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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디모데전서

딤전 2장 14절(거룩하게 쓰임 받는 일꾼) - 이준원

by Preacher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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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2장 14-2

거룩하게 쓰임 받는 일꾼

이준원 목사 2014.4.27.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지난 4월 16일부터 지금까지, 한국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사건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무겁습니다. 특히 희생자 대부분이 십대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그렇습니다. 자녀를 수학여행에 보냈는데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거나, 아직도 배 안에 갇혀서 실종 상태인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우리도, 내 아이가 저 침몰한 배 속에 갇혀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는데, 도저히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들은 지금 제정신일 수가 없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이번에 죽었거나 실종된 학생들이 배를 향해 올라가면서 찍은 동영상이 발견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보고 ‘들어가지 마, 들어가지 마!’ 하고 외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날이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배에 올라탄 학생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고등학생들 중 다수가 그날을 마지막으로 죽었거나 아직도 실종 상태입니다. 구조작업이 빨리 제대로 진행되도록, 유가족들과 특히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서 우리는 함께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고, 그때가 갑자기 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면 즉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두려운 일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가 허락해준 인생 동안 무엇을 했느냐? 너는 내가 네게 맡겨준 일들을 얼마나 이루었느냐?” 이 질문들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다면,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미리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을 마감할 때가 다 되어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될 때, 자기가 한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 그것이 더 비참한 일입니다. 그토록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었는데, 정말 최선을 다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성공했는데, 그 모든 인생의 결과가 헛되다고 느껴질 때, 그 모든 성공과 성취가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 그것은 정말로 비참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1. 허무의 극복

 

여러분, 어떻습니까?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이 오기 전인 지금, 자신의 인생을 미리 돌아볼 때, 허무하지 않고 정말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고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정말 내 인생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이었다고 말할 자신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허무를 느끼게 되면, 그것이 우리 삶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길이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허무의 반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허무의 반대가 뭡니까? ‘안 허무’입니다. 말이 좀 웃기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내 인생 가운데 내가 가장 허무하지 않을 때가 언제였는가? 내 삶 가운데 가장 흥분될 때가 언제였는가? 내 속에서 뭔가 살아 있는 감격이 용솟음칠 때가 언제였는가?’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허무가 올 때는 허무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기쁘고 감격스럽고 흥분될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좋은 분위기의 찻집에서 차 한 잔 또는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유명한 휴양지로 여행을 가서 잘 쉴 때도 그럴 수 있습니다. 또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을 가졌을 때,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일을 이루었을 때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가 다 기분 좋은 순간들일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여전히 함께 남아 있는 것은 허무의 그림자입니다. 차나 커피를 다 마시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휴가가 끝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갖고 싶었던 것을 가진 다음, 이루기 원했던 것을 이룬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전히 거기에는 허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뭔가가 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무엇이 된 다음에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법대에 가고 의대에 가고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해서 성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비즈니스맨이 되고 엔지니어가 되는데, 그 다음이 없습니다. 되고 난 다음에 뭘 할 건지가 없어서, 그런 것을 이루고 난 다음 허무에 빠집니다. 그래서 마약에 빠지고, 술에 빠지고,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를 이룬 다음에도 여전히 거기에 허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허무의 그림자가 절대 없는, 허무가 있을 수 없는 순간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우리 자신이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한 인생에는 허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보다 삶 가운데 가치 있고 기쁜 순간은 바로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쓰임 받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쓰임 받는 인생이 그렇게 가치 있고 의미 있고 기쁘기 위해서는, 나를 사용하는 그 대상이 진정한 권위를 지닌 분이어야 합니다. 형편없는 인간에게 쓰임을 받는다고, 거기에 흥분하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쓰시는 그분이 굉장한 권위를 가진 분일 때는, 권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삶의 의미와 가치가 더 커집니다.

 

대통령에게 쓰임 받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동네 반장의 비서가 되는 것과 대통령의 비서가 되는 것은, 같은 ‘비서’라도 차원이 다릅니다. 또 대기업 회장에게 쓰임을 받는 것도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 가서 한 번 해보십시오. “저는 콜럼버스에서 온 OOO입니다. 저를 써주십시오.” 전혀 써줄 리가 없습니다. 계속 귀찮게 하면 사람들이 나와서 쫓아낼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써달라고 해서 써줄 데가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온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용하고 싶다. 이리 와서 내가 네게 맡기는 일을 해다오.”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진짜 권위 중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만이 허무를 이기는 길입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사람에게 쓰임을 받을 때에는 그 끝에 실망이 있고 배신이 있고 결국 허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만이 허무를 이기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높은 분들에게 가서 “저를 좀 써주십시오.” 해서 써줄 사람이 거의 없는데, 아니 하나도 없는데, 놀랍게도 가장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저를 좀 써주십시오.”라고 하면, 우리 하나님은 결코 ‘아, 나는 얘를 정말 쓰기 싫어 죽겠는데 자꾸 써달라고 하며 나를 귀찮게 하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너무 기뻐하시면서 사용해주십니다. 이게 정말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좀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데 하나님이 나를 안 쓰시는 일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면 쓰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결코 허무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고아를 섬기다가 나이가 많아져서 은퇴한 연로하신 장로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절대 허무하지 않습니다. 평생에 조그만 시골 교회를 섬기고 은퇴하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에게서 절대 허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평생 교회 강단을 청소하며 섬겨온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전혀 허무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언어와 문화 등 모든 것이 다른 타국에 가서 수고하고 돌아온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허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 가운데 허무한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2.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 바울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절대 허무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본문이 있는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들이 신약성경에 많은데,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60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로마 감옥에서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곧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 디모데후서 어디를 봐도 허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이 약간 보이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4:6)

 

약간 허무의 기미가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4:7-8)

 

여기 어디에 허무가 있습니까? 인생의 마지막에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인데 어떻게 이렇게 생명력이 넘칠 수가 있습니까? 허무가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이 디모데후서에 꽉 차 있는 핵심, 특히 오늘 우리가 나눈 본문인 2장에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이기에 허무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에게 허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려움은 있을 수 있지만 허무는 없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철학에서 ‘허무주의’라는 말이 영어로 ‘니힐리즘(Nihilism)’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 ‘무에서’라는 말이 라틴어로 ‘엑스 니힐로(ex nihilo)’입니다. ‘무에서부터’라는 뜻입니다.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뭘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때 아무 것이나 하게 하시거나 쓸 데 없는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의미 없는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시키실 때, 당신의 그 창조와 구원의 역사 가운데 있는 일을 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은 다 창조와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잘 몰라서 그렇지,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든가, 교회를 섬기는 일이라든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든가, 상관없이 모두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는 모두 다 창조와 구원의 일이며, 그 모든 일은 다 무에서부터 유를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허무를 이길 수 있는 겁니다.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 인생 구체적으로 쓰임 받는 것이 어떻게 허무를 이길 수 있습니까?

 

‘허무’라는 말은 속이 비어 있고 없다는 뜻입니다. 뭐가 없다는 말입니까? 돈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재미가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허무’라는 말은 무엇이 없다는 말입니까? 바로 가치(value)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허무’는 의미(meaning)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쁘긴 바쁜데 별 가치나 의미가 없으면 허무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기쁨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고 흥분됨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명예이고 가치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와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가치와 명예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돈을 억만 불 벌고, 엄청나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더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의미와 가치와 명예보다 더 나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쓰임 받는 자는 허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를 나쁘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사실 인간은 누구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인정을 받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나쁜 것이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명예를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나타나면 모두들 사인 받자고 할 정도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동체가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내 배우자에게 또 자녀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특히 교회의 성도들이 나를 보면서 인정할 만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순간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됩니다. 삶 가운데 기억하기도 싫고 남에게 말하기도 힘든 비밀,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 순간부터 그토록 힘들었던 일이 오히려 간증이 됩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역과 섬김의 동기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봅니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었던 삶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의미 있게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방황과 방탕 가운데 빠진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는 정말 미칩니다. 70년대나 80년대부터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자녀 교육 때문에 미국에 이민을 왔는데, 오히려 자녀가 잘못되는 겁니다. 처음 이민을 와서 부모는 투잡(two jobs)을 뛰고 쓰리잡(three jobs)을 뛰느라 아이들을 거의 돌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그냥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경찰에게 전화가 옵니다. ‘당신 아들이 마약을 팔다 잡혔으니 오라’고 합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탕하고 방황하는 자녀를 둔 가슴 아픈 고통스런 스토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시작하는 순간, 그렇게 가슴 아파하던 일이 오히려 의미가 있는 일이 됩니다. 자녀가 잘못되니까 부모는 눈물로 기도하며 돌보게 됩니다. 자녀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러한 고통을 통해 간증을 하게 되고, 또 비슷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의미 있는 사역이 됩니다.

 

여러분, 가슴 아픈 이야기는 그냥 놔두면 허무이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순간 가치가 되고 의미가 됩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일도 버릴 게 없습니다. 전부 다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쉽고 평탄하고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힘들고 어려운 것이 반드시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에게 절대 없는 것이 바로 무의미이고 무가치입니다. 쓰임 받는 자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돈이 없고 가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허무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자녀 이야기도 했지만,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겠습니다. 자녀 특히 아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삶의 기초가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인생이 평범하면 괜찮지만, 말하기 부끄러운 그런 삶을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들에게 평생 짐이고 아픔이 됩니다. 그러나 비록 작은 자리라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자 애쓰며 살았다면, 그게 가치이고 의미 아닙니까?

 

하나님께 정말 쓰임 받는 사람은 맡은 일이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삶에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기쁨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순간적인 쾌락이나 만족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에서 오는 흥분됨,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5절)

 

그냥 나 자신을 드리면 됩니다.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로마서 12:1에서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여기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드리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한 번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하여 나의 관심과 나의 시간과 나의 재능과 나의 물질과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다고, 그 주님의 일을 내 삶의 우선순위에 놓기만 하면, 주님께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그릇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주인이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그분은 우리를 쓰시게 되어 있고 우리는 쓰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쓰이지 못했던 것뿐인데, 우리가 다시 쓰임 받겠다고만 하면 그분은 언제나 쓰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쓰임 받겠다고 자신을 드리기만 하면 쓰임을 받게 됩니다. 막을 세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금이든 은이든 나무이든 상관없이, 그분은 우리를 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없이, 쓰임을 받는 자의 의미와 가치와 기쁨은 똑같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되, 우리는 반드시 귀히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크게 쓰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귀히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가룟 유다도 쓰임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유다가 없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 테니, 유다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유다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하게 조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악하게 할 때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유다도 그렇고, 악한 사람들인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김일성도, 또 테러리스트들도 다 쓰임을 받았습니다. 나쁜 쪽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쓰임을 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쓰임을 받되 귀하게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0-21절)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쓰고 싶으셔도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쓰실 수 없습니다. 금이든, 은이든, 나무이든, 질그릇이든, 깨끗해야 사용하십니다. 깨끗함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윤리 도덕적으로 더러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절대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궤변을 늘어놓는데, 안 됩니다. 회개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바람을 피운 사람, 사기를 친 사람, 남의 돈을 떼어먹은 사람, 이런저런 도둑질을 한 사람은 절대로 못 쓰십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쓰임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으로 꽉 찬 사람은 주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새 마음, 새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돈 중심, 자기중심, 인간적 욕심 중심, 사치와 향락과 술 취함과 방탕의 삶을 살고, 외적으로 보이는 것 중심의 삶, 치장하는 삶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바꾸어야 합니다.

 

셋째로, 비뚤어진 마음, 꼬인 심령의 내적 상태는 주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치유를 받고 순수해지고 단정해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교회 안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4절)

 

말 다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6-17절)

 

망령되고 헛된 말이라는 것은, 뒤에서 험담하고 비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이름이 2천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안 좋은 예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23-26절)

 

말다툼 하는 것,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것,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하는 것, 불평불만, 비난, 원망, 비판,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고집스럽게 자기 완고한 것 내세우는 사람을 쓰실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더러운 그릇입니다. 깨끗해야 쓰실 수가 있습니다.

 

[나가는 말]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우리는 이민을 오거나 유학을 와서 살지만 그 영역 안에도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양해도 인생은 결국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 나라의 부분을 담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귀하게 쓰임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쓰임을 받지 못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안 해도 하나님의 뜻을 결국 이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내가 안 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쓰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허무를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믿음생활을 할 때 이런 깨끗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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