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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로마서

롬 15장 23-33절(바울이 보여준 모범) - 피영민

by Preacher 2023.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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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5장 23-33

바울이 보여준 모범

피영민 목사 2016.10.16.

http://revpee.kjbc.or.kr/

 

서론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주제는 “한 사람을 모델로 삼아 배우고 따라가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만 모범으로 삼고 싶지 불완전한 다른 어떤 사람을 모범으로 삼고 싶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도는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불완전한 개인을 모델로 삼고 따라가다 보면 잘못된 부분을 배우게 될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서로 배우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보통 아버지의 삶을 닮아가게 됩니다. 제 아내도 처음에는 제가 아버지와 다른 것 같다고 하더니 요즘은 아버지와 똑같다는 말을 자주하는 것을 볼 때, 저 역시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은 어머니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위나 며느리를 맞이할 때, 그 사람의 됨됨이도 살펴야겠지만 무엇보다 사돈 될 사람들의 인격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단 사위나 며느리 경우만 아니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보아야 할 경우, 그 부모님을 보면 거의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거의 틀림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의 모범을 배우고 성품과 인격을 닮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어려운 말을 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7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4장 9절에도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고 살아가다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5장 33절에도 그의 모범을 잘 따라가다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오늘 읽은 본문은 성도들이 따라야 할 바울의 모범을 네 가지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성격이기도 하고 삶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지만 바울의 모범도 본받아야 합니다.

 

Ⅰ. 바울의 복음 전도와 선교를 향한 열정

 

바울은 평생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하였는데, 그 때는 이미 사도로서 사역을 한지 30년이 흐른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꽤 나이 많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심신이 약해졌고, 30년 사역을 감당했으니 이제는 조금 쉬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했는지 19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본문의 일루리곤은 유고슬라비아입니다. 바울은 오늘날 터키 지역과 동부 유럽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터키에 성지순례를 가 보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데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하루 온 종일이 걸리는 먼 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좀 쉬겠다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까지 복음을 증거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로마교회 성도들이 헌금을 모아 스페인 선교를 지원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일할 곳이 없을 정도로 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바나, 오늘날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를 선교 거점으로 삼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마치 수리아 안디옥을 본부 삼아 소아시아 선교를 시작했던 것처럼 로마를 본부로 삼아 스페인 선교를 추진하겠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다시 한 번 바울의 계획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여기서 일을 다 마치면 너희를 지나 스페인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실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스페인을 땅 끝으로 생각했던 바울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향한 바울의 열정이 이만큼 뜨거웠습니다.

 

성도들은 마음속에 복음을 향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예수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거룩한 포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천국 갈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가족, 친지, 이웃들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복음 전도와 선교는 공부하거나 토론하거나 조직을 구성한다고 이뤄지지 않습니다. 복음 전도는 사람을 통해 이뤄지는 데, 뜨거운 열정과 의지를 갖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먹고 사느라고 전도 못 한다 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늙어서 못한다고 하면 도대체 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영혼을 구원하겠습니까? 바울이 노년기에도 식을 줄 모르는 전도와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Ⅱ. 다른 교회와 성도들의 실제적 필요에 관심이 많았던 바울

 

바울은 복음 전도에만 모범을 보인 것이 아니라 구제에도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150년 한국 교회 역사 가운데 근본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 여러 차례 갈등과 분열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교단이 분열되는 등 적잖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하나님 말씀만 공부하면 되고, 영혼 구원에 관심을 두고 사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교회가 사회 공의와 정의 실현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사회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도 갈라지고 교단도 갈라지고 성도들도 흩어지는 불상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이 두 가지 문제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올곧게 전하면서도 성도들의 실제적인 곤궁함을 도외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회의 어려움과 성도들의 곤궁함을 돕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도 복음의 발원지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겪고 있는 곤궁함을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5~26절에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을 다녀와야 하기에 로마로 가고 싶어도 지금 당장은 그리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온다고 했다가 오지 않는 바울을 기다렸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부터 돌아보고 가야 하기에 나중에 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에 심각한 기근과 재해로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무너진 교회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교회 안 지켜 주시고 뭐하셨느냐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십자가 종탑이 넘어졌다고 하나님을 힐난합니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해서 피해를 입히지는 않습니다.

 

태풍이 교회라고 봐주고, 절이라고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 뉴질랜드에 엄청난 태풍이 왔을 때, 가장 피해가 컸던 도시의 이름이 ‘크라이스트처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도시가 전체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자연재해가 닥치면 신자와 불신자는 구분되지 않고 피해를 입게 됩니다.

 

둘째, 바울이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극도로 핍박했던 과거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 예수 믿는 자들을 그렇게 잡아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 자신의 무지와 허물로 인해 괴롭게 했던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셋째,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27절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신령한 것(복음)을 받았으니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이방인 교회가 물질로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피력했습니다. 교회는 지역교회, 교파, 교단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이 좀 넉넉한 교회는 어려운 교회를 돌아보고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저희 교회에서 국내 선교로 돕고 있는 교회가 169개이고, 해외 선교는 113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총 282명의 목회자들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도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좀 더 어려운 교회를 돕고, 선교사님들을 지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캐나다, 미국, 호주 등의 교회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고 성장하였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어려웠던 한국 교회에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고, 학교, 병원, 고아원 등을 세워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하셨습니다. 각 교단의 주요 빌딩들 역시 그 분들이 후원을 받아 지은 것들입니다. 혜택을 많이 받고 누렸으며, 그들의 헌신으로 한국교회가 기틀을 잘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선교를 하더라도 이것은 빚을 갚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은 모두 빚 갚는 대표선수로 사역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돌아보고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교회에 빚을 갚아야 할 때입니다.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줘야 합니다. 때 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에 인색하지 않는 것, 바울의 모범을 따르는 길입니다.

 

Ⅲ. 성도를 대할 때 열정적인 사랑과 호의를 보인 바울

 

바울은 성도를 대할 때 항상 좋은 의도를 갖고 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현저하게 두드리지는 점은 바울이 아직 일면식도 없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빨리 만나 교제하고 싶은 뜻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해 진정한 사랑과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23절 후반에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 24절에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과 교제함으로 만족을 얻고 싶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를 방문해서 집회를 열고 설교를 하겠다든가 교리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교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28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면 예수님이 너희에게도 복을 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2절에도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편히 쉰다’는 것은 ‘새로운 힘 얻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다른 성도와 교제할 때 기쁨과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약점을 찾아서 공격하고 비난하는 일은 바울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를 바라볼 때 장점을 보기보다 단점을 드러내어 지적하는 일에 능합니다.

 

예를 들어 장점이 8개, 단점이 2개인 사람이 있다고 할 때, 한국 사람들은 장점 8개를 보지 않고 2개 밖에 없는 단점을 부각시켜 험담하고 비난하는 일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만큼 한국 사람들은 상대의 흠 잡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대인관계를 할 때 항상 사랑과 격려, 호의로 대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저희 교회에 출석하시는 한 성도님의 가정을 심방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자녀들이 국내외적으로 과학자, 의사, 변호사들로 저명한 인사들이 되어 복을 많이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저는 자녀들이 그렇게 많은 복을 받은 가정을 처음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현재 89세이신데 자녀 교육을 잘 시킨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 “저희 아버지는 일평생 남에 대해 나쁜 말이나 욕설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이제부터 남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인을 나쁘게 생각하면 내 심령도 상하고 자녀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타인을 사랑과 호의로 대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사람에게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대인관계는 대신관계와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든 성도를 찾아가서 심방하고 기도해 주는 것 역시 하나님께 한 것과 일반입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단점을 드러내어 비난하는 일에 열을 내지 말고, 사랑과 격려, 호의로 대함으로 서로 유익을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Ⅳ. 솔직한 인간미를 갖고 있던 바울

 

바울은 스스로 부족한 것은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나는 흠이 없고 부족함도 없고 잘못하는 일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였고, 1등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부족함이 없는 슈퍼맨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사역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걸어 다니려면 음식을 먹어야 하고, 위대한 사도이지만 영적으로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한 존재임을 시인하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위협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두려워 떠는 존재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고백하고 성도들에게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달라고 기도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에 가고자 하는데 돈이 없으니 헌금을 모아 달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들이 어디 가서 헌금 해달라는 말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제껏 장막을 만들며 자비량으로 사역을 해왔지만, 더 이상 선교할 돈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3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가 되어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할 테니 내게로 오라!”가 아니라 “너희가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사뭇 꺼내기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31절에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유대에는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니 그 사람들로부터 건짐을 받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내가 전달하는 이 헌금에 대해 순수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성화되는 것은 아무 흠도 없는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백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로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많은 약점과 단점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화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인간임을 깨달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인간 냄새가 나는, 솔직한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론

 

침례교 목회자 가운데 윌리엄 캐리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영국의 칼빈주의 전통의 침례교회에서 인도로 파송을 받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던 인도를 자원함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부인이 캐리를 못 살게 굴었습니다. 선교사역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괴롭게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을 살다가 아내가 먼저 죽고 재혼 한 이후, 캐리는 “내가 이제야 인간으로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노라”고 회고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가 40년이 넘는 세월을 인도에서 사역하며 많은 교회를 세우고 개종자를 얻었는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인도의 방언 3개로 신구약 성경을 완전히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한 페이지 제대로 번역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인데, 그는 인도의 방언을 연구하여 성경을 번역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인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 지망생들이 캐리와 같이 선교하면 되는구나 해서 그 때부터 근대 선교가 활발해 지게 되었고, 캐리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있는데, 캐리의 누나가 몸이 약해서 약 50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그녀는 항상 동생과 그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캐리가 인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전도의 열정, 약한 자를 도우려는 구제의 열정,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과 호의로 대하는 태도,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솔직한 인간미를 배워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로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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