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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누가복음

눅 24장 13-17절, 30-35절(잃어버린 사명을 되찾자!) - 신만교

by Preacher 2023.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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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장 13-17, 30-35

잃어버린 사명을 되찾자!

신만교 2016.04.10

화평성결교회 [의정부시] http://whttp://www.hpehc.org

 

본문내용

 

(눅 2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 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기념일인 오늘 아침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성도여러분에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오후에, 두 제자가 실의에 빠진 가운데 고향으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예루살렘에서 약 12km쯤 되는 엠마오라는 마을입니다. 두 제자는 십자가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실망과 슬픔에 젖어 얘기를 나눕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께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실 줄은 몰랐다네.” “누가 아니래나. 우리는 예수님이 이 민족을 구할 구세주가 될 줄 알았지.” “어서 발길을 재촉하세. 저들이 우리 제자들을 잡아 죽이려 할 걸세.” 아직 십자가의 충격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때입니다. 낯선 길손 한 사람이 나타나 두 제자와 동행을 했습니다. 이 나그네는 두 제자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의 발길은 엠마오 마음에 다 달았고 날은 저물었습니다. 두 제자가 낯선 길손에게 함께 들어 하자고 강권해서 함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었고 길손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이 소리쳤습니다. “아니 예수님 아니십니까?” 앞에 계신 분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셨습니다.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부활하셨구나. 여인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하더니 사실이구나. 여보게,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세나.”

 

불안과 공포에 쌓여 엠마오로 내려갔던 두 제자는 기쁨과 감격을 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두 제자가 부활의 주를 만남으로 놀라운 변화가 잃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부활의 주를 만나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를 만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믿음의 눈, 영안이 밝아집니다.

 

두 제자는 처음에, 낯선 길손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어두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영안이 가리어져 있으면 예수님이 옆에 찾아와도 모릅니다. 눈 먼 소경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의 눈이 언제 떠졌지요?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며, 떼어 주실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예수이신 줄을 알게 됐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에 제자들의 영안이 밝아졌습니다. 이게 시력이 좋아졌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우리의 영안도 이렇게 밝아져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여러분의 영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는가?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안이고 믿음의 눈을 가리킵니다. 세 가지 눈이 있습니다. 영안이 있고 지안이 있고 육안이 있습니다. 이 영안이 열려야 영적세계를 봅니다.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지안은 지식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육안은 물질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미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영안을 열어주심을 감사 찬양합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보아서 믿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육안으로 보았는가? 못 보았지요. 그런데도 어떻게 믿는가? 여기 그 대답이 있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나 사랑하고 있으며,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서 예수님이 믿게 된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복 받으셨습니다. 누가 복이 있는가?

 

(요 20:29)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옆에 분에게) “복 받으셨습니다.” 실제 영안이 닫혀 있으면 옆에 예수님이 와계셔도 모릅니다. 영안이 어두우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넘어가지 않으려면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사울도 영안이 열리기 전에는 교회를 파괴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행 9:5). 사울이 다메섹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영안이 열렸습니다.

 

(행 9:17)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그때부터 영안이 떠지고 믿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또한 영적 세계가 열리고 진리의 세계가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박해자 사울이 바울이 되어 담대하게 진리의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박해자 사울의 눈을 열어주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눈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도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에 영안이 밝히 열렸습니다. 천국이 보이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외쳤습니다.

 

(행 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여러분의 영안도 이렇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영안이 열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영안이 밝히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연약했던 믿음이 살아납니다.

 

엠마오로 가던 이 두 제자는 두 번씩이나 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슬픔과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부활 소식을 듣고도 왜 그리 슬픔 가운데 있는가? 왜 낙향하여 내려가고 있는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이란 말을 처음 들었는가.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 적어도 3차례 이상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너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의에 빠져 낙향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쉬운 성경 번역입니다.

 

(히 4:2)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말씀이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던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이 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이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발부하신 약속어음과 같습니다. 믿고 사용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믿으면 변화가 따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약속어음을 믿지 않으면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을 때, 낙심과 슬픈 빛을 띠고 내려가는 인생을 살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죽었던 믿음이 살아나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믿음이 회복 됩니다. 죽었던 믿음이 살아날 줄 믿습니다. 이 제자들을 보십시오. 낙심 가운데 슬픈 빛을 띠고 가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믿음이 살아났습니다. 심령이 살아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믿음이 살아납니다. 냉냉 했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이 시간 부활의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이 살아나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이 허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모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연약한 제자들이 어떻게 담대한 제자들이 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갑자기 예수를 증거 하게 되었을까요? 부활을 목숨 걸고 증거 했습니다. 그 어떤 박해도, 감옥도,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여러분, 대답해 보십시오. 그 동력이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죽음까지도 이기게 하는 그 무언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예수 부활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연약한 믿음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변화가 우리의 변화가 될 줄 믿습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의복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그리 항상 있느냐고요” 그때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하지만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어요. 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저는 제게 고난이 다가 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 사흘 후에는 부활의 새벽이 오리라’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에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노인이 누리는 행복의 근원은 바로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옆에 분에게) “우리도 사흘만 기다려요. 사흘 후에는 부활의 새벽이 옵니다.” 부활 신앙으로 여러분의 연약한 믿음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잃어버렸던 사명을 되찾게 됩니다.

 

제자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허나 십자가의 고난 앞에 사명은커녕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를 보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담대해졌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 돌아갔습니다. 무섭고 두려웠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 공동체에 합류했습니다.

 

(눅 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제자로서 있어야 할 자리, 사명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혹시 사명의 자리를 떠나 있는가? 아직도 제자들처럼 엠마오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가? 어서 사명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장로의 자리, 권사는 권사의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 값을 해야지요.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자리 값을 못하고 사명을 잃어버리면 버림을 당합니다. 왜 그렇게 사세요? 환경, 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누구든지 사명을 찾게 됩니다. 환경, 여건을 따진다면 제자들이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 모두가 사명을 되찾게 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 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제일 큰 사명, 바로 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입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복음으로 열방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입니다. 과거에는 제자들처럼 온통 관심이 ‘물고기’에 있었습니다. 고기 때문에 웃고 고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깨닫고는 관심의 초점이 ‘영혼’이 됐습니다. 이제부터 낚아야 할 대상은 ‘고기’가 아니라, ‘영혼구원’입니다. 어떻게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주님은 여러분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산다 할지라도 현재의 일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른 태도로, 다른 자세로’ 일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일터가 전도 현장이 되면 됩니다. 그곳이 바로 주님이 보내신 선교지입니다.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도 대상자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직장과 생업의 현장에서 일할 때 전도자의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겸손하고 친절해야 합니다. 대로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하러 나가서는 싸우는 사람을 보았는가? 이것이 사명으로 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명을 되찾기를 고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잃어버렸던 사명을 찾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체포하라는 네로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베드로가 급히 로마를 벗어나기 위하여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를 지나쳐 로마로 가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깜짝 놀라 보니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베드로가 너무 놀라서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버린 사명의 십자가를 내가 지기 위해 로마로 가고 있다.” 그 말에 베드로가 회개하고 발걸음을 돌려 박해가 극심한 로마로 다시 돌아가서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영광스런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영이 살아나고 믿음이 회복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사명을 되찾아, 남은 생애를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위해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대사들입니다.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영혼의 찬양 50장 ‘파송의 노래’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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