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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계시록

계 21장 1-4절(왕의 도시) - 최태선

by Preacher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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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21장 1-4

왕의 도시

최태선 목사 2008.1.27.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시편 48편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시 48:1-3)

 

시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은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시에서 당신의 평화로운 통치를 원하십니다.

 

저는 그동안 참 어려운 시간을 지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고 상처 입히고, 입으며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적한 곳에 와서 날마다 산을 오르며 바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며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바쁘지 않은 삶, 한적한 시골에서의 삶이 참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 한편으로는 깊은 산골 아담한 교회에서 세상에서 실패하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삶을 의탁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고 고요한 산골마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그런 삶을 동경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도시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은 한 동산에서 시작하여 한 도시에서 끝난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하는 이상적인 인간 공동체를 위한 환경으로서의 한 동산과 함께 시작하고,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한 성, 곧 도시와 함께 끝날 것입니다. 그 이미지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단지 양과 포도원과 같은 목가적인 시골에 관한 책이 아니라 도시들에 관한 책입니다. 최근에는 그것을 지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저에게 큰 영향과 가르침을 준 쟈크 엘룰이 <도시의 의미>라는 책에서 탐구한 바와 같이, 도시에 관한 주제가 성경 전체를 통해 흐릅니다. 이 주제는 특별히 도시화 시대인 현대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도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다스림 또는 통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새 질서는 기원전 2000년에 뿐만 아니라 기원 후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도시들에서 발생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라는 주제는 때로는 부정적으로 때로는 긍정적으로 되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바벨과 시온, 바벨론과 예루살렘이 그것입니다. 이 도시 관점은 특히 모든 민족이 올바르게 다스림을 받고 또 모든 민족이 오게 될 다윗의 도시, 즉 왕의 도시인 시온이란 주제에 초점이 모아집니다. 시온이란 다만 유대인을 위한 이상의 도시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도시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창세기 4장 17절에 나옵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후, 성(city)을 쌓고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것을 에녹이라고 하였습니다. 엘룰에 의하면 그 도시는 가인의 “대체 에덴”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전 역사에 걸쳐 하나님을 제쳐놓고 방위 수단을 만들려는 인간의 시도를 나타냅니다. 엘룰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에덴을 자신의 것으로 대체한다. 그는 하나님의 안전을 자신의 안전으로 대체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신 목적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목적으로 대체한다. 그것은 가인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손을 거부한 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어깨에 메는 행위이다.” 이 가인의 계보는 점차로 발전하여 직접적으로 인간의 반항과 과학기술 그리고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자율성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시날 땅의 바벨탑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도시로서의 바벨론입니다.

 

그러나 그와 대조를 이루는 도시에 관한 주제가 성경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시입니다. 우리가 처음 읽은 시편의 바로 그 도시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다윗의 도시, 즉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왕의 도시입니다. 그 다윗의 계보를 통해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됩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기름부음 받은 왕 다윗은 여부스 족속의 도시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7, 대상 11:5-9)

 

다윗 왕국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게 되듯이, 다윗의 도시는 하나님의 도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시편에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놓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46:4)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시48:1)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시87:3-4)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도시, 즉 거룩한 도시의 비전은 자비롭고 주권자이신 주님 안에서 그 백성의 희망의 닻으로 변함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포로기에 하나님의 해방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29:7) 이 말씀에는 이방의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평화의 도시를 약속하시고 또 현재 자신들을 놓아 둔 도시의 샬롬을 구하라고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지상의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분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다니엘은 거룩한 도시가 재건될 것이며 자신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동안 기름부음 받은 자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려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 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9:24-27)

 

다윗의 도시, 하나님의 도시, 거룩한 도시,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다루심에 뿌리 내리고 있는 이 주제는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도시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나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로마 제국 전역에 걸친 많은 도시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실제로 이 도시들에 관한 언급은 하나님의 도시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셨습니다.(마5:35) 그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2)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약속된 왕이셨던 예수님을 거부했을 때 하나님의 샬롬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다행스런 좋은 소식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 로마 전역에 이르는 로마 제국의 모든 도시들 도처에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도시와 하나님의 나라를 더 넓게 이해하게 됩니다. 오직 그와 같을 때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득 차는 새 예루살렘의 비전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즉 already but not yet은 도시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도시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도래이자 하나님 백성의 본향인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 새 예루살렘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땅위의 이방인입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있는 체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히브리서에서 뚜렷하게 그려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 아브라함도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도시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충실한 백성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지고 있습니다.(12:22)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13:14) 우리 또한 아브라함과 같이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성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심할 여지없이 이 도시는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공동체(교회)를 외국인 공동체(도시)의 범위 내에서 소금과 빛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의 도시들과 나라들 안에서 예수님의 계속적인 성육신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로 묘사합니다. 세상에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 이야기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통치를 현재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고 있다는 것과, 이 세상 나라들과 도시들이 하나님의 그 나라와 도시가 될 때가 오고 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종말의 그 때 도시와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최종적인 완성의 모습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것이 하나님의 새 질서입니다. 즉 성경의 모든 주제들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나라 계획을 예시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하늘과 땅이 회복됐고 샬롬이 왔으며 동산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여자와 남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회복됨으로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록에 이어지는 다음 내용을 소망을 가지고 볼 수 있게 됩니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계22:1-5)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은 실제로 한 동산에서 시작하여 한 도시에서 끝납니다. 그 도시는 평화와 조화가 지배하며 모든 것이 건강하고 생태학적 균형을 이루는 한 동산으로서의 한 도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도시라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또 하나의 차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도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차를 타고 판교지역을 지나가면 이제 서서히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높은 아파트도 있고 낮은 건물들도 보입니다. 새로운 길들이 이리저리 연결되고 판교구라는 새로운 신도시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는 아예 산을 평지로 만들어버립니다. 산이며 그 산의 나무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간 능력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주님께서 도시를 세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흠 없는 도시들에 대한 꿈은 헛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인간의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습니다. 또 당장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아한 주택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시를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인 하늘에 예루살렘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이룰 때 그것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 땅에서 그 일부가 실현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최종적인 완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분이 가져오실 새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도시를 하나님 도시의 전초지로 바꾸는 일에 당신과 함께 일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제들인 샬롬과 땅이 매우 물질적이며 실체들인 것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의 맨션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낼 수 있는 땅위의 공동체들에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만유를 회복하실”(행3:21) 때가 오고 악이 심판을 받을 때, 그분은 당신의 도시와 나라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재의 관심과 교회의 현재의 선교는 지금 있는 도시들을 정의와 평화의 장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주님이시며 주권자이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효과적인 증언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도시들에 관한 세 가지 기본적인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첫째, 도시들은 힘의 장소입니다.

 

도시들은 언제나 그래왔고, 심지어는 가장 초기부터 그랬습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그 예들을 제공합니다. 힘과 “권력자들”은 도시에 집중됩니다. 모든 주요 도시는 경제적,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모든 힘들의 복합체입니다. 도시는 힘의 구조들의 장소이며, 이런 힘들을 행사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의 장소입니다. 이런 이유로, 도시는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밝게 드러난 “권세와 정사들”과 만나는 일차적인 대면 장소입니다.

 

둘째,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장소입니다.

 

세상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듭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도피처와 최소한의 기본적인 보호와 복지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은 번잡하지 않고 조용하고 공기 좋은 교외로 이주합니다. 대도시는 커다란 저수지와 같습니다. 인파가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이 밑바닥에서 궁지에 빠진 채로 거기에 머뭅니다. 부유한 사람들,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했던 도시를 뒤로 하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들은 곧 자신이 떠난 곳을 잊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도시들은 곤경에 처합니다. 즉 그것은 부유한 사람들의 부가 빠져나가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늘어나는 부담으로 짓눌립니다. 게다가 상점들은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들을 따라 교외로 나갑니다. 도시는 어둡고 녹슨 공장들을 뒤에 남겨둔 채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들은 어떨까요? 종종 교회 또한 같은 형태를 따릅니다. 부유한 사람들을 따라 좀더 넓은 곳에 자리를 트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는 가난한 사람들의 장소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도시들은 선교의 장소입니다.

 

도시들은 힘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 세상의 주권자들과 권력들에 대한 교회의 증언의 무대입니다. 도시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장소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져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를 위한 장입니다. 교회가 활동해야 할 곳이 바로 도시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현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이 아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도시가 의미하는 바를 추구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교회는 전 세계에 걸쳐 도시 선교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지구는 도시들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도시들은 세상 사람들, 종교들, 이념들과 권력들의 소우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오늘날 교회의 복음 증거와 정의 증거에서 간과되기 쉽습니다.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할 무대가 바로 도시이며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도시 선교에 최우선적인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계층과 갈등을 넘어 화해를 가시적으로 증명해 보일 도시 교회 개척과 교회 형성은 오늘날 교회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우리의 도시들은 억압과 두려움 그리고 인종적, 계층적 폭력의 장들입니다. 복음은 그와 같은 나누어짐과 분열의 벽을 넘어 공동체를 형성할 입증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엡2장) 모든 막힌 담을 허물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도시의 경관을 가로질러 하나님 나라 스타일의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있어 1세기 기독교 운동을 본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교회는 도시 안에 정의를 가져오도록, 즉 샬롬을 추구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는 도시를 정의의 장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정당이 아니라 정의를 지지할 공무원들을 뽑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음식을 제공하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신체적 필요들을 충족시켜주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또한 일거리를 제공하고 도시 경제를 세우며, 필수적이면서 경제적으로 건전한 상품들과 서비스들을 알맞은 가격에 생산하는 새로운 사업들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시에서 하나님 나라 우선적인 일들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단지 주요 도시들에서 사는 사람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입니다. 모든 도시는 그 지역의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생태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제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그물망이 되었습니다. 한 도시의 오염은 이웃 도시의 오염으로 전파됩니다. 먼 나라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떤 한 곳에서의 결과는 반드시 모든 다른 도시들에 전가됩니다. 살기 좋은 도시들을 건설할 책임과 기회는 이제 전 교회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평균적인 부 이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시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시의 샬롬을 미리 가리키는 도시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 나라에서의 우선적인 일을 추구하기 위해 권사와 정세에 굴복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의 순례 여행이 도시를 피해 우회하여 진행된다면 하나님 나라는 놓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의미가 저에게 주는 의미는 조금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도시를 떠나 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복잡한 도시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과 씨름하는 것은 피곤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피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도망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약한 자들을 향해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일할 장소와 사역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차근차근 주님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모습과 그러한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생각들도 있지만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종교의 껍데기를 기독교의 전부로 알던 제가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된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주에도 지탄 받아 마땅한 교회의 모습과 이웃과 세상을 섬기며 당당하게 자신을 내세우는 교회의 모습을 보도를 통해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가지 교회의 모습이 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그들의 모습과 엄청난 일들을 해내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무슨 일을 감당하고 언제 그런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 막막함이 몰려오고 주눅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기초를 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으로 빛나는, 부족하지만 분명하게 미래의 소망을 향해 달려 나가는 믿음의 공동체는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도시로의 부르심, 이것은 우리 어지니교회를 향한 보다 구체적이고 때가 가까운 주님의 가르치심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새겨둡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실 때, 망설임 없이 확신을 가지고 그 일에 뛰어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진정한 왕의 도시를 세상에 보이는 일을 위해 준비되어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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