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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누가복음

눅 24장 13-27절(마음에 더디 믿는 자) - 허창수

by Preacher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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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장 13-27

마음에 더디 믿는 자

허창수 목사 17.01.22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서 살아나심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역사적인 사건이며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이러한 큰 의미가 있는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났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해 주었을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글로바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누군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도 아니고 베드로나 요한도 아닌 별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먼 외국에 가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돌아오면 누구를 먼저 만납니까?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가족들을 제일 먼저 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나 가족들 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난다면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병들어 곧 죽게 되었다든지 어떤 위급한 상황이라면 그를 먼저 만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덤까지 찾아온 사랑하는 마리아나 제자들보다도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을 먼저 만나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25)이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믿지 못하는 자라고 꾸짖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뿌리를 둔 믿음은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있는 것을 몰라서 없다고 생각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못 믿을 것을 믿는 것도 불행이지만, 그보다 더 큰 불행은 믿을 수 있는 것을 못 믿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할렐루야’ 만세를 부르며 기뻐해야 할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하고 슬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께서 잡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셨습니다. 살아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몇 사람이 가서 보고 천사로부터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는데 왜 슬퍼하며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이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된 일을 혼자만 모르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라’(19)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20)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기대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1)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예수가 자신들의 구세주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능력있는 선지자가 그 능력을 발휘하여 악의 세력에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속량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속량자’란 당시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죄악으로부터의 구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체로 로마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이기를 바랬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오랫동안 들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양자의 의미를 함축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신들의 기대가 무산된 것을 안타가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22,23)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의 말만으로는 믿지 못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가서 확인하였는데 그들 역시 ‘예수를 보지 못하였다’(24)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의 신앙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부활을 듣고도 믿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만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놀랄 일도 없을 것이며 슬픈 기색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살아나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이러한 말을 하는 불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문제는 ‘눈이 가리어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16)는 것입니다. 영적 무지입니다. 영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만큼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믿는 것만큼 압니다. 믿음이 없으면 지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보이는 게 없습니다. 나쁜 생각으로 보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보면 만사가 의심스럽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여건에서도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여건과 현실 앞에서도 절망하고 실의에 빠지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의 유무가 문제요, 어떤 질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못 믿을 것을 믿는 것도 불행이지만 그보다 더 큰 불행은 믿을 사람을 못 믿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기뻐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치듯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를 죽인 자들이 자신들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도망치듯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이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랐던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가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일 먼저 만나서 이들의 잘 못된 믿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럼 이들이 선지자의 모든 말을 더디 믿은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찍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을 알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난에 대한 예언만이라도 이해했었더라면 올바른 메시야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난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고난을 겪고 난 뒤에 얻게 될 영광이며, 그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예수님이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과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잘못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미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기대에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기대가 바르지 못하면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의가 굽은 것으로 보입니다.

 

돈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소유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짓도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압니다. 권력에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사생결단으로 권력만을 잡으려고 합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의 목적이 비뚤어진 사람은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 못하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실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용기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자신의 불의한 일로 감옥에 갇힌 것도 아닙니다. 불의한 헤롯 왕을 책망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옥에 갇힌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면 찾아오셔서 옥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메시야라면 자신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는 것도 아실 것이요, 아신다면 와서 옥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기대한 대로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니까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라고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 답지 않은 말을 하였습니다. 한심스러운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므로 예수님에 대한 의심을 하고 실망을 하는 세례 요한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25)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자기중심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매일 같이 성경을 읽고 외웁니다.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배우지만 그들의 메시야관이 자기들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메시야를 보고서도 메시야인줄 몰랐습니다.

 

메시야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경을 십자가를 중심으로 읽거나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 부활 중심으로 읽고 배워야 하는 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빗나간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모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도 이해를 못했을 뿐 아니라 살아나셨다고 해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슬퍼하며 낙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웁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에서 읽고 배우고 듣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내가 남을 어떻게 사랑할까?’를 생각하지 않고 ‘남이 나를 사랑하나 안 하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저 사람이 사랑하지 않나’, ‘용서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 사람이 용서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신앙은 모두가 실망이요 낙심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달려가서 무덤이 비었다는 것도 확인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천사가 살아나셨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됐지, 엠마오로 가기는 왜 갑니까? 행여나 자신들이 잡혀가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피신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이들을 만나주시고 이들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32절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33절에 보니 마음이 뜨거워질 때에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전해주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망하고 옛날로 되돌아가는 제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실망의 이유는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믿음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낙심하고 옛날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을 먼저 만나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자기중심의 믿음에서 성경중심의 믿음으로 돌아서도록 해 주셨습니다. 낙심과 절망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생명의 길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오도록 하셨습니다.

 

생명의 길로 되돌아서는 것은 환경이 달라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령이 내 마음을 뜨겁게 할 때에 절망에서 소망으로, 불의에서 생명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고 부활 신앙으로 회복하게 되는 그 순간에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더디 믿는 미련한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며 영광 돌리어야 할 일을 실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고 말씀대로 믿고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축복으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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