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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2장 16-17절(영적 성장의 원칙을 지키라!) - 이삼규

by Preacher 202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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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2장 16-17

영적 성장의 원칙을 지키라!

이삼규 목사 20140105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새해에도 우리 성도님들과 가정에 하나님 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새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결심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작심삼일을 계속하다 보면 일 년이 지나간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도 이 복잡한 세상에서 살려면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우고 나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요한 원칙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원칙은 단단히 박힌 못과 같고, 건물의 견고한 기초와 같으며, 비행기를 인도하는 방향지시 전파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봉독해 올린 본문은 이런 중요한 영적 성장의 원칙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줍니다.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를 악을 가리는 데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영적 성장원칙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 만물에 대한 경이감을 가져라!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은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이감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착각에 빠져 경이감이 무엇인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들을 바라보며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8:4절 상)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다윗만 그랬습니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바라보며 경이감에 빠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에 대한 서사시(敍事詩)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104편을 눈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시편 104편의 저자는 우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그의 시를 시작합니다.

 

시 104: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시 104:2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시 104: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시 104:4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시 104:5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고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신다고 노래합니다. 더 나아가 새, 산, 산양, 바위, 너구리, 달, 절기, 해, 흑암, 삼림의 짐승들, 땅, 바다, 악어 등이 이 놀라운 서사시에서 언급됩니다.

 

여러분! 만물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해가 떠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고, 안개를 쫓아내고, 싹이 나게 하고, 개구리가 나와서 울게 하고, 물고기가 헤엄치게 하고, 새가 노래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만든 것은 모두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아무도 살지 않는 어두운 황무지가 아닙니다. 이 세계는 천국의 앞뜰입니다.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천사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발자국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들턴은 “새들은 어둠 속에서 노래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뭇잎에 가려진 채 지저귀는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노래 소리는 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발자국은 선명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노래하십니다.

 

한 영국 시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 세상이 천국으로 보일 때, 당신이 하나님의 궁전에 있다고 느껴질 때, 당신이 천사들 틈에 끼여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만물에 대한 경이감에 사로잡힐 때, 그때 비로소 당신은 이 세상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당신의 기쁨은 왕을 맞이하는 왕비의 기쁨보다 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안에 살고 있는데, 이 세상은 격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격자를 통해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적어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격자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실까요? 하나님은 머릿속이 회계장부나 서류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금고 실이나 창고 속에 파묻혀 인생을 보내는 사람, 지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돈 계산에만 몰두하는 사람, 절세(節稅)의 방법을 찾느라 하루 종일 골몰하는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에 대해 경이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라!

 

오늘 본문에서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라고 되어 있는 공경이라는 말은 ‘존경하다’는 의미입니다. 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망가지고 추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인간에게서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발견됩니다.

 

어떤 방송에서 젠틀맨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것을 보았습니다. 가상으로 설정된 상황입니다. 어떤 레스토랑에서 매니저가 알바 하는 아가씨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려고 모르는 척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가 하면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그 매니저가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용감한 시민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동영상을 찍어서 그 장면을 보여 주면서 발뺌을 못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연출된 장면이었지만 그곳에서 식사하는 손님들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아직도 희망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인도에서는 어떤 16세 된 아가씨를 집단 성추행을 하였습니다. 경찰에 신고해서 그들을 처벌해달라고 했지만 경찰도 미온적으로 대처했고 그 남자들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이유로 아가씨의 집에 찾아가서 몸에 휴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서 타 죽게 만든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산다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인도는 아직도 옛날 카스트 제도가 잔존해 있어 사람들이 계급이 있고 더 나아가 여성의 인권은 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진가가 제대로 포착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저 친구는 황인종이구먼”, “저 친구는 흑인종이구먼”, “저 친구는 백인종이구먼”이라고 말하면서 서로를 무시합니다. 세상의 눈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행 17:26상)는 말씀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은 색소 형성에 따라 달라진 피부의 색깔을 보지 않고, 그 피부 속의 인간을 봅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블루버드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었습니다. 뉴욕 바우버리가(싸구려 술집과 여관 및 부랑자등으로 유명한 뒷골목)의 멀베리 밴드에 살았습니다. 그는 음주, 흡연, 마약에 찌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녀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구세군 소속의 한 여성이 그녀를 찾아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전도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저주하며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구세군 여성은 계속 다시 찾아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블루버드는 그녀에게 차갑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뿐이겠지요. 봉급을 받고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요? 당신은 단지 일을 사랑하는 거예요.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키스해 줄 수 있겠습니까?”

 

블루버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세군 소속의 그 여자는 감방의 창살 틈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블루버드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고 더러운 얼굴을 감싸 자기 얼굴 쪽으로 끌어당겨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블루버드는 감옥의 차가운 돌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눈물에서 그녀의 영혼이 녹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눈물 속에서 순수했던 소녀 시절에 주일학교에서 배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이 녹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그녀는 차가운 돌바닥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기독교 단체에 가입했고 약 3개월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녀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한때 자신이 전전했던 술집, 사회복지시설, 죄악의 거리를 찾아가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 했습니다. 그녀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녀의 장례행렬이 너무나 길어서 경찰이 교통정리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전에는 그녀가 멀베리 밴드의 거리들을 배회하는 타락한 존재였으나, 이제는 아름다운 성도로 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의 현재의 모습을 보면 존중할 수 없을지 모르지마, 어린양의 보혈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루벤스의 작품이 먼지 속에 뒹굴 때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전문가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으로 거듭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타락한 걸작’을 찾아내어 복원 작업을 하신다면, 그 걸작은 그리스도의 얼굴의 광채를 다시 발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형제를 사랑하라!

 

우리 삶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는 육적차원(자연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차원입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저는 분명 한국인입니다. 하지만 육신적 생명보다 더 높고 고상하고 더 위대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생명입니다. 그런데 영적 생명을 공유한 자들 사이에는 영적 형제애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형제애를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안 믿는 육적 형제들보다 믿는 영적 형제가 더 가깝게 느끼지 않습니까?

 

말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성도들 사이의 형제애는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설사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내게 아무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에드윈 마크햄이라는 사람의 아름다운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원을 그려놓고 나를 그 밖으로 밀어 냈다.

그에게 나는 이단자요, 반역자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랑과 나는 모두가 살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다.

우리는 원을 그려놓고 그를 그 안으로 끌어들였다.”

 

지난 번 신년예배 때 말씀드렸듯이 우리 교회 2014년 표어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입니다. 금년에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사랑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특히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0 자가 많아도 앞에 어떤 숫자가 없으면 0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은 앞에 붙이는 숫자와 같습니다. 그것이 많아질수록 더욱 커지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성부,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포베오’라고 하는 데 그것은 어떤 공포심을 갖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경외심(敬畏心)’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죄를 지으면 두려워하고 복을 받으면 감사하고 그분의 존전에서 떨며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물의 신비를 푸는 열쇠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신학적 해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성소에서 내려다보듯이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본다는 말입니다. 만일 성소 밖에서 사물을 이해하는 열쇠를 찾으려고 한다면 분명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만물을 지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학적’(theological)이라는 말은 ‘하나님’뜻하는 “데오스”(theos)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학적 해석’을 시도해야 합니다.

 

철학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고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합니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머리를 사용하여 연구합니다. 즉 그들의 사고력을 총동원하여 사색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릿속에 든 것이 본래 많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철학자들이 그들의 머리의 한계 안에 머물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들의 연구결과는 실망스럽습니다. 그들은 존재의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며, 철학은 삶의 문제에 대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오늘날 철학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과학입니다. 또한 과학은 신학의 자리까지도 차지 하고 말았습니다. 철학이 철학자의 머릿속에서 지식을 찾는 것이라며, 과학은 이성이 자연 속에서 지식을 찾는 것입니다. 과학적 지식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그러나 과학이 인생의 비밀을 풀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만물의 근원을 아는 사람이요, 인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2014년도를 출발하면서 “코람데오”의 삶을 살기로 원칙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의 징그러운 꼬리를 휘두르며 우리의 목에 뜨거운 입김을 뿜어대는 이 사악한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왕을 존대하라!

 

이 원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는 두 번째 원리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왕을 존대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사람들을 통치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왕은 존귀한 존재들을 통치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정치 체제가 있습니다. 군주제도 있고 민주제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영국 같은 나라는 군주제도가 아닙니까? 그래서 아직도 여왕이 최고의 통치권자로 있습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총리가 지배하지만 상징적으로 여왕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많은 나라들이 ‘대통령’을 세워 나라를 통치하게 합니다. 왕이나 대통령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혼자서는 결코 영광을 얻지 못합니다. 그가 영광을 얻으려면 그가 다스리는 백성이 잘나야 합니다. 통치자는 자기가 다스리는 국민이 존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자기가 존귀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치자가 받아들여야 할 ‘통치철학’입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왕의 존귀함은 백성에게서 유래하고, 백성이 존귀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가의 정치체제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국민 위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중요한 원칙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다섯 가지 원칙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만물에 경이감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지으시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인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은 자들을 형제애로써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영적으로 동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통치자들을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들을 다스리도록 그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신학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십니까?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사물을 대하고 인간을 대하고 통치자들을 대해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른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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