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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계시록

계 5장 1-14절(찬송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 서명성

by Preacher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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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5장 1-14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

서명성 목사 2016.10.9.

팔로마한인교회 http://palomarkc.org/

 

“찬양을 회복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3주 동안 민수기, 사도행전, 계시록을 통하여 살펴본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어디서 찬양을 했습니까? 출애굽 2세대는 광야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계시록의 나오는 신자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평탄한 환경에서 찬양을 드리는 경우가 별로 언급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찬양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힘차게 승전가를 불러야 합니다. 그분이 주실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소망을 주기 위하여 쓰였습니다. 장차 우리가 어디에 설 것인지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보여줌으로 지금부터 믿음으로 바라보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4장에서 요한은 하늘 보좌와 그 주변에 있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무지개, 성령님, 유리 바다, 네 생물들, 24장로들 ... 그러나 반드시 언급되어야할 분이 빠져 있는데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20:43절에 의하면,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있었던 요한이 하늘 보좌에서 그분을 다시 만납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계시록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신자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획기적인 역사관을 제시합니다. 계시록 4장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5장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교회 공동체가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주님이 그들을 외면하거나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이 승리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 고난을 거쳐 부활 승리를 경험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도 고난이 삶의 일부임을 기억하며 그 와중에서도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함으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궁극적으로 하늘 보좌에 서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인으로 봉인 된 두루마리 책(1-4)

 

개역개정판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성경에는 5장이 ‘또 내가 보매’로 시작합니다. ‘또’라는 접속사는 4장과 5장을 연결시키고 보좌에 앉으신 이를 다시 언급하므로 두 환상이 연속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려져 있는 인봉된 두루마리입니다. 오른손은 주권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두루마리에‘안팎으로 썼다’는 것은 쓴 내용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본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완전히 봉해졌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책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두루마리 환상은 에스겔 2장 9-10절에 처음 나옵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책을 지금 요한이 보고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가 재앙과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신자들에게는 같은 내용이 승리와 구원 역사의 완성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힘 있는 천사가 나타나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라고 외칩니다. 그 음성은 하늘과 땅과 온 우주에 들릴 수 있는 큰소리였을 것입니다. 두루마리의 인을 누가 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누가 역사의 주관자인지’묻는 질문입니다. 그 인을 뗀다는 것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계시할 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능히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는 말은 그런 사람이 있는지 요한이 부지런히 살펴보았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두루마리 인을 떼기에 합당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계획이 시행될 수 없다면, 하나님 백성들은 사탄과 그 하수인들로부터 여전히 박해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 요한의 머릿속에 지금도 고통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얼굴이 스쳐갑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칠 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 깊이 낙담하였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통곡하였습니다. 절망 속에서 그가 흘리는 눈물은 또한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에 약하신 분입니다. 애통하며 그분 앞에 서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현실로 인하여 처절하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애통의 눈물은 위로와 보상을 얻게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언제 마지막으로 울어보셨습니까? 주님 앞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향하여 흘리는 눈물 안에서 회복의 싹을 트게 합니다. 요한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는 자처럼 크게 울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눈물이 필요합니다. 단지 무시를 당하거나 억울하고 원통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섭섭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원인데 여러 가지 사정을 인하여 주님께 더 충성하지 못함을 인하여 흘리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고 방황하는 이웃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70여 년 동안 고난의 행군을 한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눈물을 흘립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할 때까지입니다. 우리가 눈물로 침상을 적실 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요한은 자신의 슬픔이 어떻게 위로를 받았는지 의도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이글을 읽는 독자들이 하나님 앞으로 진한 눈물을 흘리며 나아와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극적인 등장을 위한 적절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계시록 6장부터 18장까지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대접의 심판이 차례대로 시행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리즈로 세 번 연속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엘 1~2장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 메뚜기, 기근, 불, 그리고 바벨론 군대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이 너무 완고하고 그들의 죄가 심각해서 한 번의 징계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4~5장의 보좌 환상은 하나님께서 장차 시행하실 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어린 양(5-7)

 

아무도 그 봉인된 책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요한이 통곡할 때, 장로들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합니다. 울음을 그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책을 열 수 있는 합당한 자가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로 소개됩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야곱이 유다 지파를 향한 축복의 예언을 반영한 것으로 야곱이 유다를 가리켜 ‘사자 새끼’라 하였고,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창 49:9-10). 그가 바로 영광과 위엄을 지닌 메시아임을 말합니다. 또한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 11:10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뿌리’는 조상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11:1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줄기는 후손을 뜻합니다. 메시아가 어떻게 다윗의 조상도 되고 후손도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감추어진 비밀이었습니다. 뿌리이며 줄기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반영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다윗의 뿌리가 되시고, 혈통적으로 따진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서 나오신 왕으로서 진정한 승리자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분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시고 주의 신실한 백성들을 구속과 완성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그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이 요한의 울음을 그치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이에 대한 해답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린 양”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서 유월절 어린 양과 관련되어 성경 여러 곳에서 이 표현이 사용됩니다. “같더라”는 표현은 어린 양이 어떤 죽임 당함의 흔적이나 인상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언뜻 패배당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그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해결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그 자신이 승리자가 되셨고, 이제는 심판을 시행하시는 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일곱은 완전을 의미합니다. 또한 뿔은 구약에서 종종 권세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완전수 일곱과 능력의 상징인 뿔을 결합시켜 그분의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어린 양은 일곱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을 통찰력을 의미하기에 일곱과 연결시킨다면, 그분이 모든 곳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두루마리의 인을 뗀다는 것은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다니엘서를 배경으로 볼 때 인봉된 책을 뗀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종말적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책을 열 수 있는 때는 바로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예수님에 의해 열린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하는 종말적 사건의 중심에 서 계심을 의미합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취하십니다. 7절은 직역하면 ‘나아와서 받으셨다’입니다. 이 완료형의 헬라어는 보좌 앞으로 나와서 받는 생동감 있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두루마리를 받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예수님이 세상의 구속과 심판을 집행할 전권을 받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을 향한 경배(8-14)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 책을 취하시자 네 생물과 24장로들 즉 모든 피조물의 대표가 창조주 하나님에게 드렸던 것과 같은 경배를 어린 양에게 드립니다. 그들은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프를 연주하는 목적은 어린 양에게 찬송을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선포하고 높여드리는 찬양을 통해 그분이 하시는 일이 완전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요한은 또한 금 대접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았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23~25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셔서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한 것은 출애굽 사건을 초월하는 구원 사건입니다. 요한은 출애굽 사건의 경우처럼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 기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연기에 비유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어린 양을 경배할 때 기도를 올리는 이유는 성도들의 기도가 결단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쓰이고 있음을 확인시킵니다.

 

4장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경배라면, 5장은 구속자이신 어린 양 예수에 대한 찬양이라는 점입니다. 어린 양 예수님이 그 책을 받으시자 하늘에서 새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새 노래라는 것은 곡조가 새롭거나 가사가 새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감격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아니면 부를 수 없는 노래입니다. 새 노래의 주제는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이 어린 양께 경배를 드리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하는데, 첫째는, 그가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그분이 자발적인 희생의 길을 걸으신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그분이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속전을 지불하고 사듯이 주님께서 자신의 피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셋째는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 부분을 언급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10) 우리가 믿고 섬기는 어린 양은 하늘과 땅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그분 스스로 고통을 겪으셨기에 고통 속에 있는 신자들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의 눈앞에 엄청난 장면이 펼쳐집니다. 하늘 보좌 그리고 둘러싼 웅장한 광경에 압도됩니다. 5장에 나타난 장면을 카메라로 찍는다면 처음에는 보좌에 초점을 맞추었다가 점점 뒤로 물러나면서 더 많은 장면을 담습니다. 11~14절에 이르면 네 생물과 24 장로들의 찬양은 자연스럽게 천사들의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천사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입니다.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무리를 가리킵니다. 허다한 천사들이 네 생물과 24장로의 찬송에 화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개의 정관사로 연결된 7중적인 표현, 즉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찬양합니다. 이어서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만물도 동참합니다.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경배합니다. 12절과 달리 여기서는 정관사가 각각의 명사(찬송, 존귀, 영광, 권능) 앞에 있어 개별적으로 강조합니다. 찬송으로 시작하는 것은 12절의 천사의 송영이 찬송으로 마쳤기에 모든 피조물이 그것을 이어받아 찬송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일제히 찬양을 드리는 장면은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웅장하고 황홀합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드린 찬양은 모든 성도들이 천군 천사들과 함께 불러야 할 영원한 노래입니다.

 

우리들은 요한이 보았던 은혜의 보좌 앞에 장차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눈을 들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앞에 서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1) 종말론적인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간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이미 ... 그러나 아직”(already ... but not yet)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임했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사람을 입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됨으로 죄와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또 한편으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깨어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 긴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바울은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그리스도께서 언제든지 다시 올수 있으니 깨어서 절제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나누라고 합니다. 성경의 마지막도 기도로 끝납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하며 마라나타를 외칩니다.

 

2)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고 주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아무도 막을 수 없고 그분의 의지를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봉인된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어린 양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고, 성령을 통해 그 구속이 온 세상에 확산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어린 양을 따르는 것만이 영원한 승리와 영광에 참여하게 합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며,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악이 득세하고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탄식은 탄성으로 우리의 슬픔은 환희로 바뀔 것입니다.

 

3) 기도를 올려드려야 합니다

 

‘금대접에 가득 찬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귀한지 금대접에 담겼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그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집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일에 성도의 기도가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하늘 보좌에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이 땅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기도해야 하고 그 기도는 주님이 받으시는 아름다운 향기와 같이 여겨져서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4) 주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찬양한다는 것은 단순히 찬양의 곡조를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기쁨의 함성이 찬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시고 우리를 찬양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을 통해, 죄로 인해 비천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존귀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 만으로도 찬양의 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들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기에 승리를 확신하며 영광중에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광야에서, 감옥에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찬양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께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수많은 천사들과 더불어 어린 양께 경배할 자들입니다. 우리의 찬양 제목은 여전히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천군천사들과 함께 불러야 할 영원한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따라야 할 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힘과 권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어줌과 희생으로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인내와 순결함과 심지어는 죽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린 양이 고난을 지나 죽음을 통하여 승리하였던 것처럼 주님을 온전히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를 때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하시며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마련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 풍성한 열매를 인하여 주님을 감격하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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