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1장 1~25
빌레몬에게 전해진 복음 - 상처 받은 가정과 세상의 치유
이준원 목사 2019.2.27.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빌레몬에 대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라고 부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그렇게 부르는데, 이 시대의 두드러진 특성들 중의 하나는 파괴와 해체입니다. 또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굳건하게 붙들고 살던 많은 전통적 가치와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가족의 해체입니다. 이런 시대를 향해 성경의 메시지가 과연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시대를 향한 그런 복음의 증거를 신약성경의 짤막한 단 한 장으로 된 책 빌레몬서를 통해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은 1세기의 소아시아 도시 골로새에 살던 매우 부유하고 유력한 인사였습니다.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골로새(터키 서부 지역)에서 그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 사도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본문은 그의 종 기운데 한 사람인 오네시모를 바울이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에 대해 부탁하는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빌레몬에게 보내진 이 짧은 편지를 통하여, 우리는 이 시대가 목마르게 기다리는 복음의 진수를 접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에게 전해진 복음의 진수가 무엇이었습니까?
2. 빌레몬에게 전해진 복음
1) 우리 가정이 교회가 될 수 있다
바울은 갇힌 자가 되어 로마의 옥중에서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1-2절)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을 보면, 빌레몬의 집에서 교회가 모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학자들에 의하면, 바로 이런 것이 가정교회의 성경적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가정에서 교회가 모였는데, 이 교회가 골로새교회였습니다. 골로새 도시 전체에 크리스천들이 있었는데, 빌레몬이 한 가정교회를 맡은 리더였을 수도 있고, 빌레몬이 부유했기 때문에 집이 컸을 것이고, 그래서 모든 교인들이 그의 집에 함께 모여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빌레몬의 집 이 교회의 최초 교인들은 빌레몬의 가족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여러 종들을 소유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상당한 재력이 있는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19절)
여기서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진 것이 있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당연히 돈을 빚졌다는 게 아니고 빌레몬이 바울에게서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재력으로 사도들의 선교 사역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 사랑받는 동역자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비롯하여 사도들의 전도 사역을 많이 지원한 것을 여기서 느낄 수 있습니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압비아를 ‘자매’라고 다정하게 표현합니다. 또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추정하는데, 그런데 그에게는 ‘함께 병사 된' 사람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습니다.
“그리고 아킵보에게 ‘주님 안에서 받은 직분을 유의하여 완수하라’고 일러주십시오.” (골 4:17, 새)
빌레몬이 포함된 골로새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데, 특히 아킵보를 콕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하는 것을 보면, 아킵보가 빌레몬의 가정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직분을 맡아 수행하고 있었으며, 그가 복음 사역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같은 곳을 보아도 각 도시마다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였는데, 아킵보는 빌레몬의 가정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아 일하고 있었고 복음 사역에 아주 헌신된 일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열심히 했으면 ‘병사’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이상적인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집을 열어 교회가 모이게 하고, 리더로 섬기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온 식구가 복음을 위해 살았던 빌레몬 가정의 모습이야말로 복음으로 변화된 성도의 가정의 표본이 됩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가정 사역 구호들 중에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빌레몬의 가정이야말로 이 구호에 합당한 대표적 가정입니다. 그 가정은 사실 교회‘처럼’ 된 것이 아니라 교회 그 자체였고 또 교회가 그 가정이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붕괴되는 이 시대에 복음의 등대로 우뚝 선 가정들이야말로 험한 바다에 비추는 등대 불빛과 같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가정을 그런 세상의 소망인 작은 교회가 되게 합니다.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은 후 그 가정이 이렇게 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는 우리 집의 목사, 어머니는 장로, 자녀들은 집사가 되어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모습,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교회에만 직분자가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직분의 역할은 가정에서도 똑같습니다. 그런 가정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복음은 지금도 우리 가정을 이런 교회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가족을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자, 직분자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2) 신분을 넘어 가족이 될 수 있다
요즘에는 이전 시대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가정들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싱글 맘이 많고 싱글 대디도 많습니다. 그래서 혼자 자녀를 기르며 함께 사는 홀부모 가정이 많습니다. 또한 소위 더블 인컴을 벌어들이면서 자녀를 낳지 않는 딩크족(DINK: Double lncome No Kids)도 있고, 자녀 대신 애완(반려)동물을 키우는 딩크펫족(요즘은 반려동물이라고 해야 합니다)도 있습니다. 부모님 없이 조부모와 함께 사는 조손족도 있고, 다문화 가정도 많으며, 나홀로세대족(최근 한국 사회에서 급증하는 형태)도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지만 동성가족도 이 시대의 경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세대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성경적인 가정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존의 가족 해체와 함께 이 시대 사람들이 대안가족이나 대안가정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소위 ‘확장된 가족’(extended family)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미국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있습니다. 그룹 퀸(Queen)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그룹 리더가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라는 사람인데, 처음에는 여자 애인이 있다가 나중에 자기가 양성애자라는 것을 알고 남자들과의 관계도 가지다 결국 AIDS로 죽었습니다.
그는 잔지바르라는 아프리카 지역 출신인데, 원래는 서아시아(페르시아) 집안에서 인도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영국으로 이민 간 가정입니다. 인종적으로는 서아시아 계통이고, 영화를 보니까 그의 가정도 아주 차분한 이민자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그렇게 음악을 하면서 마약도 하고 여자와 남자와 복잡한 삶을 살았는가? 계속 찾는 겁니다. 계속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해도 안 채워지니까 계속 찾는 겁니다. 영화를 보면서 참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계속 찾는데 안 채워지는 겁니다. 그런 영혼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찾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찾는 것은 마음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를 통해서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대안가족을 찾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 교회의 새 역할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 대안가족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대안가족’이라고 하니까 말이 이상한데, 진짜 가족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편견으로 대하는 안목에서 벗어나, 신분을 초월할 수 있는 새 가족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만이 그런 가족관을 우리에게 심어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바울이 빌레몬서라는 편지를 쓰게 된 계기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라는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주인 빌레몬에게 중대한 재산상의 손실을 입히고 도망쳐서 로마까지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너무 놀랍게도, 오네시모는 어찌어찌 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을 만나 그에게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어떻게 저 멀리 소아시아(터키)에서 도망쳐 온 노예가 로마까지 오고, 또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을 만나고, 그래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놀랍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가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그를 돌려보내거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영접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6-17절)
실제로 노예들이 있었던 로마시대 당시에 노예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하나님을 주인도 아버지로 부르고 노예도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와 형제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 한국 초대교회사에도 일어났던 그러한 일입니다. 주인과 종이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 3:26-28, 새)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정말 혁명적인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신분을 초월하여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 가족이 되게 합니다. 인간이 서로를 나누는 어떤 기준이 참 많은데, 예수님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꾸 서로를 나누려 합니다. ‘나는 유대인이고 너는 그리스인이다. 나는 자유인이고 너는 종이다.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구분하며 나누는가 하면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 하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들은 모두가 한 가족입니다.
3) 용서를 통해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대에 가족이 해체되고 가정이 파괴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다양한 원인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설교가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Menlo Church 담임목사)는, 오래 전 자신의 책에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고슴도치에 비유했습니다. 참 적절한 비유입니다.
고슴도치는 고독한 동물입니다. 주로 많은 시간을 혼자 다닙니다. 그러나 고슴도치도 고독을 느끼는 계절이 오면 다른 고슴도치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자기도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발생합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자기 등에 나 있는 수많은 바늘로 자기는 저쪽을 찌르고 저쪽은 자기를 찌르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이런 우리가 가족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용서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슴도치처럼 뭔가 해보려고 다가가다가, 다가가니까 서로를 찌르는 겁니다. 멀리 있는 사람, 나와 별 상관없는 사람은 나를 찌르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 뭔가 같이 해보려는 사람, 특히 가족끼리 얼마나 서로를 찌릅니까? 그런 우리가 가족으로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용서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상처를 입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죽어 가시면서도 마지막으로 남기신 기도의 모범이 바로 용서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눅 23:34, 새)
혈연관계를 넘어선 영적인 가족이 된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도 우리가 끊임없이 실천해야 할 교훈이 바로 용서입니다. 빌레몬서 속 주인공의 한 명인 오네시모는 노예로서 주인 빌레몬에게 막대한 재정적 피해를 입혔습니다. 당시 그런 노예가 주인에게 잡히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에게 뭐라고 부탁합니까?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8절)
바울은 자기가 대신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의 빚을 대신 짊어지신 그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용서를 받고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복음은 용서함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고, 또한 진정한 가족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가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먹듯이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용서하고, 자녀는 부모를 용서하고, 아내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남편을 용서하고, 남편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아내를 용서하고, 또한 형제자매는 서로를 용서하는 가정이 참으로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기도문)의 교훈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1-12)
당시에는 특히 일용할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날마다 먹을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이 왜 나오겠습니까? 용서도 일용할 양식처럼 매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못 봤는데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한국 드라마 <금 나와라 뚝딱>이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의 주제곡 가사가 이렇습니다.
감사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너를 만나 이렇게 변해 버렸어
땅만 보며 걷던 내가 변했어
하늘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안녕 내 눈물아 거친 세상아
너를 만나 행복을 알게 되었다
Thank you 내 사랑아
상처투성이 안아줘서 고맙다
안녕 내 눈물아 거친 세상아
저는 이 드라마를 못 봤지만, 용서가 실천되는 순간 모든 것이 행복하게 바뀌고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일반 드라마에서도 용서를 통해 이렇게 아름다운 가정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이런 사랑과 용서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믿어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인데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정죄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 아프고 슬픈 상처투성이 인생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율법이 아닌, 복음을 들려주어야 되겠습니다. 야단과 호통이 아니라 용납과 용서의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빌레몬에게 전해진 그 복음, 오네시모에게 전해진 그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이 은혜의 복음을 듣는다면, 그들이 비록 지난날 혹시 내 가슴에 깊고 예리한 상처를 남긴 사람이고 정말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향해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11-12절, 새)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내 마음(my heart)”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빌레몬도 그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에게 전해진 이 복음만이 오늘의 상처받은 우리 가정을 치유하고 상처받은 오늘의 교회를 치유하는 희망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시 그 복음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우리 가정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다시 그 은혜의 복음 앞에 응답할 때입니다. 자, 어떻게 응답을 하시겠습니까?
'신약 -------------------- > 빌레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몬 1장 4-18절(오네시모의 회심) - 스데반 황 (1) | 2023.06.06 |
---|---|
몬 1장 8~22절(그는 내 심복이라) - 김광일 (1) | 2023.06.06 |
몬 1장 8-18절(사랑을 통한 변화) - 유은호 (0) | 2023.06.06 |
몬 1장 4-7절(항상 드리는 감사기도) - 지성래 (0) | 2023.06.06 |
몬 1장 9-20절(제자공동체 XIV - 형제애) - 최태선 (0) | 2023.06.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