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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역대하

대하 19장 4-7절(신앙인의 멋)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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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9장 4-7

신앙인의 멋

안효관 목사 2019-01-13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 직을 네 번이나 연임한 사람이 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입니다. 당시 미국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관행으로 세운 ‘3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루스벨트 대통령은 4선까지 성공하며, 미국 경제대공황을 뉴딜정책으로 극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민적인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가 63세에 뇌출혈로 사망했을 때 미국 언론들은 ‘미국인들이 링컨 대통령 암살 이후 가장 큰 슬픔에 빠졌다.’고 보도할 정도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렇게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어느 날 한 주간지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이 형편없는 술주정뱅이라는 거짓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루스벨트는 비서관을 불러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비서관은 ‘당장 잡지사 사장과 기자를 불러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루스벨트는 그건 권력남용이라고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식으로 법원에 고소를 하세. 그리고 명예 훼손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겠네.” 비서관은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대통령 지시를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에 대해서 재판이 열리게 되었고, 재판이 있던 날 많은 방청객들이 법정을 가득 메웠습니다. 대통령의 명예에 관한 예민한 사안인 만큼 판사는 신중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심문하고 이를 종합하여 배심원들과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귀 잡지사의 기사는 허위로 판명이 내려졌으며 개인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 인정 되는 바 귀사는 대통령에게 손해배상을 지불하시오.” 판결이 내려지자 사람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제 그 잡지사는 문을 닫게 생겼다고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졌으니 배상금이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때 판사의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대통령이 요구한 손해배상금은 1달러입니다. 1달러를 대통령에게 지불하시오.” 그 판결에 방청석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비서관이 루스벨트에서 물었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대가가 고작 1달러란 말입니까?” 루스벨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내게 손해배상금은 의미가 없다네. 중요한 것은 진실이야. 그리고 그 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법부의 재판이지. 이제 진실이 밝혀졌으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네.”

 

여러분, 아마 다른 나라 같았으면 대통령의 명예를 모독하여 재판에 졌다면 그 배상금액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린 것처럼 그 신문사는 문을 닫아 망했을 것이고, 수많은 신문사 직원들은 직장을 잃고 실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지켜지고 진실이 밝혀진 이상 돈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록 몸은 소아마비로 불편을 겪었지만, 4선 대통령을 하기에 충분한 마음과 인격을 가진 루스벨트 대통령의 멋입니다.

 

멋이라는 것은 향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라고 어찌 허물이나 실수가 없었겠습니까? 네 번이나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 어찌 잘못 판단한 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인격과 삶에서 풍겨 나오는 그런 멋이 그의 실수와 허물을 덮고 후대에까지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과 인격에서는 어떤 향기나 나고 있습니까? 내 삶과 인격에 어떤 멋이 깃들여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구원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언어에서, 우리의 인격에서, 우리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인격과 언어와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고 있습니까? 향기는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고, 빛깔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냄새를 통해서 주변에 아름다움을 흩날리고 상쾌함을 줍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농축되어 거하시기에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저는 향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만,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향수가 사넬이고, 사넬 중에서도 넘버 5가 세계 여성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은 클래식한 향수라고 합니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30초에 한 병에 팔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향수입니다. 사넬 넘버 5가 그렇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 향수를 만드는데 재스민, 장미, 바이올렛 등 약 83가지의 재료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 향수 25g을 만들기 위해서 들어가는 장미 꽃잎의 양이 무려 45kg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장미가 들어가 농축되고 농축되어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향수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향수의 향기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료에 정성과 노력이 합해져서 사랑받는 향수가 만들어지고, 그래서 그 향수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세상 속에서 향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도 그만큼 신앙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른 신앙의 인격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향기가 나도록 절제하고 노력해야 말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과 인격에서 곧바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격을 내 삶에 녹이고 녹여 내 삶에 농축액으로 가득 채워질 때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사밧 왕도 그의 삶에서 향기가 나는 왕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물론 여호사밧 왕이 실수나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향기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역대하 19:1-3절에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 왕을 책망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사밧 왕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호사밧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진실되이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이방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의 나라인 유다를 견고하게 하셨습니다.(역대하 17:5)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에게 복을 주셔서 나라가 견고하고 부귀와 영광을 누리고 있을 때 여호사밧이 북 이스라엘의 아합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게 됩니다. 아합 왕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킨 것입니다. 사돈 관계가 된 여호사밧이 아합 왕을 찾아갔을 때 아합 왕이 여호사밧을 꾀어 아람이 점령하고 있는 길르앗 라못을 빼앗기 위해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람과 전쟁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아합 왕은 거짓 선지자들을 내세워 여호사밧을 전쟁터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아합 왕은 적군에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되고, 왕복을 입고 전쟁터에 나갔던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을 구하여 유다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역대하 19:1절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의 궁으로 들어가니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평안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표현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후가 여호사밧을 책망한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을 버린 악한 왕인 아합과 손잡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그 사람과 함께 전쟁에 나갔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 하나님을 버리고 온 백성에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만든 아합과 짝짜꿍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여호사밧도 실수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합 가문과 결혼하여 유다의 역사에 아주 큰 상처를 안긴 엄청나게 큰 실수를 했던 사람이 여호사밧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호사밧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아합의 가문과 결혼관계를 맺고 또 동맹을 맺어 전쟁터에 나갔다가 큰 위기를 겪은 여호사밧이 예후의 책망을 들은 후에 다시금 옛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여호사밧은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 두루 다니며 백성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권면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라는 말은 당시 여호사밧 왕이 통치하고 있던 유다 왕국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영토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번 실수로 혼인관계를 맺었던 북 이스라엘과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아합 왕과 그의 왕비 이세벨이 통치하고 있는 북 이스라엘은 왕비 이세벨의 비호 아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온통 우상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북 이스라엘과 달리 여호사밧이 통치하는 남 유다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여호사밧이 그런 결단을 내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여호사밧 왕이 북 이스라엘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자, 통치 초기에 없앴던 이방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서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 ‘이제는 북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겨도 여호사밧 왕이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그런 틈을 타서 우상의 제단들이 곳곳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 사회적인 우상숭배의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서 여호사밧은 직접 전국을 돌면서 자신은 철저하게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그러니 내가 통치하는 나라에서 우상을 섬기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고 단단하게 경고를 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5-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사밧은 자신이 통치하는 유다 왕국의 성읍들마다에 재판관을 세웠습니다. 이전까지는 주로 성읍에서 재판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그 성읍의 장로들이었습니다. 그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서 그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논의도 하고 결정도 내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전문 재판관을 전국에 파견함으로써 불법을 바로 잡으려 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 역시 여호사밧 왕이 북 이스라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희석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이전까지는 마을의 중요한 일은 마을의 어른들인 장로들이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을의 장로들이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야합을 한다면 그들 마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이방 우상의 길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생각을 가기고 문제를 풀어 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워 하나님을 섬기는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도록 했던 것입니다. 본문 6절과 7절에서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사밧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친밀하게 지냈다는 것에 대해 예후가 책망한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잠시 실수하여 하나님을 거역한 북 이스라엘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예후가 그 일에 대해서 책망하자 예후의 책망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음성으로 듣고,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도록 그렇게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좋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물론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때로 실수하기도 하고, 때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책망하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고 의기소침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깨우치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인지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빨리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빨리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사밧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교계에도 부끄러운 모습들이 많이 있어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해 언론에 보도되면서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목사가 성도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인천의 한 교회에서는 젊은 목사가 자신이 지도하던 미년성년자를 포함하여 10-20대의 여학생 여러 명에게 결혼하겠다는 것을 미끼로 성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한두 명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 피해자만도 스무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흔히 그루밍 성폭력이라고 말하는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에게 호감을 얻어 돈독한 관계를 맺은 후에 성폭력을 저지르는’ 전형적인 그루밍 성폭력을 일삼았습니다. 그런 우월적 지위와 목사라는 직임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른 것도 개탄스러운 일인데, 제 마음속에 더 안타까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피해자들이 상처 입은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나와서 폭로하는데도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젊은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인 그의 아버지도 아들의 범죄를 감싸고돌면서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과연 그들을 목사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기꺼이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자신은 잘못이 전혀 없다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울의 대형교회 목사(우리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한 목사)가 70이 넘는 나이에 성추행으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되기도 했습니다. 그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세력이 자신을 무고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성추행 혐의가 드러나자 설교시간에 공개적으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괴변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범죄를 합리화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진짜 멋진 신앙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잘못했노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다윗도 큰 범죄를 저질렀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생각해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왕이라는 힘을 이용해서 남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충성스런 신하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셨고,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존경하는 이유는 다윗은 자신의 죄를 지적받았을 때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철저하게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멋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갖고 사는 삶의 형태나 사고방식을 갖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참 그 사람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남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참 멋진 신앙인이야!’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잘못했을 때에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거는 기대는 일반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치보다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참 멋진 신앙인이야!’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우리가 가져야할 신앙의 자세는 우리는 참으로 연약한 존재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손을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떨어지지 않고 십자가에 고정시켜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살려 하더라도,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손을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고,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지 못하도록 세상의 온갖 것들로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때론 그런 유혹으로 인해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했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반드시 꾸짖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금 바른 신앙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권면하시기 위해서 꾸짖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채찍질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한 양심과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의 꾸중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사밧 왕처럼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점검해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자신이 통치하던 온 나라를 일부러 돌아다니며 오직 하나님만 섬기도록 권면하고 독려한 것처럼, 우리도 바른 신앙 위에 다시 세워지도록 우리 자신을 독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성읍들마다에 재판관을 세워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자신이 통치하는 유다가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온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도록 제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실수할 수는 있습니다. 아니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가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멋진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그의 책 『실패를 딛고 전진하라』(두란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일에서든 실패 혹은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로부터 배우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실패로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실패를 직면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 없고, 실수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패나 실수를 경험합니다. 때로는 엄청나게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실수나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입니다. 배우고 깨달아서 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가 실수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치명적인 큰 실수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수없이 많은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은 그 실수나 실패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치명적인 실수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워 더욱 큰일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실수는 실수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큰 실패는 실패가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실수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때로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우쳐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 그 실수를 빨리 깨닫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면 우리의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성숙해져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이 가지는 멋입니다. 실수하지만 성숙해지는 것, 때론 범죄했을지라도 이후에 더욱 거룩한 삶을 힘써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멋입니다.

 

여러분, 2019년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므로 하나님께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멋진 신앙인이라는 칭찬의 소리를 듣는 신앙인으로 사십시다. 때론 실수하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이 패배한 것이 아니기에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멋진 신앙인으로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는 멋진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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