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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히브리서

히 12장 5-13절(징계의 목적) - 서충원

by Preacher 202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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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장 5-13

징계의 목적

서충원 목사 150614

샬롬누리영광교회 [일산, 탄현동] http://www.holyglory.com/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요즘 학교에서 체벌금지를 두고 찬반 논란이 있습니다. 진보적인 교육철학을 지닌 전교조측은 체벌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보수적인 교사들은 체벌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체벌금지를 찬성하는 이들은 체벌은 교사가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수직적인 권위주의 문화로 학생들의 인권을 억압하는 폭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수직적인 위계를 강조하는 교육문화에서 교사와 학생이 상호 소통하는 수평적인 문화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에 대해서 체벌금지를 반대하는 교사들은, 학생들의 잘못을 교정하는 사랑의 매마저도 폭력으로 규정하는 체벌금지의 입장은 다수의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고 학생 인권의 이름으로 교권이 무시당하게 만드는 문제를 지닌다고 비판합니다. 감정적인 체벌은 금지되어야 하지만 교육적인 체벌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입장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교사의 폭력에서 건져주어야 한다는 진보적인 입장이나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인 체벌은 폭력과 구분되고 학생들에게 훈육이 필요하다는 보수적인 입장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양자 사이에 상호 소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독교적 입장은 어떠합니까? 기독교는 아이를 존중하지 못하고 함부로 다루고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권위주의를 악으로 규정합니다. 아이들의 입시경쟁교육부터 사실상 처리되어야 할 악입니다. 교사의 폭력은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매를 부정하는 진보적인 교육관 또한 아주 위험한 자유주의 논리입니다. 인권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정의와 징계를 부정하게 만드는 교육철학은 아이들의 인성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두 가지 악이 가정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자녀들의 부모의 학대와 폭력에 희생당하는 것은 좌시될 수 없고 또 사랑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아무런 훈육도 행하지 않는 오늘이 가정은 큰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매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를 배우고자 합니다.

 

1. 사랑과 징계

 

본문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우리의 관계의 기본원리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정의의 균형의 원리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징계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6).”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징계는 사랑의 감소가 아니라 바로 사랑의 발현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도 아들을 사랑하면 그 아들이 잘못할 때 벌함으로 아들을 바로 잡는다는 것입니다.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7,8).” 징계가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징계가 없으면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은 저도 이해합니다. 저의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 사랑하기에 분노하게 되고 징계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랑의 분노이지 미움의 분노가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사랑과 정의를 함께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가 없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어리석은 아이처럼 징계를 미움이라 해석하고 마음을 닫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원하지만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계를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우리는 삶의 고난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보고 그 안에서 그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감추인 방식으로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징계를 받으면서도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9) 삽니다. 우리의 삶에 임하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자유주의가 지배하면서 정의와 율법의 심판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진정한 훈계와 징계가 사라져 버리고 사랑의 징계조차도 폭력과 동일시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자유주의가 공적(公的)인 영역에 점점 만연해 갑니다. 두려운 것은 이런 상황이 가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가정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징계를 시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잘못된 자유주의 철학이 가정교육을 망치고 아이들의 영혼과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의에 복종하듯이 아이들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하되 정의 안에 서도록 징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징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사람들로 이 시대의 흐름에 대해서 거슬러 가야 합니다.

 

2. 징계와 거룩함

 

징계가 어떻게 사랑일 수 있습니까? 징계가 사랑일 수 있는 것은 징계가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고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아이가 고통을 호소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매질하는 게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적을 말합니다. 목적에서 보아야 합니다. 목적론적인 관점이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10).”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을 가진 사랑입니다. 우리를 그의 거룩한 형상에 참여하게 하시려 하십니다. 이것은 높은 부르심입니다. 이 높은 목표가 우리에게 강한 훈련을 요구합니다. 더 강한 군사는 모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경기에 나가는 운동선수는 남들보다 더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그의 거룩한 형상을 본받아 변화되어 그의 거룩한 소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그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은혜로 불러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드십니다. 이것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율법을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순종이 깨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 징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려고 율법을 순종하게 하시려고 광야에서 고난을 주십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징계는 우리로 율법에 순종하는 자녀 삼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징계 없는 사랑은 없고 징계 없는 성장과 변화는 없습니다. 이 징계의 결과는 아름답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

 

오늘날 진보적인 사람들은 징계를 사랑 없음으로 말하고 전혀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징계는 권위주의적인 수직문화이며 비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야말로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우리의 인격을 주님의 인격으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도덕성을 자신의 목표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억압적인 멍에일 뿐이고 이 모든 율법적인 의무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자유라고 여깁니다. 이 시대는 도덕이 부정되고 따라서 징계가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도덕적인 선과 악의 구분이 사라지면 더 이상 정의와 징계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자유주의 논리로써 율법을 폐하는 일이 정상적인 것인 양 간주되고 있습니다. 징계가 사라지고 징계를 폭력으로 왜곡합니다. 이제 사랑의 이름으로 온갖 죄악들이 허용됩니다. 성도들의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율법의 정의를 배우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거룩을 위해서 정의의 율법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에 따라 잘못에 대해서 책망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율법으로 양육하는 것은 주께 받은 소명이고 또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의 성품이 사랑과 정의이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사랑과 정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의 율법으로 강하게 훈련시키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길은 율법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기 위해서 징계가 필요하고 이를 통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더욱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징계를 달게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더욱 사랑을 발견하고 더 정의로운 삶을 결단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빛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폐하고 징계 없는 자유, 정의 없는 사랑을 칭송하는 어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율법의 정의로 거룩하게 만드시는 과정에 순종하고 이 시대의 어둠을 대적하고 이 시대에 주의 정의로 세상을 정복해야 합니다.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성숙의 의미

 

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부모가 자신을 책망하고 원하는 것을 안 해 주면 부모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 해 줄 때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아이가 성숙했다는 표지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징계의 방식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부재로 오인하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게 된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요구만을 채워달라는 것이고 그런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잘못 하시는 것처럼 판단한다. 교만한 아이처럼 완고하게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정죄하려는 것이다. 성숙은 그분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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