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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계시록

계 3장 21-22절(제자의 종착역) - 최태선

by Preacher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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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3장 21-22

제자의 종착역

최태선 목사 2006.8.5.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고 더욱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영광의 몸을 가질 그때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신의 지나온 인생에 깊이 실망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몸이 늙고 힘이 없어지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더 이상 미래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들을 바라보며 그것을 할 수 없는 아쉬움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평생 꿈꾸어온 일들이 상황이나 결정의 실수나 다른 사람의 행위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입니다. 그들은 회한에 빠져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과 함께하신 것인지에 대해 괴로운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미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미래에 펼쳐질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현재의 삶, 즉 육신의 삶이 끝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의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성품이 우리 앞에 끝없이 펼쳐질 하나님 나라의 삶에 적합한 존재로 변화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 “작은 일”에 대한 충성은 “많은 일”을 맡을 수 있는 인격을 우리에게 길러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마25:21) 그 즐거움은 모든 차원에서 선한 하나님 나라의 삶에 참예하여 선한 것을 우리가 직접 창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가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 질서 안에서 해야 할 일을 예비해놓으셨습니다. 그분의 계획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우주의 지속적 창조의 제 몫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입히셔서, 우주 안에 자유롭게 놓아두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다른 이들이 최대한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요 뜻인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자녀 삼으신 예수의 제자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 곧 자아의 내적 방향이 그것이 가능한 수준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13:43)라는 예수님의 천국 비유의 결론처럼 우리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 찬송이 의미하는 온전한 뜻을 다 이해하며 부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심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영원하며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것을 해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능동적 존재, 창의적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해와 같이 빛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설픈” 하나님을 어설프게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의 위대하신 하나님을 분명히 볼 때에야, 비로소 세상 모든 것이 본질이 달라지며 빛 가운데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사상적 기류 속에서 이러한 방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피상적인 견해는, 실체를 과학적 관찰과 설명으로 알 수 있는 것으로 국한시킵니다. 자연과학의 법칙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의 법칙은 그 최초의 상태의 존재와 본질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과학의 법칙이 자연의 법칙인 이유도 과학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과학은 과학 자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궁극의 정황인 하나님과 그 나라를 알게 됩니다. 그 나라의 미래적 단계 속에 우리 인생의 의미와 우리가 일부분으로 속해 있는 이 땅의 역사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현재적 실체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의 기초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나라에 미래적 완성이 있음을 또한 알고 계셨습니다. 이 땅과 이 땅의 삶을 초월하여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차원입니다.

 

그 미래의 실체를 알아야 우리는 현재의 경험과 미래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의 천국의 삶이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의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며 그 실체에 부합되는 것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나이든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실망하고 낙심하며 가장 중요한 인생의 말미를 무기력하게 맥없이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미래의 소망을 현재의 실체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인간이 존속한다는 생각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신화와 같은, 그저 죽음을 피해가기 위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가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그것은 합리적일 수 없고, 두려운 죽음을 회피하거나 잊기 위한 궁색한 이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실체라고 믿는 제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더없이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상상이나 가정이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을 결정짓는 보이지 않는 증거이며 확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분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이 보시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은 바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즉 죽음이 나를 덮쳐 와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이것은 겁먹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두려움 때문에 부리는 허세가 아닙니다. 나를 안위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 즉 보호하심과 교정의 실체를 체험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어떻게 알까요?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실 세계의 일상적 교제 속에서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리하여 그분이 반드시 하실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 23편이 말하는 바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후의 존재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삶은 무한히 향상된 삶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충족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활동과 새로움 속에서 더욱 강렬히 살아있게 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당한 짐작입니다.

 

죽음을 통과할 때 우리는 세계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처음으로 세계를 그 실상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 같습니다.(11) 그러나 죽음을 지나면 우리는 달라집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는 비로소 전체를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육체를 입은 현 위치에서 우리가 보는 사물은 “거울로 보는 것 같”습니다. 바울 시대의 거울은 요즘의 거울과 같지 않아 사물의 실체가 언제나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태의 몸을 벗어나는 것은 곧 찌그러진 거울 속 모습 대신 실물을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어린아이의 지각을 벗어나 장성한 자의 시각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에게는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몸밖에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마 10:2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8:50)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6),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믿으며 그 나라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을 통해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보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더욱 좋아했습니다.(23) 물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살아있는 것도 좋다고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의 첫 열매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아니고 그분을 섬기는 천사들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첫 제자들의 확신의 절대적 기초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분께는 부활의 몸이 있었습니다. 물리적 실체와 상호 작용하는 공적으로 볼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도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빛나는 몸이었으며 그래서 영광의 몸이었습니다.(빌3:21) 공간과 시간과 물리적 인과에 구속되지 않는 영원한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4)고 말합니다. 신령한 몸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믿은 것은 바로 그것을 보고 경험한 제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사람의 삶은 그러므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속적 성장 시기, 통과 시기, 그리고 예수님과의 통치 시기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 안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볼 수 없다고 해도 우리의 영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지속적 성장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통해 우리는 하늘나라의 삶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성화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다섯 단계로 나누어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점차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향해 우리의 삶의 방향과 힘을 모아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마음가짐과 실제 능력에서 꾸준히 자라 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성품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답게 점차 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막5:45) 그리고 마침내 천국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아가페의 사랑이 점차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말과 행위의 영향력은 인간의 용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본질과 차원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우리는 갈수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며,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은 점차 영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이며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따라서 노화는 잃는 과정이 아니라 얻는 과정입니다. 물리적 몸이 쇠할수록 영광의 몸이 가까우며 영적 실체가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분명 더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내재하는 불멸의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이며 세상의 붙은 모든 욕심을 생명의 불꽃으로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이 지속적 성장의 시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변화의 정도에 따라 천국에서의 우리의 삶은 보다 더 확장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할 것입니다.(한 고을 또는 열 고을) 또한 우리가 천국에 합당한 존재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 또한 더욱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진정한 제자의 삶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참 삶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곧 유한한 기회의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시기는 통과시기입니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인간의 공통적 경험은 이 통과시기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내용과 본질적으로 일치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죽음을 통과 중인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아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맞으러 오며, 그것도 아직 뒤에 남길 사람들과 교류가 지속되고 있는 중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는 이들을 향하신 그분의 위로와 자비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눅16:22)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로부터 그동안 우리를 지켜보았던 이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를 맞으며 끌어안습니다. 우리는 함께 있는 그들로 인해 기쁨과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세계로 진입하는 이 통과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신약의 관점에서 죽음이 폐해졌으며 말씀 안에 사는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인격적 존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됩니다. 반면에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은 분명 분리와 격리, 희망의 종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그런 상태가 주어지는 것은 ,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궁극적 기준으로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런 자세는 하나님과 분리된 곳에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우주에는 여전히 그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통과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과의 통치 시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셨습니다. 때가되면 우리는 새로운 책임을 맡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혹은 다섯 고을로 혹은 많은 것으로 무엇이든 적합한 것으로 우리에게 맡기실 것입니다.(눅19:17, 마25:21)

 

새로운 창의적 책임이 맡겨질 때 깜짝 놀랄 일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몇 고을을 담당하게 될 것 같습니까? 또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는가?(나에게 주어진 지극히 작은 일은 무엇일까요?) 자신을 돌아보며 그때를 대비하는 것도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이 만인에게 알려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3) 다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투명하게 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만이 유일한 지혜의 길이며 그분의 능력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언제나 길과 힘이 된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는가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동적 행동으로 나올 만큼 나의 성품은 성숙해 있는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고을 권세를 맡게 될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 관점으로는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는 법을 배운 소수의 겸손한 사람들만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의 속성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 보기에 먼저 된 자로서 하나님의 판단에는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입니다.

 

어쨌든 때가 되면 우리는 거할 곳이 많은 내 아버지 집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사람들과 더불어 창의적 활동을 감당하는 영원한 숙명의 자리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광대한 활동 영역에서, 상상할 수 없이 뛰어난 리더십 아래서, 한없는 생산성과 기쁨을 맛보며, 놀랍도록 창의적인 공동 노력에 몰두하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 눈으로 본 자도 없는”(사64:4)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상상과 표현도 회복된 만물, 지극히 충만하게 임한 천국의 복된 상태를 그려내지 못할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의 세계, 그러나 아무 활동 없이 수동적으로 있는 그런 영원의 상태가 아니라 온전한 평화, 기능이 충만한 평화, 평온하지만 부단한 창의성의 평화일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는 상태인 샬롬!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않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모습, 그것이 바로 제자의 종착역입니다. 창조주이신 그분과 나란해지는 이 제자의 종착역보다 사람이 더 바랄 수 있는 곳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더 생각해야 할 한 가지는 주님께서 이 말씀을 교회들에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자의 종착역은 혼자 가는 여행길이 아닙니다. 아니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함께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나갈 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 어지니교회는 그 종착역을 향해 가는 열차입니다. 이기십시오!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영원히 다스리는 제자가 되십시오. 그곳에서 해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어 영원히 빛을 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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