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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디모데전서

딤전 4장 1-5절(영적 체험의 판단 기준)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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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4장 1-5

영적 체험의 판단 기준

이삼규 목사 20160110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를 숨기십니다. 설교 하는 사람들은 종종 진리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진리를 가리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마 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분의 비유는 ‘숨겨진 말씀들’이었습니다.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빛을 주었지만, 애굽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주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은 그분의 백성의 마음속에 찬란히 빛나지만, 자만에 빠진 불신자들은 ‘어두운 밤’에 그대로 버려둡니다. 회개하는 마음이 없어도 셰익스피어를 읽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회개, 겸손, 믿음 그리고 순종이 있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증거가 있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증거가 없으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靈)의 영역에서는 이해보다 신앙이 앞섭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합니다. ‘구원하는’ 신앙은 증거를 보고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은 즉시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맡깁니다. 자연인은 절대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옳은 신앙을 갖는 일은 죽은 나사로가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고 무덤에서 살아나오는 것만큼이나 기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의 종교적 지식은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이성(理性)이 주는 지식, 신앙이 주는 지식 그리고 영적 체험이 주는 지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율법이 규정한 성막의 그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 가지 종교적 지식은 성막을 이루고 있는 바깥뜰, 성소 그리고 지성소와 각각 일치합니다.

 

성막에서 가장 깊은 곳은 지성소입니다. 두 번째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외롭게 서 있었는데, 영광의 그룹들이 시은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룹들의 펼쳐진 날개 사이에 ‘하나님의 임재의 불’, 즉 ‘세키나’가 엄위로운 빛을 발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자연의 빛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분의 순수한 빛만이 지성소 안을 비췰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위엄으로 가득한 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이 일 년에 일차 속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무거운 휘장을 사이에 두고 지성소와 분리된 곳이 성소입니다. 성소는 말 그대로 ‘거룩한 곳’이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와는 구별된 곳으로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언제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햇빛과 달빛이 성소 안을 비출 수 없었으며 7개의 금 촛대가 그곳을 비출 뿐이었습니다. 성소와 구별되면서 그 앞에 있는 것이 ‘제사장의 뜰’입니다. 담으로 둘러싸인 제사장의 뜰에는 놋단과 놋대야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지분이나 벽 없이 노출된 장소였기 때문에 자연의 빛이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것이었지만, 예배 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는 차이가 났습니다. 그가 바깥뜰에서 시은좌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가까이 갈수록 그의 ‘신(神) 지식’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 분명해지고 장엄해졌습니다. 마침내 지성소에 이르면 그는 영광의 그룹들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의 펼쳐진 날개 사이에서 발하는 ‘타오른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 지성소, 성소, 그리고 바깥뜰이 본래 그리스도인의 ‘신(神) 지식’의 세 단계를 상징하기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설명의 예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일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신앙의 일들은 믿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 주어진 신적 계시는 인간 정신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자료와 정보를 제공합니다. 신앙의 도움이 없다면 정신은 이 자료와 정보를 혼자 힘으로 찾을 수도 없습니다. 정신은 신앙을 통해 이것을 받아들인 후에 비로소 이것을 가지고 추론하고 연역할 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이 지금 하늘에서 주권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 이런 진리들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증명할 수 없는 이 진리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이것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지식보다 더 순수한 지식이 있습니다. 바로 직접적인 영적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체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인간의 영혼이 ‘좀 더 높은 영적 실재’에 직접 접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영혼은 내세의 능력을 보고 느끼며 맛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지식은 습득되지 않고 체험됩니다. 이것은 조사하고 연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적 진리들을 모아 놓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 지리 구성 요소들로 분해되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런 지식을 누리는 사람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욥 22:21)라는 욥기의 권면이 몸으로 이해되어집니다.

 

경건할수록 영적 위험도 커진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에게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경고하신 때가 이미 우리에게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때를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에는 자만에 빠진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보다 뜨겁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영적인 위협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복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너무나 쉽게 믿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새로운 체험과 깊은 깨달음을 몹시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새롭고 신기한 종교적 현상’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엽니다. 특히 훌륭한 인격과 탁월한 경건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듣는 사람들이 곧잘 여기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구원파,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푹 빠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주님은 뭐라고 경고하셨습니까?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우리가 그들의 정체와 속임수를 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잠언도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잠 1:17)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가르쳐 준 교훈이 무엇입니까?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우리의 판단 기준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새로운 교리, 이 새로운 기독교 현상, 이 새로운 성경 해석 그리고 이 새로운 영적 체험이 하나님, 그리스도, 성경, 나 자신, 다른 그리스도인들, 세상 그리고 죄에 대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판단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우리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들을 확인하여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리나 종교적 현상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이것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라고 묻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위로부터’ 왔는지 ‘아래로부터’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靈)을 판단하는 기준

 

1)하나님과 나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나의 개념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하는 것이 언제나 모든 신앙의 문제를 파악하는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증거 합니까?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우주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유지되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교리와 종교 현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인간의 육신이나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악기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악기는 때로는 성령님에 의해, 때로는 악한 영에 의해, 때로는 인간 자신의 영에 의해 연주되기도 합니다. 누가 연주하든지 우리의 종교적 감정 체험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할 수도 있습니다. 저급한 예배 또는 우상에게 드리는 예배도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 가보면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종교적 체험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는 그들은 마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처럼 사랑과 경외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이방 종교나 무속인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그들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감정적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묻습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즉, “나의 체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기준에 따라 판단해 보면 됩니다.

 

나의 새로운 성경 해석과 나의 새로운 영적 체험으로 내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로 인해 내 눈에 하나님이 더욱 크게 보였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을 보는 눈이 더욱 깨끗해졌다면, ‘감동적이기는 하나 위험한 거짓의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입니다.

 

2)나의 새로운 체험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오늘날 현대의 종교는 그 기준에 따라 그리스도를 다양하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리스도께 주셨습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나서 그리스도에 대해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라고 선포합니다.

 

신약의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다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나시다.”라고 진리를 전하는 데 모든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론이나 모세보다 위대한 분으로 소개되며, 심지어 천사들도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만물의 으뜸이시며(골 1:18),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2:9)”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이요,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참된 교리와 실천과 체험의 중심에 서 계셔야 합니다. 아무리 감동적이고 만족스런 체험이라고 해도 성경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망상일 뿐입니다. 이런 망상을 우리는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얼마 전 서울 한신대학교에서는 채플시간에 어떤 신학생이 기도를 하는데 마지막에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민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은 그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육신적 활동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순전한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짜릿하고 황홀한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체험을 통하여 자기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갔다”(고후 12:2)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서 떠나고, 그들이 자기들의 영성을 입증하기 위해 점점 더 신비적 도취에 의존하게 될 때에는 그 체험이 거짓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반면에 새로운 체험으로 그리스도를 더욱더 의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체험 때문에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갔다면 그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3)그 체험이 성경에 대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다정다감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의 간증이나 열정적인 설교자의 멋진 이야기를 들을 때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증이나 설교에 담긴 내용이 성경의 교훈에 위배된다면, 이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데서 나온 이야기나 결론은 곧바로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 그 교리적 건전성을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그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계시된 진리의 말씀에 어긋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건전성을 증명해 주는 성경 구절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설교와 모든 간증은 ‘최종적인 권위의 말씀’, 즉 성경에 의해 그 건전성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을 사도들보다 초대교회 순교자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만이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조심해야 합니다. 기성교회를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 조심해야 합니다. 새 교리, 새 선생의 영향 그리고 새로운 감정적 체험이 내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싶은 갈망을 불어넣어 준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을 향한 나의 열정이 조금이라도 식는다면, ‘영감 된 말씀’을 먹고 마시기를 원하는 나의 갈망이 약간이라도 줄어든다면, 나는 내가 어디에선가 하나님의 사인(sign)을 잘못 해석했음을 인정하고 다시 하나님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4)그 체험이 나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성령님과 타락한 인간의 자아는 서로 완전히 적대적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서 창조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을 정죄하고 죽이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먼저 우리의 육신적 자아를 그리스도로 바꾸겠다는 우리의 동의를 얻어내셔야 합니다. 이것을 깊게 설명한 것이 로마서 6-8장입니다. 6장과 7장에 묘사된 ‘넓고 자유로운 성령 충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계에서 내 자아는 보좌에서 내려오고 대신 그리스도께서 그 보좌에 오르십니다. 이 진리를 염두에 둘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아에 대한 태도가 어찌하여 그의 종교적 체험의 건전성을 시험하는 좋은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체험을 통해 내가 나를 ‘보잘것없는 천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면 그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체험 때문에 내가 자만에 빠진다면 그것은 나의 자아나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특이한 환상을 보았거나 깊은 영적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내가 우월감과 자만에 빠져든다면 원수의 손아귀에 빠진 것에 대해 즉시 무릎 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5)그 체험이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나름대로 이런저런 영적 체험을 한 후 다른 신자들을 피하면서 그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체험이 다른 사람들의 체험보다 우월하며, 자기가 좀 더 높은 수준의 은혜의 단계에 있으며, 자기 교회의 교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며, 자기 혼자 이스라엘의 참 아들이라고 진짜 믿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잘못된 것은 이런 사실들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사실들에 대한 그의 반응이 육신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뜨거워졌을지 모르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감소시키는 종교적 체험은 ‘가짜 체험’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6)그 체험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은 사도 요한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바로 이런 ‘세상’을 판단 기준으로 우리는 영들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육욕적 즐거움, 불경건한 쾌락 그리고 부와 명예와 죄악으로 가득 찬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세상과 어울리는 것이 어색해집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따라서 “세상과 타협하도록 용인하는 영은 거짓 영이다”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정죄하고 있는 동성애를 교회가 인정하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교회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7)그 체험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은혜는 그들이 죄에서 멀어지고 거룩함에 가까이 가도록 만듭니다.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소극적으로는 불경건과 세상적 정욕을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적극적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진정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삶 속에서 죄를 미워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체험이 죄를 미워하고 거룩함을 더 사모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옳은 것입니다.

 

여러분! 조심해야 합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더욱 풍성한 영적 체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체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일곱 가지 기준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체험이라면 옳은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 성도들이 풍성한 영적 체험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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