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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장 9-10절(하나님의 은혜를 알자!)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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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장 9-10

하나님의 은혜를 알자!

이삼규 목사 20170205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를 체험하는 길을 영어의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something-nothing-everything’ 곧 내가 ‘something-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나는 ‘nothing-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nothing’임을 깨닫고 주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everything-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구한말 언더우드 선교사는 캄캄한 조선의 현실 속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그의 겸손한 순종이(nothing) 이 땅에 하나님의 큰 은혜, 선교의 열매를(everything) 맺게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자신이 사도직을 감당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그가 사도라 칭함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구원에 이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죄는 은혜를 더욱 드러낸다

 

우리가 왜곡하고 있는 하나님의 한 부분이 하나님의 은혜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분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며, 그분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끼치는 완전한 영향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이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찬송가를 현대적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합니다. “나 같은 ‘사람’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우리가 부르는 찬송과 현대적으로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또는 과거 한때 죄인이었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 같은 죄인’이라는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 어떤 기준에 미달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도 자신이 본래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었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는데 만선이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만선된 고기에 집중하지 않고 그렇게 고기를 잡도록 하신 예수님께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되지 못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도 그분이 은혜로 참아주신다.”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합니다.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참으로 제 각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은혜를 정의합니다. 동정심 많고 인내심 강하고 관대한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저 사람은 매우 인자하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석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참아주시는 것이다. 죄의 용납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치르시는 대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교훈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조종하기 위해 써먹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은혜는 그분을 궁지로 몰아넣어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우리를 위해 행하시도록 조종하는데 이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을 탐구할 때 이것을 그분의 다른 속성들로부터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한 가지 속성을 취하기 위해서 다른 속성을 내려놓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모든 부분들이 완벽하게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느끼십니다. 그분은 조립된 시계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모든 부분들은 조화 가운데 일하십니다. 그분의 은혜도 다른 모든 속성들과 완전히 조화를 이룹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그분의 은혜가 그분의 선하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분의 선하심이 인간의 죄에 맞설 때 나타나는 것이 자비이고, 그분의 선하심이 인간의 결함에 맞서는 것이 은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분의 은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은혜가 그곳에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은혜를 부각시킬 만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오염되었을 때 그분의 은혜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나타났습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은 ‘훨씬 더’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은혜에도 ‘훨씬 더’라는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지금보다 덜 은혜로우셨던 적이 없었고, 그분이 지금보다 더 은혜로우신 경우도 앞으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분의 은혜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분의 이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특히 우리의 삶 속에서 그렇습니다. 즉, 그분의 거룩함에 비추어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깨달을 때 그분의 은혜가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恩惠)

 

우리가 왜곡된 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마음에 격려를 줄 수 있는 은혜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1)성경 전체에 스며 있는 은혜(恩惠)

 

은혜는 하나님의 선한 기쁨입니다. 은혜란 전에 호의(好意)를 얻지 못하던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런 값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불변의 은혜입니다. 그분의 은혜는 다른 것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은혜와 호의는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단어로 나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은혜’라는 단어와 ‘호의’라는 단어가 따로 나오지만, 원어 성경을 보면 이 두 단어가 동일한 원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라는 원어는 ‘카리스’라고 합니다.

 

신약에 나오는 은혜에 대한 언급은 구약보다 3배 많지만, 구약에 나오는 자비에 대한 언급은 신약보다 4배 더 많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구약이나 신약에서 떼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은혜는 인류를 상대하시는 그분의 행동과 관련된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2)은혜의 유일한 통로(通路)

 

은혜와 관련된 두 번째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유일한 통로시라는 것입니다.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우리가 이 말씀을 잘못 읽어서 끔찍한 오해의 늪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 왔다고 하니, 모세는 율법만 알았고 그리스도는 은혜만을 아신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은혜를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모세의 시대에도 은혜가 있고, 그리스도의 때에도 율법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에 태어나셨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구약에 최초로 등장하는 ‘은혜’라는 단어가 노아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십계명이 주어진 후에도 은혜가 일했고, 십계명이 주어지기 이전 노아 시대 이전에도 은혜는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밀물과 썰물처럼 왔다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율법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왔다는 선언은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은혜와 진리가 왔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탄생 이전에도 은혜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기 예수, 그리스도 예수, 죽임당한 어린양, 부활하신 어린양이 이 세상에 은혜를 가져오셨다면 마리아의 아기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 전에는 은혜가 없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처음부터 일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죽이지 않으신 것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는 이와 같이 처음부터 있었고, 그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늘 있어 왔습니다. 은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은 맞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비로소 온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 처음부터 은혜는 늘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은혜는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다윗으로 말미암아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도 역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쁨의 노래를 부른 사람이었지만 죄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도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은혜는 바울을 통해서도 올 수 없었습니다. 때로 사람들이 바울이라는 사람을 신(神)이나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격상시킬 것 같은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바울이야말로 그런 짓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그가 제일 먼저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중 그 누구를 통해서도 은혜를 주실 수 없었습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습니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은혜란 있을 수 없습니다.

 

3)하나님의 통치적(統治的) 은혜(governmental grace)

 

이 은혜 때문에 하나님은 죄에 물든 사람들이 교만에 빠져도 즉시 그들을 멸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그분의 은혜가 일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장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잔인하고 극악한 독재자들이 수백만의 사람을 죽였음에도 당장 그를 죽이지 않으신 것은 그분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죄에 물든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자랑하면서 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은혜의 이런 측면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통치적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은혜 즉, 통치적 은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유익을 얻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선한 호의, 그분의 친절하심, 그분의 선하심, 그분의 오래 참으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구원의 은혜는 아니며, 단지 그분이 죄인을 멸하시지 않도록 막아주는 일을 합니다. 이 은혜를 ‘일반은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4)죄인을 구원하시는 특별한 은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는 특별한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통치적 은혜는 그분이 사람들을 죽이시는 것을 막아주지만, 구원의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이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입니다.

 

5)하나님의 친절하심

 

은혜는 하나님 마음의 친절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인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호의와 성심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언제나 그러십니다. 그분은 늘 동일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어느 방향에서 보든 간에 그분은 동일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우리는 그분 안에서 비열함이나 분개, 악의를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들은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그분은 결코 그렇지 않으십니다. 어떤 날에는 마음씨 곱게 굴다가 그 다음 날에는 고양이처럼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 우리와 다르십니다.

 

사람은 어느 때는 좋았다가도 금방 변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성경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그 누구를 향해서도 악의를 품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처럼 ‘다른 사람 때문에 열 받는 일’이 그분에게는 일어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는 참아주지만 그 이상은 참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이지만, 그분의 성품에는 이런 한계가 전혀 없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가 불법의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천국에서 불법이 용납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들의 거룩하지 못함으로 천국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그분의 거룩함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막으실 것이고, 그분의 은혜는 계속적으로 상황마다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6)무한한 은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살펴 볼 부분은 그분의 은혜가 무한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있는 모든 것들은 무한합니다. ‘무한’이라는 것은 한계나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힘이 듭니다. 하나님에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그분 안에 있는 그 무엇도 창조된 것이 없습니다. 창조된 존재인 인간은 창조되지 않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기술이 발달하여 달나라도 다녀오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경계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온 우주, 온 물잘, 온 피조물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 위 궁창에 앉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 40: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피조 세계는 저울위의 먼지일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어려운 형편과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 시켜 보십시오. 우리의 필요가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그 필요를 채워주고도 남습니다. 그분은 언제난 은혜의 하나님이셨지만, 이 사실은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야 분명히 드러나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는 사람은 넘치는 그분의 선하심과 친절하심에 압도당합니다. 세상의 모든 늪지의 모기가 전부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늘의 모든 별이 죄인이라 할지라도,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하나가 모두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들을 전부 감싸 안을 수 있습니다. 죄가 넘치는 곳에서 은혜는 훨씬 더 넘치기 때문입니다. 내일 저녁부터 태인시찰 연합부흥성회가 열립니다. 금번 성회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은혜를 더욱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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