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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나훔

나 1장 4~6절(강해 2 - 공의의 하나님) - 윤희주

by Preacher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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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1장 4~6

공의의 하나님 [강해 2]

윤희주 목사

신행카페 http://cafe.naver.com/pasu7777/

 

●(4절)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이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셔서 홍해에 이르렀을 때에 밤새도록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동풍으로 바다를 가르시고 그 열풍으로 바다 속 땅을 마른 땅처럼 만드셔서 이스라엘 모두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서풍은 지중해에서 부는 습도가 아주 높은 바람입니다. 그때 홍해 속을 이스라엘 민족도 들어갔고 애굽 군사들도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들어갔고 애굽은 하나님을 시험하며 들어갔다가 갈라진 홍해의 길이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의 길이 되었고 애굽에게는 사망의 길이 되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히 11:29). 똑같은 길이라도 믿음으로 행하면 생명의 길이 되고 의심과 불신으로 행하면 사망의 길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똑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해도, 같은 교회에서 같은 봉사를 해도, 믿음으로 행함과 사람의 눈을 의식하거나 의심으로 행한 봉사의 차이는 엄청나게 다른 것입니다. 마치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그 차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의 한 일생을 통해 결과를 본다면 믿음으로 일생을 산 사람과 의심으로 산 사람의 차이는 실로 놀라울 정도입니다. 믿음으로 산 아브라함은 수천년이 지나도록 온 인류가 신앙의 본으로 삼고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성경에 기록되어 복의 근원이 되었지만 의심과 불순종으로 살았던 당시의 그 유명했던 많은 사람들은 죽고 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한낱 초개같은 인생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악행을 성경에 기록하여 세상 사람들이 절대 따라해서는 안될 악한 인물로 남겨 두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는 홍해같은 바다도 장애물이 되지 못하게 바람을 사용하셔서라도 헤쳐 주시지만 대적하는 자에게는 바람이 도리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어 짐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요단강 역시 홍수로 창일했지만 제사장들의 믿음의 발길이 강물을 가르게 했으며 마른 땅이 되어 건너가게 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애굽 사람은 홍해가 심판의 장소가 되었고 가나안 사람들은 요단강이 심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을 쳤으니 말입니다.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바산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목초지로써 양과 소를 먹이기에 아주 좋은 곳이고 갈멜은 요단 서편에 있는 좋은 목초지였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한번 간섭하시면 목초지의 풀들이 말라 비틀어져 버리고 레바논의 그 무성하고 아름답던 꽃도 단번에 시들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자연을 사용하시는데 우리 인간들에게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최근에도 일본 바다에서 쓰나미가 일어나니 손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지고 죽어 버리는게 인생들이고 지난 달에는 중국 쓰촨성에서 지진이 일어나니 꼼짝 못하고 죽는게 인생들입니다. 인간이 만든 원자폭탄이 무섭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자연을 흔드시면 그 위력 앞에 살아남을 자란 없습니다.

 

●(5절)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 오르는도다.

 

솟아 오른다는 말은 '동요하다, 흔들리다' 는 뜻인데 이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니 그렇게 든든하던 산도 맥없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은 악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호하심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심판의 날에는 지진으로 인해 산들이 무너지고 땅 속의 용암의 분출로 작은 산들이 녹아 버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세상 그 아무 것도 숨거나 피할 수가 없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 오르는도다 다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심판에 해당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에서 제외될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인 것입니다. 반대로 이렇게 크신 권능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도우심의 권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6절)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니느웨 성이 제 아무리 튼튼하다 한들 세상이 무너지는 심판에서는 그갖 작은 성 정도로는 견뎌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그 무시무시한 심판에서도 회개의 힘이 이처럼 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십니다. 이방민족 니느웨의 타락을 그냥 심판해 버리시면 되는데도 요나를 보내셨고 이제는 나훔 선지자까지 보내심은 심판의 위용을 나타내시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임하십니다. 악한 죄가 연속되면 즉시 쳐 버리시면 그만인데도 오래 참으시고 또 참으시면서 돌아오기를 최대한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이 오래이니 사악한 인간은 그것마저도 이용하여 회개는 커녕 하나님은 없다하며 죄악의 길에서 빠져 나올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참 회개는 반드시 행함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말로만, 마음으로만 돌아오는 것은 참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의 열매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돼지우리에 앉아 지난날 아버지에게 잘못했음을 눈물로 용서를 빌었지만 돼지우리에 그냥 눌러 살면 그는 회개한 갓이 아니고 단지 반성한 탕자에 불과함을 꼭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찾아갈 염치는 없어도 담대히 돼지우리를 박차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를 한 것입니다.

 

돌아가면 이제부터는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나간 탕자는 있어도 '돌아온 탕자' 라는 말은 없습니다. '돌아온 아들' 입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니 산들이 녹아지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태양이 빛을 잃는 초자연의 엄청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감히 누가 그 진노를 감당하겠습니까? 여름 장마철에 일주일만 비가 쏟아져도 죽느니 사느니 하는게 인생들인데 바위가 깨어지고 바다가 뒤덮이는 상황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평소에 아무리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오래 오래 참아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한번 심판의 칼을 뽑으시면 온 우주가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장 끝장을 보시려 하시지 않으시고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불신자가 죄의 사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함은 몰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진리를 다 아는 성도라면서 죄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습관화 되어 감각이 없는 정도라면, 오히려 죄의 유혹을 은근히 즐기는 자라면,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더 크게 임하실 것입니다.

 

나훔서 1장 1~6절까지에서는 니느웨가 100년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100년이 지나서는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하십니다. 신앙의 교육이 제대로 후손에게 이어진다면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이 지나도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니느웨는 자손에게 지난날 범죄로 인해 망할 뻔 했던 상황에서 회개로 인해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을 입었던 사실을 바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멸망이라는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만 그런게 아니라 작게는 개인이나 가정에도 적용됨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회개치 않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는 반드시 어려움 가운데 거하다 망할 수 밖에 없음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형제나 이웃이나 자식들에게 올바른 신앙 교육을 함으로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늘 회개하는 삶을 가르쳐 주어야 가정도 살고 국가도 사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늘 승리자가 될 것이고 말씀을 거역하면 늘 실패자가 된다는 사실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사랑과 함께 공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1장 1~6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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