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1장 13-16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최태선 목사 2004.10.04.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지난주에 어떤 분으로부터 저에 관한 말을 한 마디 들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은 제가 특수목회를 하기를 원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저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제가 특수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특수목회를 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의도하는 것이 반드시 기분 나쁜 이야기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나아가고 싶은 교회의 방향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그리고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교회를 특수교회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진짜로 그런 교회가 등장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특수한 교회가 나타났다고 말할 것입니다.(어쩌면 이단이라고 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다지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의 이와 같은 상황이 낯설지 않습니다. 이미 과거의 믿음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은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실로의 성소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여호와에 관한 지식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종교에 관한 전문가였습니다. 아무리 타락한 시대라 할지라도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모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이론적으로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삶 속에서 여호와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에 대한 지식, 여호와의 행하신 일에 대한 앎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사시대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는 사무엘상의 시대 상황에서 그들이 여호와를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사사시대의 초창기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2장 7-10절을 보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를 섬기던 이스라엘이 그 뒤의 세대에 가서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사시대의 초기를 지나면서 즉 여호수아와 여호수아와 함께 하던 장로들이 죽은 이후에 나타난 세대에서 그러한 사실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사시대 초기에 이미 이스라엘은 주인이신 여호와의 다스림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 기자는 사사시대의 이 새로운 세대가 여호와를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지 못하게 된 참된 이유는 바알과 아스다롯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2:11-12)
이 말씀을 살펴보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렸다는 것이 반복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악이 표면적으로 보면 두 가지 단계의 행동인 것처럼 보입니다. 첫째, 여호와를 버리고 둘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한 행동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완전히 결별하고 바알만 섬긴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바알신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런 행위를 이스라엘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중 제1계명에서 “나 외의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나를 빼놓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다른 신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게 된 것, 즉 여호와를 주인으로 섬기지 못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바알을 동시에 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의아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굳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가나안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이 어떤 신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안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이란 두 신이 한 해의 소출과 다산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부부신이 사랑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자손의 수와 가축의 소산과 땅의 소출이 많아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풍요와 다산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성행위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알 신봉자들은 그저 방관자로서 “바알이 알아서 하도록”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이 성행위를 많이 하도록 자극하는 참여자, 유도자가 되었습니다.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에,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인간의 세계에서 행하는 일이 신들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사랑의 행위를 부추기기 위해, 신전에서 예배의 한 행위로서 술을 마시고 남자 신도는 신전의 창기와, 여자 신도는 미동과 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자극해 그들도 성행위를 하게 함으로써 결국 이로 인해 비와 포도주와 곡식과 기름이 넘쳐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방 종교의 매춘을 단지 성적인 쾌락을 위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런 우상숭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제적인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은 것뿐입니다.
가나안인들은 오랜 동안 농사를 지어온 자들이기에 곡식의 소출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애굽의 종노릇하면서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는 자들이었던 데다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었기에 농사에는 조예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출은 가나안인들보다 적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가나안인들이 섬기는 신에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의 신에 절하여 우리의 행복을 달성해보자는 미혹이 들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종교는 육감적이고 쾌락적이었기에 더욱 쉽게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알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파국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자기 자식을 삼으시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것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의의 왕국을 세우도록 부름 받았다고 확신하는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믿고 자유와 정의, 공평과 긍휼이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생명을 바쳐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는 현실적인 물질적 풍요가 더 매력적이었기에 이스라엘은 돌이켜 바알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현실적 풍요와 물질적 부를 선호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습니다. 바알은 가까이 있는 신, 물질적 풍요를 보장하는 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시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이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라고 완전히 확신합니다. 미국에는 Money, 돈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그 잡지의 편집자는 돈이 미국인들의 첫째가는 강박관념, 즉 새로운 성(The new sex)이 되었다고 기사를 썼습니다. ‘뉴스위크지’에 인용된 미국 중산층 젊은이의 말은 1년에 40만 불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뉴스위크지는 미국 중산층이 ‘상상을 초월하는 소득’이라는 새로운 의식 수준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현실도 이와 똑같습니다. 강남에 집 한 두어 채에, 현금 한 2십억 한달 수입 천만원 정도 그리고 먼 장래를 위해 시골에 땅을 가지는 것, ‘돈이면 다’라는 것을 따른다는 면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했던 한 졸업생은, “저는 배운 대로 살려면 가난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두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직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스스로를 정의합니다. 그래서 압구정동의 한 거리를 가보면 외제 스포츠카를 가지지 않으면 아예 여자를 만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명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배우자를 결정하는 데 인격이나 사람의 됨됨이 그리고 성격 같은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수도 없이 생겨났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들의 인생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름 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처럼 뛰어들고 또 뛰어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배우인 부룩 쉴즈는 자신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나처럼, 지나친 노력이 요구되는 결혼 관계에 빠지지 않는 것을 원하는 여대생들이 아주 많이 있지요. 우리는 출세하고 성공하는 데 더 관심이 있거든요.” 그녀의 말은 놀랍도록 현실적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결혼하고 애낳고 하면 여자들은 출세하고 성공하는 길이 막혀버립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말대로 성공하고 출세한다고 해서 그녀가 행복하고 그녀의 삶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 이기심의 관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도 자신과 상관없다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오늘날에도 전쟁과 평화에 관한 계속적인 관심이 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티셔츠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핵전쟁? 나의 성공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핵전쟁은 나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환경이 오염되고 자손들까지 살 수 없게 되는 것은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의 성공이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현실적 풍요와 물질적 부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 오늘날의 상황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은 드러내놓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 시대는 하나님 자체를 부인합니다. 드러내놓고 부인합니다. 그리고 마치 갈멜산 제단 위에 번제물을 쌓아놓고 엘리야와 바알제사장들이 불을 내려달라고 대결을 벌렸던 것처럼 대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돼 구속의 역사는 이제 그와 같은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선택일 뿐입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믿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너무도 정확하게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꿰뚫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으며 저는 옛날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조회 시간의 주훈 발표가 생각났습니다. 먼저 주훈을 발표하고 그 다음에 실천사항을 발표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리고 실천 사항이 이어집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우리가 믿지 않던 때에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먼저 이 시대의 우리 문화가 우리를 향해 요구하는 가치관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합니다. 현대 문화의 모든 전제에 도전해 보십시오, 그 문화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 문화의 가치들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어.”라고 말한 다음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에서 계속 전해 내려온 사상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상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복음 그 자체인가, 아니면 단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익숙하게 사용해 온 것인가?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이 짜놓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목록들로 포장된 단순한 해결책은 아닌지 점검해 보십시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단지 누군가의 기득권을 위한 버팀목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자신에 대해 정직해져야 할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가 한 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의 종교 중에 어떤 종교가 그 추종자들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루이스는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종교가 최고입니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말이지요. 제게는 나이 많은 친척이 한 분이 있는데 그 사람은 젊어서부터 지독한 이기심과 자기 숭배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유감이지만, 그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었지요. 정말로 편안하게 해줄 종교를 찾는다면 저는 절대로 기독교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분 좋게 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당신을 죄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을 거꾸로 뒤집을 것입니다. 당신은 아주 불편하게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입니다. 분별력을 가지십시오. 현대인들을 둘러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야만 합니다. 근본적으로 이 시대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은 우리의 사욕을 좇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이 말하는 실천 사항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분을 닮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여러분 이 말씀이 성경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런 구절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성경이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주님을 믿고 주님께 맏기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여러분 고민하셔야 합니다. 그냥 ‘나는 믿는다’ 하고 선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를 영원한 불신으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연구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실천해 보십시오. 성경은 머리로 아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전도자 무디의 성경은 빨간 줄이 쳐있고 그 옆에 t.f.라는 글이 수도 없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t.f.라는 말은 tested & proved의 줄임말입니다. ‘시험해보았더니 입증이 되었다.’ ‘실천해보니 정말이었다’ 이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고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을 실천해보고 그것이 옳음을 깨달았을 때에만 우리의 삶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성경책을 그렇게 읽을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중심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과 직장에서, 어디에 있든지 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거룩함을 이야기하면 벌써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최목사 당신은 설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남의 일에 간섭하고 있어요. 흡연과 음주 뭐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일 테지요.“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떤 규칙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가 말하는 것과 같이 거룩이란 ”하나님의 속성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도 정의를 요구하는 백성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고 고통 당하는 자들을 돌보신다면, 우리도 그들을 돌봅니다. 가난한 자를 신 한 켤레에 파는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 있다는 그 메시지를, 물질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세상에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사회적인 거룩함 외에는 거룩이란 없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를 혼자만의 개인적인 종교로 바꾸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웨슬레는 기독교 신앙의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제자인 젊은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그 당시 문화에 대항하여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이 캠페인을 20년 동안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나섰고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제도를 폐지시켰습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화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자는 것도 이 이야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자는 것도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곳마다 그 공동체는 섬기는 일들을 통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소리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미주리 주의 수도인 제퍼슨 시에는 교도소가 있습니다. 수년 간 6천 500명의 재소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가족이 면회를 올 때면 그 가족들이 묵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대부분 켄사스 시티나 세인트루이스에서부터 운전해 오는데, 차에서 자거나 공원 벤치에서 자곤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찰스 콜슨이 만든 교도소 선교회의 자원 봉사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집을 하나 샀습니다. 12개 교회로부터 돈을 걷었고, 집을 고쳐서 4년 전 아가페 하우스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만 명의 여성들이 하루에 3달러를 내고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성경도 받고, 머물 곳, 깨끗한 침대와 아이들을 맡길 장소를 얻게 되어서 감옥에 있는 남편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것은 그곳을 남침례교회 선교사였던 사람과 천주교 수녀가 함께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셰리라는 한 여인이 어느 날 밤 낙심해서 그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밑바닥 삶을 살아온 여자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람은 셰리였고, 남편이 면회를 왔었습니다. 교회들은 이 세상에서 셰리 같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지 않았지만, 아가페 하우스는 그녀를 머물게 해주었습니다. 하루는 밤에 셰리가 거기에 앉아서 자기가 받은 성경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계신다면 틀림없이 이 집을 운영하는 두 여자분과 비슷한 분일 거예요.” 여러분, 이런 것이 바로 거룩한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주일 아침 예배당에 앉아서 훌륭한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손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손이 더러워져 가면서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 중에 명백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으라고 부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회개하고 구별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우리는 변화되게 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의 복음, 쉽고 편한 복음을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진짜 복음을 들을 때 깨닫지 못합니다. 진짜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내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을 가지고 변화될 것이며, 나가서 그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자 어거스틴은 회심 한 후에 자기가 어려서 재미로 도둑질 한 과수원의 주인을 찾아가 사과를 하고 배상을 하였습니다. 회심한 어거스틴을 하나님께서 혼자 내버려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거룩하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하나님처럼 완전한 거룩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구별된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이 황금 만능 주의 출세 지향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를 거룩함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헌신이 이 시대 문화의 가치에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돈 중에 선택해야 하는 이런 종류의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면, 이 시대 문화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어려운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헌신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문화의 가치 체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헌신이 충돌 과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진실로 나의 삶에 역사 하시고 계신지를 의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를 떠날 때, 그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 머리에 주입된 사람들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분별력으로 생각하고 결정해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헌신한 사람들로서 나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에 기준을 두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되든지 성경이 죄라고 부르는 것들을 자랑으로 여기는 세대 속에서 구별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면서 그 거룩한 말씀의 기준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이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왜 바알과 아스다롯을 끌어들이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욕심이 그들을 눈멀게 하는 것은 잠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만연되면 그들이 예배드리는 성전까지 오염시키는 것도 잠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도 전에 좋은 고기를 마음대로 골라 먹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시중드는 여인들을 마음대로 간음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문화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문화란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을 거슬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보고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오늘의 ‘나’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이기적인 존재이며 욕심이 많은 존재이며 사악하기까지한 존재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문화를 거슬러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최선을 다해 말씀을 이루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허리를 동이십시오. 근신하십시오. 그래서 이 시대의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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