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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베드로전서

벧전 2장 9절(흩어지는 교회) - 최태선

by Preacher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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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2장 9

흩어지는 교회

최태선 목사 2007.2.4.

어지니교회 http://cafe.daum.net/eojini/

 

광주로 이사 온지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 시간은 제가 겪어 온 인생의 어떤 기간보다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즐거움도 참 많았습니다. 날마다 오르는 산행은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 되었고, 자연 속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저의 인생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마음속의 상처도 치유되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런 어느 날 주님께서 제게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기도의 응답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가난하게 해달라는 저의 기도를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제 힘으로 비우지 못하는 것을 주님께서 비워주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깨달음이 이번 주에도 있었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에 신 동범 집사님과 박 현숙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우리 교회를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론 그분들에게도 참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두 아이들이 모두 좋은 대학에 진학도 하였고, 인생의 어려움도 참 많았고, 생각지 못했던 가까운 친척의 죽음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며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며 기도를 드릴 때에는 감정이 격해져서 기도도 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암튼 함께 만나서 지난 이야기도 나누고,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숙제도 해결하고 나름대로 값지고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까운 교회에 잘 정착해서 신앙생활도 잘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한 구석으로는 무언가 좀 섭섭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언젠가는 돌아와 다시 함께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잘 신앙생활하고 있는 그분들을 보니 그런 생각은 다만 제 생각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하나님께서 모든 걸 비워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그분의 인도하심이 참 감사했습니다.

 

깨달음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도 주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주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저는 한국교회에 일꾼을 공급하는 교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교회만을 생각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진정한 교회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물론 제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비전을 갖게 하신 것도 주님이시고 그 일을 이루실 뿐 또한 주님이시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인간은 그걸 잘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걸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을 만난 후 생각해보니 제 입장에서 보면 서글프고 가슴 아팠던 흩어짐이 바로 주님의 일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좋은 일꾼이었던 그분들을 다른 교회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그 교회에서도 우리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좋은 일꾼일 것입니다. 제가 원하고 꿈꾸던 바로 그 일을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라는 걸 보게 하셨습니다.

 

돈 없는 사람이 나중에 돈 벌면 좋은 일 많이 할 것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그 일 또한 우리가 남에게 나누어 줄만큼 풍부해진 후에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 어지니교회는 비록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 교회가 흩어지는 교회가 될 수 있는 초석을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자 우리 교회를 떠난 모든 분들이 귀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제게 주셨던 그 비전을 처음부터 실현하는 교회로 만드시고 이끌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종인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흩어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 디엔에이가 주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흩어진다는 것은 거의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두려운 일입니다. 물론 가만 놔두어도 흩어져버리고 마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더 흩어진다는 것에 대해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에덴에서의 추방 이후 인간에게 거의 본능으로 굳어져버린 뿌리 깊은 특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자기보호 본능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덴의 동쪽을 향해 떠나간 인간들이 가장 처음 한 일은 성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인간들이 흩어져 곳곳에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같은 내용을 7절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흩어져서 이 땅을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래 왔듯이 노아와 그 가족은 한 장소에 정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항하는 건축 프로젝트를 세웠습니다. 바벨탑 사건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언어의 혼란을 일으켜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큰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흩어져 이 땅을 가득 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 또한 흩어져 이 땅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분명 이렇게 흩어지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흩어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도들도 한 곳에 정착하여 건물을 세우려는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단면을 변화산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특별히 사랑하는 세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본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베드로는 놀라서 두렵고 제 정신이 아닌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베드로의 반응은 그곳에 건물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정착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또한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착은 인간의 강력한 본능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시시한 것에 만족하는 인간의 경향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들은 순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땅 끝까지 하나님의 권능으로 넘치게 하시려는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벨탑 사건에서 그러셨듯이 이번에는 박해라는 방해물을 통해 그들을 흩으셨습니다.(행8:1)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보내심을 받은 자들인 사도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박해가 밀려오는 와중에서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땅 끝까지 떠나야 했던 제자들은 안디옥 교회의 바울(당시는 사울)과 바나바였습니다. 기존의 사도들은 사도행전 15장까지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새로운 사도들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오자 ‘보내심을 입은 자’들인 사도들이 드디어 원로가 되어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행동을 보이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원로들은 바울을 한쪽으로 불러 그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바울을 보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고대로 바울은 체포되고, 예루살렘 교회는 신약의 절반을 기록하고 3차에 걸쳐 생명을 내놓고 선교여행을 완수한 바울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흩어지지 않던 예루살렘 교회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병든 교회 1호가 된 것입니다.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교회는 로마의 예루살렘 성 함락과 더불어 영원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남긴 영원한 유산은 오직 성령님뿐입니다. 그리고 2대 리더들과 성도들이 사마리아와 안디옥 등지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역을 펼치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새로운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모형, 곧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교회운동으로 확산됩니다. 안디옥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에베소 교회 등은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한 교회였습니다. 바로 흩어지는 교회의 임무를 완성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두 제자 중 하나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3년간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느꼈을 감동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아침마다 일어날 때면 얼마나 가슴이 설렜을까요? 맹물이 순식간에 수십 년 묵은 것보다 더 좋은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 그 포도주를 마시는 기분은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시는 광경은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한 작은 소년의 도시락으로 5천 명을 넘게 먹이시는 예수님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열두 명이 노를 젓는 배보다 빨리 물위를 걷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기분이 들까요? 말 한 마디로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손 한 번 드시는 것으로 문둥병이 낫는 것을 보는 기분, 심지어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요?

 

그렇게 온갖 기적을 다 보여주시던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던지십니다. “나는 이제 떠날 것이다. 그것이 너희에게 더 이로울 것이다.” 만일 이런 말을 듣는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그리 마옵소서!’ 베드로처럼 우리도 그분의 길을 막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하던 그 시간들이 최고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계획을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 이전 사람들은 어디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을까요?

 

성전의 지성소입니다. 그곳에서 일 년에 딱 한 번, 그것도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그 지성소에 들어갈 때, 대제사장은 금방울을 달고 허리에 밧줄을 묶은 후에야 지성소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방울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며,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밧줄로 그를 끌어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 위를 걸어 다니실 때, 사람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였습니다. 갈릴리 해변, 배 안, 예수님의 산책길, 그분이 계신 곳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그리고 성령강림절이 지난 후 사람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뵐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어디에서든’ 입니다. 이제 그분의 백성들은 어디를 가든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우리가 처음에 살펴보았던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덕분에 믿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광주에도, 서울에도, 대구에도, 로스앤젤레스에도, 파리에도, 요하네스버그에도, 베이징에도 그분의 백성들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이웃과 모든 국가에 동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피로 값을 치루고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소중한 진리를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제자들을 흩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계획을 위해 엄청난 값을 치르셨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힘을 가지고 흩어져 새로운 생명을 낳는 사역의 놀라운 위력,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은 흩어져 번성하여 하나님의 임재로 이 땅을 가득 채우는 제사장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예수님은 이 낡은 방식을 무너뜨리고 새 방식을 일으키시려고 끔찍한 죽음을 감내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을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시려고 새로운 제사장들의 나라를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흩어져야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물에 갇히고, 성직자를 구분하고, 끊임없이 헌금에 의존하는 옛 방식으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안에 거하십니다. 위대한 사람에서 하찮은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후3:16, 6:19) 우리의 영광의 소망은 우리가 사용하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그 소망을 세상에 드러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가 신성하게 여기는 예배당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훨씬 더 아름다운 신전을 건설한 종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언덕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기둥만 몇 개 남은 정도로도 아직도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소피아 성전을 누르기 위해 터키의 이스탄불에 건설된 블루 모스크는 그 규모와 섬세한 아름다움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사막에 세워진 돈황의 석굴이나 절벽위에 세워진 네팔의 사원들, 인도의 힌두 사원들 또한 웅장하고 위대합니다. 우리는 건물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종교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 곧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을 드러내야 합니다. 변화된 영혼,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세상이 고대하는 진리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어디서나 그분의 임재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휘황찬란한 건물과 종교적인 계급체계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쳐야 합니다. 장소와 형식에 얽매인 교회는 땅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흩어져 온 세상을 그리스도로 물들이는 제사장들의 나라, 우리는 이 아름다운 새 언약을 다시금 마음에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그분의 영광을 땅 끝까지 퍼뜨리라고 자유와 권능을 얻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주위에 잃어버린 양들이 사는 어두운 곳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라는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웃을 향해서든, 열방을 향해서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저 받은 그 영광의 소망을 빛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궁금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교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예배처소 하나 허락하지 않으시는가? 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이렇게 초라하고 불안하게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것인가? 왜 아직 흩어지기는커녕 모이지도 않은 교회를 다 떠나가게 하셨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주님께서 답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세상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흩어지기 위해서는 흩어질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걸 받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걸 깨닫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기대합니다. 우리 어지니교회 부흥을 고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일하셨고, 주님께서 함께 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준비 안 된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가난할 때 남을 돕지 못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면 더 남을 돕지 못합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일 년 헌금이 오륙 백 만원밖에 안 되는 우리 교회로 하여금 다른 교회를 돕게 하시고, 몇 명 안 되는 교인마저 흩어지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 어지니교회를 흩어지는 교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즘 저는 매 주 수요일 동명 노인 복지센터에 가서 예배를 인도합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간식도 함께 나눕니다. 간식은 노인분들까지 서로 돌아가며 쏩니다. 아직까지는 쏘려는 지원자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붕어빵도 쏘고, 고구마도 쏘고, 곶감도 쏘고, 호떡도 쏩니다. 이제 다음 주 수요일에는 제가 딸기를 쏠 것입니다. 그분들과 함께 하며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기도도 몰랐던 그분들이 이제 함께 손을 잡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은 거의 모든 분들이 통증을 달고 삽니다. 그런데 그 통증이 줄어들고, 잠도 잘 자고, 무엇보다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사실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들입니다. 함께 복음성가를 부르면 손뼉을 치며 좋아합니다. 분위기 탓도 있을 것입니다.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과장된 감정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빛이 밝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저와 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어지니교회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이 비쳐지기를 소망합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흩어지라는 주님의 명령을 가장 잘 수행하는 아름다운 교회, 가장 멋진 거룩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 달 후면 우리 고운이가 떠나갑니다. 또 한 번의 흩어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흩어짐은 우리의 상처이고, 아픔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입니다. 흩어짐은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그리스도의 빛을 또 다른 필요한 지역에 비추시기 위한 주님의 일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어려운 일입니다.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께서 그 일에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감사와 감격으로 흩어짐을 받아들이며 또한 기꺼이 흩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흩어져 어디에 있던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꺼이 사랑하는 우리 고운이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테레사 수녀의 말을 전함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며, 예수님을 향해 일하고 있으므로, 결과는 그분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안내자가 필요하면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모든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확신에 넘치게 됩니다.” 그녀의 말에서 참 자유와 참 믿음을 확인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왕 같은 제사장들의 거룩한 나라.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녕 나에게 진리라면 우리는 흩어져 테레사 수녀와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며, 예수님을 향해 일하고 있으므로, 결과는 그분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늘도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녀에게 임했던 주님의 은혜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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