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2장 14-16
낙하산이 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최태선 목사 2003.12.21.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며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명의 스카이 다이버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지금 자유낙하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낙하 속도는 동일합니다. 모두 자유롭게 보입니다. 그들은 끈 같은 것으로 서로 묶여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처럼 자유롭습니다. 정말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 낙하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낙하산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두 사람이 즐기고 있는 자유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요?..... 예 물론입니다. 둘은 모두 중력의 영향 때문에 자유롭게 낙하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한 사람만이 중력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중력의 노예이며, 중력은 그를 결국 죽이고 말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자기에게 낙하산이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면, 그는 그의 자유를 즐기면서 유쾌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처한 운명을 인식한다면, 그는 낙하하는 동안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며, 그 자신이 자유라고 생각하던 즐거움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느 정도 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이 이 세상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도 중력을 피할 수 없듯이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사실에 무관심한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죽음보다 더 확실하고 보편적인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철저한 진화론자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 나무가 죽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다. 우리는 소멸된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런 의식도 없다’. .....여러분은 어떻십니까?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진리를 믿는다면, 즉 창조주가 살아계시고, 우리는 그분과 관계를 맺기 위해 창조되었고, 우리를 침팬지나 돌고래와 같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변이나 화학작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진리를 믿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며, 영원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같은 사실을 전도서 3장 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과 유전자가 99. 몇%이상 비슷하다는 침팬지나 보노보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만일 그들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들의 사회에도 어떤 형태이든 종교적인 관습이나 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보거나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된 자유에 이르는 좁은 길입니다. 거기에는 죽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도 포함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인간으로 오셨으며,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3절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로 시작합니다.
자녀들이라는 용어는 앞 절인 12절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 즉 메시아의 영적 자녀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특별히 자기 ‘자녀들’의 구원을 염두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보내시면서 그분께서 특별히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신다는 것 또한 흔들림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주시고 자기 자녀들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장로교 신학에서는 이 사실을 예정설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성육신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시고 인성으로 신성을 덮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 되셨고, 완전히 하나님으로 남아 계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이 우리의 성경적인 믿음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과 7절은 같은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영원한 존재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시고 시공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존재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사망으로 말미암아...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는 죽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바로 죽기 위함입니다. 그분이 성육신하기 전의 하나님으로 그냥 계시다면 그분은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죽는 존재가 아닙니다. 죽지 않는 영원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혈육에 함께 속함으로, 즉 인간이 되심으로 그분은 죽음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으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죽기 위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주님께서는 죽으시면서 마귀를 없이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마귀를 잡아 죽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이 마귀를 죽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신 그분이 하신 일은 우리의 모든 죄를 없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2절을 보면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영원한 제물로 드려짐으로써, 즉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신 그분이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없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소할 법적인 근거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3절은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의롭게 된 것입니다. 죄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칭의라고 말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하신다면, 사단은 우리를 해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마귀를 없이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피로 사신 자녀들을 영원히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수혜자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사형을 구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자녀된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셨기 때문입니다.
15절은 말합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알건 모르건 간에 사망에 매여 일생에 종노릇하는 존재들입니다. 이 말씀의 요점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러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무수한 방법들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쾌락을 쫓기도 합니다. 일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학문을 추구하거나 예술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운동으로 젊음을 유지해보려고도 합니다. 성형수술로 주름을 제거하기도 합니다. 선한 삶으로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갖가지 방법으로 죽음에 대한 부정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죽음은 다가옵니다. 다만 죽음에 대한 부정이라는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힌 채로 죽음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은혜뿐입니다. 사단은 그러한 판결을 뒤엎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기 위해 궁극적인 안전함을 정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속박과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행복한 결말을 계획하셨습니다. 똑같아 보여도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다만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입니다...우리가 가장 강한 최후의 대적인,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쁨을 위해 자유하십시오. 다른 이들을 위해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생애를 추운 겨울 아침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에 비유했습니다. 이생의 삶은 말 그대로 순간이며 찰나입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세세토록 이어진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백년 2백년 이어지는 한 두 세대가 아니라 세세토록 영원히 계속되는 그야말로 영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거의 모든 에너지를 이 땅에서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사용하고, 죽음 이후의 세상을 위해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금석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견고하며 성경적인가를 구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의 경험인지를 구분해 줍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한낱 종교적인 환상인가 아닌가를 구분해 주는 것입니다.
영원을 대면하는 일은 우리를 종교적인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합니다. 또한 그러한 태도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지 않는지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으면,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립니다. 그리고 가장 철저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사도바울처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의 삶이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개인적인 안락함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소원하는 모든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 없이, 지금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 죽음의 진리를 거부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죽었을 때 일어나는 일, 즉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은, 진정한 기쁨의 삶과 사랑이 넘치는 헌신의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확신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건강을 상실할 때에도 낙심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요소입니다.
칼 런드퀴스트는 미네소타의 세인트 폴에 있는 베델 신학대학교의 총장으로 28년 동안 봉사했습니다. 그는 인자한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거의 평생을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1988년, 그의 주치의는 그가 사상균으로 인한 희귀한 종류의 암에 걸렸다고 진단했습니다. 그것은 온몸의 피부를 통해 병균이 침투하는 변형 피부암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72세였지만 겉으로는 매우 건강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약 3년 후 그는 극심한 피부질환 증세를 앓은 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편지를 여러 친구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날 병실에서 나는 의사가 병실 문을 나설 때에 성경을 펼쳤습니다. 빌립보서에 기록된 기쁨에 관한 구절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펼친 본문은 1장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그리고 나는 건강한 상태로 살 때에 굳건히 붙잡고 있었던 한 구절을 지금도 의지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나는 위대한 의사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법대로 나를 위해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리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만족스럽고 완전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할렐루야!
칼 런드퀴스트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3년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를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겉 사람은 욥과 같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때도 그는 변함없이 놀라운 헌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통도 그를 흔들지 못합니다. 죽음도 그를 흔들지 못합니다. 가장 비참한 죽음조차도 그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놓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두에 말씀드린 스카이다이버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뇌리 속에 깊이 박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떨어지고 있는 스카이 다이버와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장비로 온 몸을 무장한다 하여도 낙하산이 없다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땅에 부딪히는 순간 몸은 박살이 나고 내장은 터져 흩어질 것입니다.
이 부분을 생각할 때 저의 머리에는 가롯 유다의 마지막이 떠올랐습니다. 은 삼십냥에 예수님을 팔고 돌아섰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두려움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성전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도로 물러보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한 일을 취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은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돈을 헌금으로라도 바쳐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불의한 돈을 제사장들은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에 견디다 못한 그는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달았습니다. 그런데 나뭇가지는 부러지고 그는 떨어져 내장이 다 터져 흩어져버렸습니다. 가롯 유다가 떨어진 그 밭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밭을 ‘아켈다마’ ‘피밭’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의 종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중에 팔아먹은 자의 종말입니다.
똑같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낙하산을 가진 스카이다이버와 낙하산을 갖지 않은 스카이다이버의 운명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낙하산이십니다. 죽음을 향해 떨어지는 우리 인생의 낙하산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안전한 낙하산을 메고 있는 스카이 다이버는 자유를 만끽하며 낙하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낙하산이 없는 스카이다이버는 아무리 즐기며 자유하며, 아무리 그 사실을 잊거나 부인한다 하여도 자기 몸이 땅에 닿는 순간 가롯 유다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가 떨어진 그 자리가 바로 ‘아켈다마’가 될 것입니다.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여기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군대이야기입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술 한잔 마셨다 하면 나오는 이야기가 군대이야기입니다. 사실 군대 이야기는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렵고, 더럽고, 힘들고, 냄새나는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런데도 남자들은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면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좋은 이야기도 반복해서 들으면 재미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니 반복되는 군대 이야기를 듣는 여자들이 지겨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자들은 그렇게 지겨운 군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일까요? 남자란 원래 지겨운 존재일까요? ...예, 고개를 끄덕이시는 여성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그것은 그 이야기가 자신들에게는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는 시시하고 의미 없는 이야기라도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중요하고, 그것은 힘이 있으며, 그것은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리구조가 다르고 사고의 틀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이야기를 하는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왔고, 듣는 여자는 군대를 안 갔다 왔기 때문에 발생하는 단순한 차이입니다.
한 번은 제가 있던 한 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도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한 마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배고픔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훈련받던 시절 얼마나 배가 고팠던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군대에서 받는 기합 중에 ‘좌로 굴러 우로 굴러’가 있습니다. 커다란 운동장에 엎드려서 구령에 따라 ‘좌로 굴러’하면 좌측으로 구르고 ‘우로 굴러’하면 우측으로 구르는 것입니다. 이 기합은 잘하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우로 굴러 해서 우측으로 구르다가 가장 앞서게 되어도 다시 좌로 굴러 하면 가장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뒹굴 뒹굴 구르다가 결국 아마득하게 보이는 연병장 반대편에 가 닿아야 그 기합이 끝이 납니다. 저는 여러 기합 가운데 이 기합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합을 받고 나면 어지럽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어지럽기 때문에 일어나면 먹은 것을 토하게 됩니다. 그런데 토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 토하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저는 그 기합이 싫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자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비웃는 태도로 말했습니다. “거 뻥이 너무 심하네요.”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하고 조금 당황했지만 저는 곧 그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군대 안 갔다 오셨지요?” 그러자 그 분의 아내가 옆에 있다가 대신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 애 아빠가 그 때 몸이 안 좋아서 군대 면제를 받았어요.”..... 군대 이야기는 절대로 남녀의 차이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도 여자들이 군대생활을 했다면 남자들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세련되고 실감나게 더 자주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어떤 일의 흥미는 자신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것을 직접 경험했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아무리 귀중한 것을 가르쳐 주어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받아드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가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발전 속도가 느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분이 혹 계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예, 돌봐드려야 합니다. 아무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승천하시는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아주 좋습니다. 밖으로 나가기면 하면 예수님을 환영하는 분위기를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는 큰 별과 전구들로 아름답게 빛납니다. 길거리도, 쇼핑센터도, 온통 빛나는 전구들과 크리스마스 케롤로 넘쳐납니다. 정말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아름다운 케롤들은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감동이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딸랑거리는 자선냄비는 우리의 마음 깊이 감추어진 사랑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서둘러 천원짜리 몇 장을 꺼내들게 합니다. 조금 더 흥분되면 오천원짜리도 만원짜리도 꺼내들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3천 칠백 만원을 집어넣었다고 뉴스에 보도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몹시도 흥분했었나 봅니다. 물론 흥분만 해서는 안되겠지요. 돈도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사가랴의 이야기도, 마리아의 이야기도, 마굿간의 이야기도, 양을 치던 목자들의 이야기도,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도, 헤롯왕의 이야기도 다들 들을 만큼 들었고, 알만큼 압니다. 성육신의 의미도, 순종의 의미도, 십자가의 의미도, 부활의 의미도, 승천의, 의미도 듣고 또 들었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인의 전화는 기다리고, 부모의 선물꾸러미는 기다리고, 로또 복권의 당첨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은 있어도 예수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람들은 보기 어렵습니다.
이 성탄의 계절,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고대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향해 떨어지는 우리들을 안전하게 붙들어 주시는 낙하산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낙하산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을 꼭 만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그런 분으로 그분을 만나신 분들은 낙하산 줄을 힘주어 꼭 잡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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