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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디모데전서

딤전 6장 11~19절(너 하나님의 사람아) - 김광일

by Preacher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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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6장 11~19

너 하나님의 사람아

김광일 목사 2017-10-21

벧엘교회 [서울 독산동] http://www.kmbethel.or.kr/

 

위클리프(Wycliffe) 성경 번역자이며, 브라질의 성자라고 불리었던 더그 멜란드(Doug Meland) 선교사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인디언들이 사는 폴리오라는 오지 마을에 들어가 의료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이 부르는 선교사 부부의 호칭이 네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인디언들은 선교사 부부를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칭호에는 자신들의 땅을 강탈하고 괴롭혔던 백인들에 대한 증오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멜란드 부부는 비난을 감수하며 병들어 죽어가는 인디언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들이 ‘존경할 만한 백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멜란드 선교사 부부는 폴리오 인디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10년 만에 인디언 언어를 배워 그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으면 인디언 풍습대로 따라하였습니다. 그러자 인디언들이 그들을 보고 ‘백인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선교사 부부가 무릎을 꿇고 더러워진 인디언 소년의 피 묻은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인디언 추장이 선교사 부부에게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선교사 부부가 인디언들의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이 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멜란드 선교사 부부의 사랑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세상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였던 디모데를 향하여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사람’은 ‘안드로페 데우’라는 원어인데 구약에 보니 모세,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나 사무엘, 엘리야 같은 선지자인 소수의 사람에게 붙였던 칭호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외에는 오직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었던 귀한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에 담겨진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살고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지는 평가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명을 맡겨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요, 그 사람의 모습은 곧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사람입니까? 세상 권력 있는 사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평가 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감격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는 책임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고 과도한 욕망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를 확실히 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에게 친구가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어느 날 토끼 사냥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냥개들이 토끼 잡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 후 사슴 사냥을 떠났습니다. 사슴이 나타났는데도 두 마리의 사냥개는 쫓아가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는 겁니다. 화가 난 알렉산더 대왕은 사냥개 두 마리를 죽여 버렸습니다.

 

얼마 후 사냥개를 주었던 친구를 만나 “토끼 한 마리, 사슴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사냥개를 내게 선물했느냐고?”고 물었더니 친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왕, 그 사냥개는 사자와 호랑이를 잡을 때 쓰도록 훈련된 개들입니다.” 알렉산더 왕은 사자나 호랑이를 잡도록 훈련된 사냥개의 가치를 모르고 토끼를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전혀 다른 싸움에 힘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싸움이 어떤 싸움이며 싸울 대상은 누구입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까? 나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싸움 상대는 악한 영과 그 세력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단과 귀신 즉 악한 영과 싸우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여기의 ‘싸우라’는 ‘아고니주’라는 원어로서 ‘힘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아고니조마이’의 현재 명령형인데 ‘계속해서 싸우며 힘써야 할 것’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앞 구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의 덕목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본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며 신앙의 용장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사수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싸움이 언쟁인 말싸움이라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소극적으로 악한 유혹을 피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싸워야 합니다.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오직 의와 진리를 따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람의 참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강철왕으로 유명한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회장의 사무실에 낡은 나룻배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그림 밑에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 그림은 카네기가 어렵던 청년시절에 집집마다 다니며 물건을 팔던 중에 얻었습니다. 어느 노인 댁에 걸려 있던 그림을 구하여 일생 동안 소중하게 보관했습니다. 그림에 적혀있던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말은 카네기의 생활신조가 되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좌절이 될 때마다 그림에 적힌 글을 보며 “지금은 썰물 때이지만 반드시 밀물 때가 올 거야. 그래!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반드시 성공하게 될 거야”하며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소망을 잃지 않았던 카네기는 결국 세계적 철강회사를 거느리는 재벌 회장이 되었습니다. 소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소망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둔다면 어떤 어려움과 장애가 있어도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내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여기의 ‘소망을 두다’는 ‘엘피케나이’인데 ‘엘피조’의 부정사로서 ‘신뢰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재물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정함이 없고 영원한 구원도 주지 못하는 세상 재물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로 자신의 성곽을 삼고 그 속에서 소망을 느끼려 하지 말고 불성곽이 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물속에서도 건지시고 불 가운데서도 지키시며,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늘 떠나지 않는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영원까지 안전하고 든든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라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자녀들에게 기부교육을 시킵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유대인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양초에 불을 붙이고, 아버지가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양초에 불을 붙일 때면 아이는 미리 받아둔 동전을 기쁜 마음으로 구제 상자에 넣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는 나눔 의식을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기부자들의 절반이 유대인입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누가 최고 갑부이냐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누가 이웃과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베푸느냐에 따라 존경심을 가집니다. 미국의 부동산 재벌 엘리 브로드(Eli Broad) 부부의 말입니다. “큰 재산이라는 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를 지역사회나 국가, 혹은 세계에 돌려줄 수 있다. 누구는 이를 기회라 하고, 누구는 이를 책임이라 하지만, 우리는 이를 특권이라 생각한다.” 넉넉하여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형편에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특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여기의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는 ‘유메타도투스’라는 원어인데 ‘대가 없이 주다, 인색하지 않게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구제나 자선을 거래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배격합니다. 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대가를 바라고 나누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물질적 나눔만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까지 나누려는 태도가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아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축적한 뒤 세상에 환원시켜 수많은 도서관이나 복지 재단을 만든 미국의 부호들은 실로 아름다운 귀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손에 있는 재물을 움켜쥐려고만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손을 펴서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처럼 외모와 신분, 소유로 사람을 구분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힘과 재물을 믿고 교만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 (Papa Francesco)이 쿠바의 아바나 혁명 광장에서 거행된 미사에서 “교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형제자매의 존엄성을 향상시키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인들은 항상 개인의 바람과 욕망, 권력 추구 의지 등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가장 취약한 이웃을 돌봐야 한다. 너희들 중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 섬김은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섬길 뿐, 생각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연한 것을 말했을 뿐인데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는 까닭은 세상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확실하게 본을 보이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몹시 배가 고픈 체하면서 거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조금만 나눠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노숙자 한 사람은 자기가 먹던 피자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적당히 믿고자 하는 유혹을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대충 믿는다면 신앙생활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디 육신의 싸움이 아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움켜쥐기보다는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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