ 말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극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이 죽으면 다시 살리실 것이다.’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8-19절)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 아브라함을 괴롭히려고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해 칼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급히 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나를 진짜 믿는(경외하는) 것을 이제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 대신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어서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럼 이전에는 모르셨는데 이제야 아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원래 다 아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도 삶 공부 때 왜 시험을 봅니까? 시험 문제를 풀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기 위함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실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 시험은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동안 많은 시험을 겪었는데, 실패도 했고 성공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을 겪으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시험을 통과할 때 그 힘이 되었던 것이 바로 그의 부활신앙입니다. 그런데 부활신앙은 단지 ‘내가 죽으면 천국 가고 후에 부활한다’는 미래의 소망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삶에서 용기 있는 결단을 하며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정말 믿는 사람은 정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협할 수 없습니다. 불의에 대한 유혹이 올 때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으면 타협하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이니 타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타락하는 겁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선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약하게 자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야생화처럼 힘 있고 건강한 꽃으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폭풍우와 비바람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저 소꿉장난이나 하며 노는 유치원생처럼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위험과 죽음이 있는 전선에서 폭탄이 날아가고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그 밑으로 포복하며 나아가 싸우는 용감한 군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포탄과 총알이 날아다니는 밑을 기어 다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저 잔잔한 연못에서 물놀이나 즐기는 정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센 바다의 풍랑과 파도를 헤치며 넓은 바다를 건너가는 선장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물결과 파도를 보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련을 주실 뿐 아니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은 중요하지만, 예수님에게 역사한 부활의 능력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그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할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과 절망으로부터 우리가 이기도록 하는 능력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특히 이 시대는 힘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입니까? 역사를 통해 가장 무서운 힘은 바로 죽음의 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죽음의 공포가 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죽음이 왕 노릇한다’고 말씀합니다. 죽음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가리지 않습니다. 죽음은 권세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 위협합니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강력한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결박을 끊고 부활하신 순간, 죽음보다 더 무섭고 강력한 힘이 있다는 사실이 역사 속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파워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5:55, 57)

 

‘부활’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어로는 ‘다시 일어섬’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을 가지면 다시 일어섭니다. 부활신앙을 갖자마자 암 환자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어려움 속에 절망하던 사람들이 다시 활기를 찾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 삶 속에 새로운 힘을 주어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겁쟁이였던 베드로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작은 여자아이가 “당신도 저 사람과 같이 있었죠?”라고 할 때, 그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부인했고, 결국 그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던 베드로였는데 바로 그 예수님을 잡아 죽인 종교 지도자들이 불러서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을 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어떻게 그 겁쟁이가 이렇게 담대한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얼마 후에 성령을 받고 부활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어려움이 아브라함이 당한 것보다 더 어렵겠습니까? 더 혹독합니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도 부활신앙으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3. 최선을 드리는 믿음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의 존재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바쳤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지금 바치는 것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은 무모한 낭비가 아니라 위대한 헌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은 우리가 참된 드림의 정신을 갖게 해줍니다. 헌금의 정신이 그렇습니다. 바울은 헌금 정신을 가르치면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라”(고후 8:5)고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자기 생명을 드린 것처럼, 헌금을 드릴 때 자신을 드립니다. 시편 1편이라든지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지만, 우리의 현실의 삶을 보면 우리는 ‘주야로 돈을 묵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돈은 정말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생명과도 같은 돈을 가지고 헌금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생명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드린다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둘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이삭을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그로 하여금 순종하고 이삭을 바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순교자들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신앙 때문에 기꺼이 바칠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신앙 때문에 신앙을 타협하면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AD 114년 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유명한 교부 이그나시우스가 있습니다. 그가 로마 황제의 박해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성도들과 또 믿지 않는 사람들 중 그를 존경하던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그를 살리려는 구명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때 조금만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고 양보하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그나시우스는 제자들에게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제발 저를 살게 해달라는 구명 운동을 중단해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저희 최선을 주님께 바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가 바치기를 원했던 최선의 것은 바로 그의 생명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나친 요구를 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 부활신앙 앞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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