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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디모데전서

딤전 4장 11~13절(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 김광일

by Preacher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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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4장 11~13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김광일 목사 2016-01-23

벧엘교회 [서울, 독산동] http://www.kmbethel.or.kr/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서쪽 야산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생을 남을 위해 살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 이 비석의 주인공은 바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선생입니다. 남강은 모진 고생을 하며 오산학교를 세웠는데 학교를 건축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건축하던 일꾼이 찾아와 기와가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집의 기와를 떼어다가 학교를 지어라.” 그는 오산학교를 위하여 재산을 다 팔았으며 나중에는 부엌세간까지 팔았다고 합니다. 남강은 1907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난 후 희생을 앞장서는 생활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암송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철저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오산 학교 변소에 얼어붙은 오물을 교장인 자신이 먼저 도끼로 깨고 청소하는 솔선수범을 보였습니다. 학생들과 교직원에게 청결 관념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겨레를 위하여 걸레질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 남강은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가장 잘 가르칠 수가 있지요?”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즉 첫째는 본을 보이는 것이고, 둘째가 본을 보이는 것이며, 셋째도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녀의 교육을 중요시하였으며, 아울러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을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부일체(師父一體)라고 스승과 부모를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교회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들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교사란 먼저 자신이 성경을 잘 배우고, 다음에 그 배운 것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가르치되 사명감으로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은 영적 지도자로서 주의 일을 하는 디모데에게 ‘믿는 자에게 본(本)이 되라’고 교훈합니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았기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을 포함하여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여기의 ‘본(本)’은 본보기의 준말입니다. 옷을 만들 때, 만들려고 하는 옷을 생각하면서 먼저 종이 위에 그려보고 잘라 내어 본을 뜹니다. 그리고 옷감을 본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재단하여 옷을 만듭니다. 무엇이든지 본이 있어야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본’ 의 원어는 ‘튀포프’ 인데 ‘어떤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식이나 모델’이란 뜻입니다. 교사를 비롯한 가르치는 자들은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말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며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어떤 면에서 본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오직 행실에 있어서

 

북유럽에 사는 흰 담비(ermine)는 흰 털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흰 담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이 속성을 이용해서 흰 담비를 잡는다고 합니다. 흰 담비가 사는 굴 입구에 새까만 숯검정을 칠해 놓고 숲속에서 놀고 있는 흰 담비를 굴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굴 입구에 다다른 흰 담비는 자신의 흰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새까만 숯검정이 묻어 있는 굴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라리 사냥꾼에게 잡히는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안나가) 교인도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교인들의 행실이 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거룩성을 잃어버렸고 그 행실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마땅히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거룩한 행실을 갖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바울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연소함을 행동의 진지함으로 보충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연소함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행동으로 본을 보여서 권위를 지니라는 뜻입니다. 사역자의 권위는 외부적인 치장이나 장식, 그리고 연령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가르침과 거룩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기의 ‘행실’ 은 ‘아나스토로’ 인데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먼저 언행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말과 행실은 실과 바늘 같이 불가분리의 관계로서 양자가 일치되어야 참된 인격이 나타납니다. 말과 행실이 다르면 위선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행이 일치되는 행실은 교사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말이 거룩하지 못하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하면 복음이 제대로 전파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되게 말하고 행실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의로써 행하여 말과 행실이 모순이 없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오직 사랑에 있어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25년 동안 원주민들을 섬기며 헌신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은퇴 후에도 종종 아프리카 밀림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던 중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일날, 선교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죽었습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삼년 후에, 당대의 설교가 헨리 드루먼드(H. Drummond)가 선교지를 찾아가서 원주민들, 특히 리빙스턴과 가까이 지냈던 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이 당신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습니까? 어떤 설교를 들었습니까?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남긴 인상 깊은 교훈은 어떤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원주민들은 전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가르쳐준 성경의 내용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설교 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베푼 사랑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동적으로 읽은 책의 내용도 얼마 후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예배시간 마다 듣는 설교의 내용도 며칠이 못가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은 결코 잊지 못합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만이 오래오래 남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성품으로 타인과 관계된 생활과 연결됩니다. 이 사랑은 말과 행위로 표현됩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요 바울이 강조한 제일의 덕목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을 본받아 영혼을 몸처럼 사랑함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헌신적인 구제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적인 구제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구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혹여 자기 공로를 앞세우는 마음으로 행하는 구제와 희생이라면 사랑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든지, 봉사하는 일이든지, 충성하는 일이든지 사랑으로 행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감당하므로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오직 믿음에 있어서

 

존 와나메이커(Johon Wanamaker)가 51세가 되었을 때 벤자민 해리슨(B. Harrison) 대통령으로부터 체신부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왔습니다. 그러나 와나메이커는 정중하게 사양을 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주일이 되면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습니다. 저는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장관직을 맡게 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지장을 받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해리슨 대통령은 와나메이커에게 주일이 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조건으로 와너메이커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주일이 되면 반드시 섬기는 교회로 가서 아이들에게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본업은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장관직은 부업일 뿐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종신직입니다. 장관직은 임시직일 뿐입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그는 세상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대통령이 맡긴 일보다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믿음은 누구에게나 본이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믿음은 사랑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말과 행실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듯이 믿음과 사랑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 없이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사랑 없이는 믿음의 확신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진실로 믿음이 충만하다면 좋은 지도자로서 성도들 앞에 부끄럼이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버렸습니다. 그토록 연마해 왔던 학문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다 버렸습니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공들여 쌓아왔던 업적도 다 버렸습니다.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철저하게 믿음만 앞세웠습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등반대의 길을 안내하는 티베트 사람들을 ‘셰르파(sherpa)’라고 부릅니다. 셰르파는 길에 익숙합니다. 일기변화와 산세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수없이 산을 오르내린 사람들입니다.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봉 등반에 따른 자신들의 기여가 인정되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생명을 무릅쓰고 히말라야 등반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등반대는 셰르파의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야 등반에 성공합니다.

 

모름지기 가르치는 교사들은 영적 셰르파가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다른 이들을 잘 인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직 거룩한 행실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향하는 믿음으로 본이 되어 모든 이를 살리는 복된 교사들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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