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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역대하

대하 12장 1-8절(강하고 견고할 때) - 안효관

by Preacher 202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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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2장 1-8

강하고 견고할 때

안효관 목사 2015-03-01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남 유다 제10대 왕인 웃시야는 열여섯 살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 남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 웃시야는 왕이 된 초기에는 정직하게 통치를 잘 하는 왕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도움을 받아서 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그런 웃시야를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웃시야는 솔로몬 왕 이후 최고의 번영을 누리는 나라로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늘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던 블레셋을 점령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암몬으로부터는 조공을 받을 정도로 그 힘이 막강해졌습니다. 웃시야는 농사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농사를 짓지 않았던 광야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고, 그 농토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웅덩이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축을 많이 기르고 포도원을 잘 관리하도록 관리원을 두어 정책적으로 지원을 함으로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졌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무기 연구소를 두어 신무기를 개발하여 국방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나라 안팎으로 부강하게 되면서 웃시아의 이름이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웃시야의 모습을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졌다.’(역대하 26:1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이한 도우심을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웃시아를 도와주셨다는 뜻입니다. 웃시야가 나라를 잘 통치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런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역대하 26: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말씀드린 것처럼 웃시야가 그렇게 강성해지고 그의 나라가 부강해진 것은 결코 웃시야 자신의 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통치를 잘해도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그의 나라는 어려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웃시야가 부강해졌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이 도우셨다.’ ‘기이한 도우심을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시야는 강성해지자 그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교만입니까? 어떤 것이 교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웃시야가 교만해짐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이 해야 하는 분향을 자신이 한 것입니다. 왕은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라를 통치하면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할까를 고민하며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분향하고 제사하는 것은 제사장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웃시야는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하려 한 것입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용맹한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가서 웃시야가 분향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막으려는 제사장들을 향해 화를 내는 순간 웃시야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웃시야 왕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나라를 잘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려는 것도 교만입니다. 웃시야가 겸손할 때에는 나라를 통치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해서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했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기를 개발하고 군사력을 갖추어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왕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왕으로서 겸손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셨고, 그래서 그의 나라는 강성해졌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을 하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벌을 받아 나병에 걸려 비참하게 그의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한결같은 마음을 갖고 산다면 참 좋을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입니다. 가진 것 없을 때에는 겸손했습니다. 남들에게 내세울 것 없을 때에는 유세를 떨지 않았습니다. 성공하지 않았을 때에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가지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달라집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서 겸손은 사라지고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못된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그 사람 변했네.’라는 말을 듣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들이 사라지고 자꾸만 내 안에서 교만한 마음이 나를 사로잡고 있고, 예전과는 달리 자꾸만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있지 않는지 말입니다. 특별히 지금 내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생각된다면 더더욱 우리 마음을 조심스럽게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웃시야와 같은 또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 왕입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르호보암 왕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역대하 10장에 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세금을 감면시켜 주고, 노역을 줄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실 솔로몬 왕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달프게 노역해야 했습니다. 솔로몬 왕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짓는 일에 많이 동원되었습니다. 성을 짓기 위해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고, 성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세금을 많이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피곤했고, 그들의 삶은 궁핍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에게 탄원을 한 것입니다. ‘제발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 왕은 백성들의 탄식섞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르호보암을 배신하고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르호보암 왕을 배신하고 여로보암을 따라간 지파가 무려 10개나 되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이 르호보암에게 남고, 나머지 10개 지파가 모두 르호보암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둘로 쪼개졌을 뿐만 아니라, 르호보암의 남 유다는 작은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아픔과 위기를 겪으면서 르호보암은 아마도 생각한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11:1절 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10개 지파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배신을 하자 군사들을 모아 배신한 북 이스라엘과 싸우러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마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북 이스라엘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나라를 쪼개어 간 여로보암과 북 이스라엘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까 르호보암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싸움을 멈추고 북 이스라엘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런 르호보암과 남 유다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불과 3년 만에 남 유다는 튼튼한 나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1:17절에 보면, 나라가 분열을 겪은 지 불과 3년 만에 유다는 더욱 강성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성한 이유를 ‘그 3년 동안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길’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다는 뜻입니다. 르호보암은 나라가 쪼개지고 10개 지파가 떠나간 아픔을 겪은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의 나라를 강성케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한 북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열망에 남 유다, 르호보암의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의 남 유다는 불과 두 지파만 남았지만 10개 지파인 북이스라엘 못지 않게 강성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나라가 쪼개지는 아픔을 겪은 지 불과 3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르호보암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시작한 시점을 본문 1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강해졌을 때 르호보암이 교만해졌다는 말입니다.

 

교만해진 르호보암은 지난 3년 동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그 믿음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북 이스라엘처럼 되어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크나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런 죄악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르호보암이 왕이 된 지 5년 째 되던 해에 애굽 왕 시삭이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은 왕이 된 후 3년 동안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견고해지고 강해지자 르호보암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지 5년 째 되던 해에 애굽의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이 교만해진 시점과 애굽의 침략을 받게 된 시점과는 2년간의 시차가 있습니다. 그 2년 동안에 두 가지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르호보암의 마음이 점점 교만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던 마음에서 한 순간에 교만한 마음으로 180도 확 바뀌진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2년 여간의 기간 동안 르호보암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백성들 또한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2년의 기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일은 마음이 바뀌어가는 르호보암의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르호보암에게 경고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실 때에는 반드시 먼저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시는 방법은 대부분 선지자들을 통해서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죄를 알게 하십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회개할 시간과 기회를 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 머물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징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를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에게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마음이 점점 교만해져갈 때 선지자들을 통해서 르호보암을 깨닫게 하셨을 것입니다. 교만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서 깨닫지 못하자 결국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을 사용하셨습니다. 강대국 애굽의 침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한 순간에 확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무언가에 영향을 받든 사람의 마음이 바뀔 때에는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변질되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깨닫도록 역사하십니다. 깨닫게 하시는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우쳐주십니다. 때로는 여러 번에 걸쳐 말씀으로 경고를 해 주십니다. 변질되어가는 모습에서 돌아서도록 말입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빠져나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깨닫도록 말씀해 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채찍으로 징벌하십니다. 그래야만 정신을 차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르호보암이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교만하여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을 들어 남 유다를 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한 애굽의 군대는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병거가 1,200대요 마병이 6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역대하 1장에 보면, 솔로몬 왕 때에 솔로몬에게 병거가 천사백 대가 있었고, 마병이 만이천 명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리던 때였고, 가장 부강하던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눠지기 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할 때 병거가 천사백 대였고 마병이 만이천 명이었다면,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략하기 위해서 데리고 온 ‘병거 천이백 대와 마병 6만 명’이란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애굽의 군대에는 리비아와 숙과 구스에서 징집된 용병들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르호보암의 남유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어마어마한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침공해왔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군대는 남 유다의 성읍들을 다 점령하고 이제 예루살렘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서야 르호보암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비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겸비하다’는 말은 ‘무릎을 꿇다, 엎드리다’는 뜻입니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 때에야 르호보암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겸비한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의 그런 겸비함을 어여삐 보셨습니다. 그래서 애굽 군대의 손에서 르호보암을 건져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자세히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7절에 기록되어 있는 ‘조금’이라는 단어입니다. 르호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겸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유다를 ‘조금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을 뒤집어 읽으면 애굽의 군대로 인해서 유다에 많은 피해와 고통이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남 유다를 멸망시키진 않으시겠지만, 남 유다는 애굽의 군대로 인해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어 나오는 9절 이하의 말씀에 의하면, 애굽왕 시삭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는 나라를 멸망시키진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보물과 무기를 다 빼앗아갔습니다. 성전에 있던 것들과 왕궁에 있던 것들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가져갔습니다. 역대하 9:15-16절의 기록에 의하면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는 큰 것이 200개였고, 작은 것이 300개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금값으로 계산해보니 약 천억 원어치나 됩니다. 그것만 가져간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때부터 쌓아놓았던 그 많은 다른 보물들까지도 다 빼앗겼습니다. 아마도 그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전쟁을 치루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습니까? 무너진 성읍들, 죽어간 사람들, 빼앗긴 금은보석들, 그 모든 피해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게 다 르호보암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버린 죄악 때문입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니 견고하고 강성해질 때 선지자들이 외친 말씀을 듣고 돌이키기라도 했다면 그런 피해,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버린 죄의 대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제외해 놓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의 사람들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내 삶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피해와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에 따라 다 징벌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내리셨다면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이 ‘조금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풍성히 베풀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에게 늘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데 우리의 삶이 늘 풍성하게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좋은 것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삶에는 좋은 것을 별로 누리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여전히 궁핍하고 초라하게 살아가곤 합니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 죄가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할 풍성함을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5: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며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것들로 채워주시는데, 우리의 죄와 허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좋은 것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진 이유가 우리에게 아직도 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모습들, 아직도 죄의 습관이나 습성들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좇아가는 모습들, 세상적인 것을 움켜쥐기 위해서 세상을 사모하는 모습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내 삶에 많은 복을 주셨을 때에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는 말씀처럼, 형통할 때가 내 삶에 더 큰 위기의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내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위기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될 때 우리의 신앙이 넘어질 위기일 수 있습니다.

 

어제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1930년부터 시작되어 85년의 역사를 가진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가장 큰 이변을 낳은 경기는 아마도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때 미국과 잉글랜드와의 경기라고 합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으로서 지역 예선을 치루지 않고 월드컵에 자동 출전할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당시에도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반면 미국은 거의 아마추어들로 이루어진 팀이었습니다. 선수들이 대부분 기혼자였고, 주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주말에만 모여서 축구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선전에서 그런 미국과 우승후보인 잉글랜드가 만났는데, 결과는 미국의 1:0 승리였습니다. 미국은 그 경에서 슈팅을 단 한 번 밖에 하지 못했는데 그게 골로 연결되었고, 잉글랜드는 무려 20차례나 슈팅을 날렸는데도 한 골도 넣지 못했습니다. 잉글랜드가 그렇게 많은 슈팅을 날렸는데도 단 한 골도 넣지 못한 이유는 미국의 골키퍼였던 프랭크 보기(Frank Borghi, 1925-2015)라는 선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의 소나기 골을 모두 막아낸 프랭크 보기는 축구영웅이 되었고, 55년이 지난 2005년에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프랭크 보기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공을 막는 몇몇 장면은 미화되었더군요.”

 

여러분,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 보여지기를 원합니다. 비록 영화이지만 자신이 미화되어 표현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프랭크 보기는 자신을 영웅처럼 그려진 영화가 못마땅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축구역사에서 최고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90세의 나이인 올해 2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자신이 미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신앙인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결코 미화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물며 우리 스스로 높아지려해서야 되겠습니까? 견고하고 강할 때, 형통하고 성공할 때, 그 때가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일이 잘 풀리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질 때, 그 때가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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