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1장 9-20
제자공동체 XIV. -형제애-
최태선 목사 2006.12.31.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제가 매일 오르는 산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도 하고, 지난 가을에는 밤을 나누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제법 친숙한 느낌이 들었고, 오래 마주치지 않으면 서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을 하기도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톨릭이건 개신교인이건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말을 제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 그래도 집이 다르잖아요?” 하면서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 잘못된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믿으며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하자 그들은 “물론 그렇지요. 그렇지만 개신교는 어쩌고 목사가 저쩌고..” 하면서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도저히 개신교 신자가 자신들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그분들이 말하는 개신교의 잘못된 모습들이 가톨릭에도 똑같이 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과 사례를 들어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한 분이 갑자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야! 순 나쁜 말만 골라 하잖아?” 하면서 휙 돌아서면서 일행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좋은 의미로 말한 것인데 결과는 그 반대가 된 것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래 못 만나던 그분들을 그 다음날 또 만난 것입니다. 저 역시 마음이 편친 않았지만(목사라는 이유 때문에) 평소대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의 얼굴이 못 만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뒤틀리고 말았습니다. 어제 빨리 가자고 재촉하던 분은 아예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정말 원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높은 벽을 또 한 번 실감한 것입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가톨릭 신자들과의 이런 만남은 개신교 신자와의 만남에 비해 나은 편입니다. 개신교 신자들 간의 경쟁심과 우월감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같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유대감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한 형제라는 생각은 마치 이단을 대하는 듯한 경계심까지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원초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말 그대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그들은 가정공동체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새 가정이 되어 형제와 자매로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 공동체들은 그리스도인 형제관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어느 도시에나 공동체의 모임을 위하여 자기 집을 제공하는 하나 혹은 여러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집의 주인들은 흔히 그들 자신이 선교활동을 열심히 행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그 대표적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희생적인 자세로 손님 대접을 하면서 자기 집을 공동체 생활의 구심점으로 삼을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집을 떠나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원하는 받침점으로도 삼았던 것입니다.
공적으로 여행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고후8:23) 아니라 사사로운 용무로 출타중인 그리스도인들도 손님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원초교회에서는 낯선 “형제들”의 유숙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자신의 가정을 개방하는 것이야말로 경계선을 타파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방된 새 가정의 구조가 모범적으로 드러나는 실행이었던 것입니다. 가정 공동체라는 공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형제관계와 자매관계가 구체적으로 삶으로 실천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이란 단순히 교회론적 본질을 규정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초교회 공동체들 안에서 실제로 구체적으로 실천되던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고 자매라고 일컫던 실생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는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수도사들이나, 같은 종파나 교단의 성직자 동료 사이에만 쓰이고 있지만 원초교회에서는 공동체 내의 당연한 호칭으로 형제와 자매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형제와 자매란 곧 그리스도 신앙의 친구, 그리스도인 교우를 뜻했던 것입니다.(과거형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언어 상으로는 이렇게 형제와 자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형제 칭호가 도입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곳곳에서 형제 칭호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쿰란 공동체에서도 서로를 형제라 불렀습니다. 또 유대교에서도 같은 믿음의 친구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형제와 자매라는 말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원초교회의 형제와 자매 칭호의 바탕을 이루는 맥락은 대단히 새로웠습니다. 원초교회 그리스도인들의 형제, 자매 관계는 종말 성령의 부여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체험은 동시에 마지막 때를 위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합니다.(롬8:14-16, 갈4장 5-7)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는 의식에 의하여 서로가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은 다만 아름다운 말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살아있는 정신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반복되는 그들의 삶의 강령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오늘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망간 노예인 오네시모 때문에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그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바꾸어 살펴보겠습니다.
나 바울은 늙은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몸이 되어 옥중에서 얻은 나의 자식 오네시모에 대하여 그대에게 부탁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자였지만 지금은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오네시모, 곧 나의 마음을 보내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당하는 옥중생활에서 그대를 대신하여 내게 시중들게 할 생각이 났지만,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제가 아니고 자원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동안 그대를 떠나게 된 것은 영원히 그를 돌려받을 수 있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사랑스런 형제로 돌려받는 것이니, 내게도 참으로 그러하다면 주님 안에서나 하물며 인간적으로 보나 그대에게는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그를 나처럼 받아들이시오. 그리고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나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시오. 나 바울이 내 손으로 썼습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나는 그대 자신이 나에게 빚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자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로 인하여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시오.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원초교회 그리스도인들의 형제 호칭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뿐 아니라 이 편지의 내용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용 또한 중요합니다. 그의 논법은 오네시모와 자기를 일체화하고 있습니다. ‘나를 대하듯이 그들 대해 달라.’ ‘그의 빚을 내 앞으로 돌려 달라.’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 ‘그는 내 마음이요, 내 속에 살아 있는 사람이다.’ ‘이 당부를 실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도 똑같은 가족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합니다. ‘당신도 형제다.’ ‘당신도 사도에게 은덕을 입은 사람이요, 빚을 진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도 형제애를 실천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이 짧은 편지글을 통해 이렇게 여러 가지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어조입니다. 이 짤막한 편지는 원초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관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초대교회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편지가 원초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체험에 의해 그들은 새 출발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과 자매들의 공동유대를 체험한 거기에서 꽃피어나는 신선함과 간절함과 사랑스러움이 역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사하신 이 공동유대 안에서 실감되는 이 새로움을 그들은 ‘만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형제애인 것입니다.
원초교회는 이렇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신약성경의 공동체들은 막연히 “사해 동포”니 “만민 형제”니 하는 순진한 꿈들에 투신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매우 냉철하게 그들은 우선 그네들 자신의 대열 속에서 형제애를 구현하고자 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바깥을 향하여 경계선들을 뛰어넘으려고 끊임없이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형제관계 속으로 이끌어 들여졌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웃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원초교회의 모습은 고대 교회공동체에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클레멘스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습니다.
자비와 성실을 통하여 여러분은 수많은 뽑힌 이들이 구제되도록 온 형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밤낮없이 다투어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하며 원한을 품은 일이 없는 여러분이었습니다. 어떤 소동과 분열도 여러분에게는 후회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웃들이 발을 헛디디는 것을 보고 여러분은 슬픔을 느꼈으며, 그들의 결함들을 여러분 자신의 결함으로 여겼습니다.
편지의 문맥으로 보아 고린도교회가 달라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좋지 않은 모습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 글을 통해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과거의 모습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클레멘스 1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우리가 방금 살펴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온 형제 공동체 즉 고린도 공동체 전체에 상호 책임성이라는 생각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만이 아닙니다. 이 서신의 시작 부분을 보면 로마의 공동체가 고린도의 공동체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로마의 공동체는 지금 박해라는 절박한 불행 속을 어렵게 이겨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서 고린도 공동체가 다시 옛 상태로 회복되기를 촉구하고,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클레멘스 1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로마에서 타향에 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고린도에서 타향에서 사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이 시작 부분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어떤 시각과 태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들이 서로 책임을 짊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관계가 어디로부터 출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 전체의 형제관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형제라는 칭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관습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식별 표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당시의 사람들은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무차별하게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는군요.” 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교부중 한 사람인 터툴리안은 그런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대들(이교도들)에게도 우리의 한 어머니인 자연에 따라 마땅히 형제들입니다.... 하물며 (믿음과 세례를 통해)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알아 뵙게 되고 거룩함의 한 마음을 들이마시게 되었으며 똑같은 무지의 한 몸에서 문득 진리의 한 빛으로 솟아나게 된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형제들이라고 불리고 또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더욱 마땅한 일입니까?”
그리스도인 공동체들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칭호는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의 관습에 비하면 가히 혁명적 성격을 띤 배려들이 모든 역경에 처한 공동체 구성원을 향하여 예외 없이 실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말해줍니다. 특히 과부와 고아와 노인과 병자들,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과 실업자들과 옥에 갇힌 이들과 쫓겨난 사람들, 여행 중인 그리스도인들과 특별한 궁지에 빠진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별한 배려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합당한 장례를 위한 배려도 추가되었습니다.
위 사실들 중에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내용은 실업자들과 무능력자들에 대한 공동체의 배려입니다. 물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일을 하도록 요망했습니다. 일터도 알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공동체에 의한 부양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직업보도 체제와 사회보장 조직이 존재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상호 협력과 자발적인 기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기부금은 특히 주일 성찬례 때에 드려졌습니다. 그 모습이 유스티누스라는 사람의 유명한 글 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력과 선의가 있는 사람이 스스로 헤아려 원하는 대로 헌납을 하고, 그렇게 해서 모인 것이 주례자에게 맡겨지는데, 그것을 가지고 그는 고아와 과부들, 병이나 그밖에 이유로 아쉬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 안에 있는 타향 사람들을 찾아가서 도와주는 것이다.
극히 효과적으로 수행되던 이 사회보장 체계는 비단 지역교회 자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처지가 드러난 이웃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도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목들을 우리는 줄줄이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로마 교회는 다른 도시들의 공동체들에 대한 원조사업으로 유명했습니다. 서기 170년경에 고린도의 디오니시오스가 쓴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여러분은 모든 형제들을 여러 가지로 돕고 모든 도시의 수많은 공동체들에게 원조를 보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여러분이 보내어온 선물들을 통하여 여러분은 로마인으로서 전래의 로마 관습을 고수하고 있으므로, 궁핍한 사람들의 가난을 덜어주고 있으며 광산에서 사는 형제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소테르 목사는 이 관습을 비단 고수해 왔을 뿐 아니라 더욱 확장시켜 오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형제관계는 각 공동체 안에서나 온 교회 안에서나 그저 빈말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반대자들의 눈에는 비현실적인 이상론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가르침의 실천적 적용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구성원들의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역경을 떠맡겠다는 하나의 보증서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 앞에 저는 진리의 위대한 힘을 느낍니다. 그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전율이 느껴집니다. 제 혈관 속으로 새로운 피가 흐르는 듯, 감각이 새로워집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감격과 느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초대교회와 그를 이은 고대 교회들이 아가페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상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도움의 실행이었습니다.
물론 고대 교회도 아가페에 자주 실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형제애가 기독교의 특유한 점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은 거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 그대들(이교도들)에게는 도리어 기분 나쁜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 서로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오. 사실 우리에게는 미움이란 생소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라고 부른다오. - 이걸 그대들은 부러워하고 있지요. 우리는 실상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이요, 믿음 안에 함께 뽑힌 이들이며, 소망 안에 함께 상속자들이라오. 그대들은 그러나 아예 서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 미워하면서 분노를 터드리며, 여러분이 형제들임을 정작 새삼 깨닫게 되는 때라고는 고작 친족의 살해가 문제될 때뿐이지요.”
저는 말씀을 준비하며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을 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그 옛 이야기들을 보면서 제 마음에 떠오른 것은 주몽과 삼족오입니다. 광활한 땅을 소유하였던 옛 고조선의 영토를 표시한 지도를 보고 놀라는 주몽의 모습과 그 광활했던 옛 조선의 기록을 찾아 읽고 또 읽는 주몽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런 주몽의 배경에는 언제나 삼족오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삼족오의 깃발아래 뭉쳐 머지않아 반드시 고토를 회복하고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이 아름답고 위대한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교회들이 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들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는지요? 제자공동체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교회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오늘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우리는 절규합니다. 성령님의 애끓는 절규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다가오는 새해를 바라보며 저는 주몽과 같은 꿈을 꿉니다. 성령의 깃발아래 뭉쳐 위대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어지니교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난관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놀라운 회복의 역사를 목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원수들에게도 열심히 자선을 베푼다! 어지니교회는 다른 교회들을 섬기고 또 섬긴다!
이런 말들과 함께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와 날마다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해지는 제자공동체, 살아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그날까지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힘을 내십시오. 성령님은 벌써 저만치 우리 앞에서 모든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이런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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