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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계시록

계 7장 9-17절(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비전) - 권율

by Preacher 202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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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7장 9-17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비전

권율 목사 2016. 10. 5.

부곡중앙교회 청년부 청년부 [부산시] https://blog.naver.com/ryulkwon0616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 이 비전은 성도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이 비전은 우리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전은 단 하나입니다. 구원으로 예정된 모든 자들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날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전’(vision)이라는 말을 성경이 본래 의미하는 것과 다르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교사의 비전을 받았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교사의 비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선교사나 교사는 비전 자체가 아니라, 비전을 이루는 ‘사명’(mission)입니다. (물론 엄밀히 구별하자면, ‘선교사’ 또는 ‘교사’는 사명 자체가 아니라, 사명을 이루는 수단인 ‘직업’에 해당합니다. 사명=직업+섬김). 즉 선교사의 사명을 통해, 또 교사의 사명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비전’(vis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videre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것은 ‘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텔레비전(television)이라는 말에도 그 뜻이 들어 있습니다. ‘텔레’는 ‘멀리 있는’이라는 뜻이고, ‘비전’은 ‘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멀리 있는 것을 본다는 뜻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비전’을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이라고 정의합니다. 역시 ‘보다’라는 뜻과 관련이 있습니다. 헬라어 사전을 찾아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라마’(ὅραμα)인데, 이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뜻합니다(BDAG). 즉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비전’이라는 말은 항상 우리가 어떤 것을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십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과연 여러분의 비전과 하나님의 비전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비전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9절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놀라운 광경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들을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며, 그중 한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9절에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사도 요한 스스로가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보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보게 되는 그것을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그 비전이 바로 하나님의 비전임을 깨닫고, 또한 이 비전이 실제로 우리 모두의 비전이 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습니다. 이 엄청난 수의 무리는 바로 앞 5-8절에 나오는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9절에서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다고 되어 있는데, 바로 앞 단락에서는 숫자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유다 지파를 언급하면서 마지막으로 베냐민 지파를 언급하며, 그들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각각 12,000명이라고 말합니다. 약간은 다르지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모두 언급되어 있습니다. 열두 지파에 각각 12,000명씩 있으니까 모두 합치면 144,000명입니다.

 

여러분은 144,000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금세 어떤 집단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미 짐작하신 대로, 한국 교회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ㅅㅊㅈ 집단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들은 144,000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ㅅㅊㅈ 집단의 144,000명 안에 들어가야지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미 ㅅㅊㅈ 신도 수가 144,00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제 그들은 또다시 말장난을 칩니다. 가라지 신도가 아니라 알곡 144,000명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알곡 144,000명에 들어가기 위해 미친 듯이 포교활동을 펼치며 한국 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절대 속으면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144,000명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고, 당연히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성경 해석법은 특별히 문맥이 제한하지 않는 이상, 그 본문을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처럼 환상이 포함된 본문은, 많은 경우에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ㅅㅊㅈ와 같은 이상한 집단이 출현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44,000명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144,000을 분석해 보면, 12×12×1,000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숫자들은 성경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먼저 첫 번째 12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두 번째 12는 신약의 열두 사도를 의미합니다. 이 두 그룹은 신구약 교회의 기초를 각각 나타냅니다. 그리고 1,000은 ‘무수히 많다’를 뜻하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래서 이 세 숫자를 곱하여 신구약 모든 성도들의 총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9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 즉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모습을 사도 요한이 보았습니다. 유대인과 같은 어느 특정 민족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과 백성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보편성을 띠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 일본 사람, 미국 사람, 북한 사람, 유럽 사람 할 것 없이, 어린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함께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 본문을 통해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그저 사도 요한이 체험한 환상 정도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이 지향해야 할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본문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모든 성도들이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뭔가를 외치고 있습니다. 천국 성도들의 옷이 희다는 것도 역시 상징적인 의미인데, 14절에 나오듯이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죄 사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종려 가지”는 축제의 기쁨과 찬송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9절에 나오는 “큰 무리”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하게 되어, 복음의 영광스러움과 승리를 외치는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입니다.

 

천국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 같이 10절을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내용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심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행해질 영광스러운 찬양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부를 찬양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되, 특별히 그분의 구원하심을 노래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는 일을 세상에서 잘 풀리게 해 주셔서 그분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자식이 잘되고 건강히 잘 살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물론 이런 것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제목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제목은, 하나님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천상의 성도들처럼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를 큰 소리로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9-10절을 묵상하면 자동적으로 ‘비전’이라는 찬양곡이 떠오릅니다. 고형원 씨가 오늘 본문을 바탕으로 작곡한 아름다운 찬양곡입니다. 저는 이분이 찬양곡의 제목을 정말 제대로 붙였다고 생각합니다. 서두에서 이미 밝혔고 오늘 설교 제목에도 나오듯이, 이 본문은 하나님의 비전에 관한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모든 성도들이 찬양하게 될 그날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이 비전을 하나님이 밧모 섬의 사도 요한에게,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비전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 내가 하고 있는 사업, 또 나의 직장생활이 하나님의 비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이 이루실 거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비전이 나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컨대 그는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구약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찬송해야 할 내용을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그 은혜를 세상 죄인들에게 흘려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즉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이 오직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외치는 것입니다. 교회당 안에서만 노래로 외칠 것이 아니라, 주중에 삶의 현장 가운데 온 마음과 온 몸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그럭저럭 살다가 나중에 천국 가서 이 찬양을 외치겠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찬양은 지금 우리가 행하는 찬양이 천국에서도 똑같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지 않는 성도는, 나중에 완성된 천국에서도 그분의 구원하심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구원을 지금 이 땅에서부터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천국에서도 똑같이 사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상의 모든 성도들이 10절에서 찬양을 큰 소리로 외치니까 11-12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조금 길더라도 다 같이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이것은 성도들에 대한 천사들의 반응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뛰어난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우리처럼 구원의 감격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 천사들이 교만하여 타락해서 지금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은 결코 우리처럼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탄과 마귀는 영원한 지옥불로 떨어지게 될 저주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비록 우리처럼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는 없어도, 본문에서 보듯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와 함께 찬양하고 싶어 합니다. 천상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하니까, 그에 대한 반응으로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만,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외칠 뿐입니다.

 

10절과 12절의 찬양 내용을 각각 비교해 보면, 한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찬양 내용에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표현되어 있지만, 천사들의 찬양에는 그것이 빠져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하긴 하지만, 우리처럼 구원에 대한 감사 찬송은 절대로 부르지 못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여러분과 저는 하늘의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얼마나 힘써 찬송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찬양과 천사들의 화답을 지켜보던 사도 요한에게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13절에 보듯이,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요한에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장로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이십사 장로들 중 한 명입니다(4:4,10; 5:8; 11:16; 19:4).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단순히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천상의 일을 성령에 사로잡혀 체험한 것입니다. 아무튼 그 장로는 사도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13절).

 

그가 모르고 그렇게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좌 곁에 있는 이십사 장로 중 하나인데 그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요한에게 천국의 일들을 좀 더 깊이 깨우쳐 주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여하튼 사도 요한은 장로의 질문을 듣고,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 장로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4절 후반부입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큰 환난”은 어떤 집단이 해석하는 것처럼, 재림 직전에 도래한다고 주장하는 ‘7년 대환난’ 같이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 당시 1세기 성도들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듯이,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이 재림 때까지 받게 될 모든 환난과 고난을 가리킵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즉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게 된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 살면서 반드시 환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소위 ‘인생 대박’을 말하는 메시지는 모두 거짓 복음입니다. 예수 믿으면 뭔가 일이 다 풀릴 것 같이 말하는 설교자는 가짜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보시다시피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내 인생이 대박 나고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반드시 환난을 당한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종말에 누릴 완전한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위로와 소망이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되어 있습니다! 15절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될 그날을 간절히 기대하십니까?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게 될 그날을 가슴에 사무치도록 기다리고 있습니까?

 

천국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장막을 치실 것입니다(15절). 장막을 친다는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 나오듯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셔서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가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당하던 모든 환난과 고난이 그분의 임재 앞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이날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이제 17절 말씀을 다 같이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저는 이 말씀보다 우리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대로, 보좌에 계신 어린 양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을 진정으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릴지라도, 우리의 눈물과 땀을 하나님이 지금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볼 때는 지금 나의 희생과 헌신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바로 그 희생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고 계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만큼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도 없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는 찬송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질 그날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힘쓰고 있는 선한 일들이 심지어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배척당할지라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픔과 어려움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의 눈물을 친히 닦아주실 영광스러운 그날을 마음속 깊이 사모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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