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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2장 4-5절(회원인가, 제자인가) - 이준원

by Preacher 2023.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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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2장 4-5

회원인가, 제자인가

이준원 목사 2015.4.15.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아기 봐주기(babysitting)인가, 세워줌(building up)인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5절)

 

오늘 본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보게 되면, 많은 교회들은 신령한 집이 아니라 이리저리 벽돌이 쌓여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신령한 집과 벽돌 더미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벽돌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은 벽돌을 모으기 위해서 애를 쓰며 자신들의 공사 현장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벽돌 더미를 아무렇게나 두면 아주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와서 훔쳐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교회 사람들이 와서 자기 교회로 벽돌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항상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벽돌들을 지키고 모아 두는 데 너무 바빠서, 정작 건물은 전혀 쌓아 올리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지금 교회들의 현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벽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도들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예배만 왔다 갔다 하며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왔다고 정말 예배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주일예배에 왔다고 해도,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예배 모임에 참석’한 것이며, 예배 모임에 참석한 것이 곧 참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기도하면서 제비를 뽑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곤 했는데, 지금은 제비뽑기보다는 다수결 원칙에 의한 투표로 교회 일들을 결정합니다. 그나마 다수결로 결정된 것을 따르면 좋지만, 어떤 경우에는 다수결조차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교인들이 이런 말을 자랑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도 따르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를 뿐입니다.” 아주 경건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크게 잘못된 말입니다. 그 말은 사실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

 

여기서 앞부분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따라가는 그것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인 저부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돼라.” 감히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로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신 뭐라고 합니까? “형제님, 자매님, 저를 보지 마시고, 사람들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말씀만을 따라가세요.”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노력은 했지만 실천은 못했습니다. 당신도 일단 노력은 해보십시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진짜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그가 교만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본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해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 이러한 바울의 방법은 결코 민주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수결도 아닙니다. 그러나 튼튼한 집, 신령한 집을 짓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 방법대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까? 그것은 증식(multiplication)의 원리와 같습니다.

 

어떤 히스패닉 할머니에게 자녀가 여섯이 있는데, 손자 손녀가 모두 36명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산을 해보니까, 그 자녀들이 계속해서 자녀를 낳게 되면 이 할머니는 200명 이상의 증손자 증손녀들이 있게 되고, 또 1,200명 이상의 고손자 고손녀들을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할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을 다 키우셨습니까?” 할머니는 대답합니다. “내가 다 키운 게 아니에요. 나는 여섯 명만 키웠을 뿐입니다.” 할머니는 자기 자식 6명만 키운 것이고, 그 자녀들은 또 자기의 자녀들만을 양육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느 덧 1200명 이상이 양육을 받고 자라나게 되는 겁니다. 교회도 바로 이렇게 될 때 건강하게 자라가고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목회자 혼자서 모든 교인들을 다 책임집니다. 소위 교회는 목사를 CEO처럼 ‘고용’해서 ‘연봉을 지불’하면서 양 떼들을 다 돌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양 떼의 숫자가 잘 늘지 않는 것 같으면 얼마든지 ‘해고’시키고 또 다른 CEO(목사)를 데려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요즘 교회가 엄청나게 비난을 받는 주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제대로 세워지기 원한다면, 벽돌을 단순히 모으는 것뿐 아니라 그 벽돌로 제대로 된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할머니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하지만, 모든 성도 각자가 제자를 삼고, 그 제자가 또 제자를 삼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고아원 원장처럼 되는 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방법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유일하게 예수님만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단지 12명의 제자들만을 택하여 키우셨습니다. 물론 70명을 따로 보내기도 하셨지만, 가장 중심은 열두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선한 목자이셨지만, 혼자서 수천, 수만의 양들을 다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혼자서 하셨으면 제자들보다 분명히 잘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한 번에 열두 명의 제자들만을 키우셨다면, 우리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잘 훈련시키셔서 집을 잘 지으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함께 모여서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도 가서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 하신 말씀대로 그들은 가서 제자로 삼았습니다. 작은 단위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고, 서로 나누기도 하고, 떡도 떼고, 교제하며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특히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제자들이 했던 방식을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한 사람이 제자를 키우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키우는 방식을 버렸습니다. 예배와 교제와 훈련과 섬김과 복음 전파가 어우러지며 나아가야 하는데, 국교가 되다 보니까 건물이 생기고 재산이 생기고 조직이 생기다 보니까, 그냥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던 것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식당으로 몰려와서 밥을 먹는 것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 여기 음식이 있으니 입을 벌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입에 쓸어 넣은 다음에는 “자, 이제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다음 주일까지 일주일 동안 당신은 알아서 사십시오. 여기서는 잊힌 존재로 살다가 다시 오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먹이면 안 됩니다. 한 아이씩 차례로 팔에 안아주며 젖병을 입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조금 크면 자기 혼자 젖병을 잡고 먹을 수 있게 되고, 더 크면 이유식도 먹도 밥도 먹고 하다가, 더 크면 부모를 도와 동생들 젖 먹는 준비도 도울 수 있게 됩니다. 자연히 가정에서 그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집니다. 이러한 방식은 세움(building up; edification)과 훈련(training)이지, 베이비시팅(babysitting)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울이 편지들을 쓸 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것은 몸 전체의 차원을 이야기한 것이지, 결코 어떤 지역 교회만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교회”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저 자신의 개 교회나 조금 더 나아가면 자기 교단을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일부와 전체를 혼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전 11:29)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일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만찬 때 사용하는 한 덩이 떡의 의미는, 비록 우리가 여러 사람이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성만찬 때 떡과 잔을 들면서 그것을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개인적 차원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그 의미의 반쪽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는 당연히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몸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 성만찬의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발을 톱으로 자르려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급히 말릴 겁니다. “아니, 뭐하는 짓이에요? 당장 그만 두세요!” 하며 말릴 것입니다. 막고 나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대답합니다. “오른발이 왼발을 밟아서 왼발이 오른발을 잘라 버리라고 말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 정신이 아닌 겁니다. 두 발은 다 한 몸에 속한 지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밥을 먹다가 혀를 탁 깨문 경험이 다 있으시죠? 입술 안을 깨문 적도 많습니다. 그 아픔은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짜 아픕니다. 그런데 이가 혀를 깨물었다고 해서 이를 모조리 다 빼버리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혀가 말을 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이를 다 빼 버려!’라고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이와 혀는 다 한 몸에 속한 지체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 원리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같은 교회의 성도를 뒤에서 욕하거나 비판하고 있다면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뜻하는 바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대적하며 해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형제자매를 욕하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자해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찌르는 것입니다. 자해를 계속하면서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이게 왜 그런가 의아해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칼로 찔러 피를 흘리게 만들어놓고는, 몸이 다쳤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가 한없이 나약하고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 내에서 상대방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그러는데, 물론 잘못된 것은 대안을 제시하면서 사랑으로 고쳐주어야 하지만, 교회 내에서 서로를 비난하며 공격하는 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길입니다. 교인 스스로가 자기 몸을 찌르고서는 몸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듯, 그리스도의 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그분의 몸을 박해합니까? 그분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상처 내고, 찌르고, 나누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큰 죄가 됩니다. 성만찬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아끼고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지 않고 계속 교회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 발을 자르려고 했던 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각 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롬 12:4-5, 새)

 

3. 회원과 제자

 

저번 주에 에베소서 4장을 살펴보았습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엡 4:16, 새)

 

만약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몸이 아니라 마치 사지를 어설프게 엮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교회의 정회원(활동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까? 대개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집회(공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둘째, 헌금을 해야 한다. 셋째, 교회의 법을 따라야 한다.’ 대개 이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되어서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면 다들 좋은 교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생활도 잘하고, 교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규칙도 잘 지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세상의 친교 단체 회원이 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친교 단체 모임에 잘 참석하고, 회비를 잘 내고, 모임의 규칙을 잘 따르면 아주 훌륭한 회원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회원’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제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특히 사도행전에 보면 그렇습니다. 삶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란 무엇입니까?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제자는 회원과는 다릅니다. 단순한 교인(member)이 아닙니다. 제자는 무엇보다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그 삶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스승이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자기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스승에게서 배워서 전수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도(discipleship)’라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지식을 전달하고 홍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제자도는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요 6:63, 새)

 

그래서 성경은 ‘제자를 삼으라’고 가르칩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제자를 만드는 것(make disciples)’을 의미합니다. 만든다는 것은 말하는 것이나 입문시키는 것이나 교훈하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제자를 ‘만든다’는 것, ‘삼는다’는 것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 역시 먼저 제자이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제자훈련 방식은 대개 지식 전달입니다. 저도 우리 교회에 와서 제자훈련을 하겠다고 왔는데, 그때 생각했던 제자훈련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식의 제자훈련은 실패합니다. 주로 이런 방법을 쓰지 않습니까?

 

“성경은 모두 몇 권입니까?” “66권입니다.” “선한 목자를 노래하며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를 노래하는 시편은 몇 편입니까?” “23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대개 이런 식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천국, 지옥, 천사, 마귀, 교회, 재림에 대한 지식을 전달합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도 모르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지식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minimum)입니다. 그런데 지식을 얻는 것을 다 되었다고 생각하니 문제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도 “삶 공부를 하시죠.”라고 하면 “아, 옛날에 다 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계속해서 하는 것이지 옛날에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이유는, 전달받은 지식을 경험하도록, 그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실제 생활에서 적용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게 진짜입니다. 우리가 목장을 처음 시작할 때 몇몇 분들이 오해를 했습니다. 목장에 와 보니까 말씀이 없다, 말씀이 약하다고 했습니다. 주일설교 내용을 5분에서 10분 정도 나누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한다는 분들이 가정교회를 보면 훈련이 약하다는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목장에서 나누는 것은, 머리로 깨닫고 배우고 마음에 깨달음을 얻은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내가 깨달은 말씀을 가지고서 일주일 동안 살아본, ‘살아본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차원이 더 높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못합니다.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고 무슨 뜻이고 하는 것은 오히려 더 쉬운 겁니다. 그런데 내가 그 말씀대로 살아보았는가?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며 나아갈 때 주님의 제자로 자라갑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식 전달이 교회 훈련의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식 전달은 최소한인데, 성구를 알고 암송하는 것 등에서 끝나 버리고, 알고 있는 말씀대로는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예수님은 이런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내일 6시에 새벽기도가 있고 그때 QT를 할 테니까 오시오. 그 다음은 대선지서, 소선지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시가서와 역사서를 공부하고, 설교학, 해석학을 공부할 것이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 순교한, 목숨까지 내어놓은 사람들을 키워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가? 너무나 단순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길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1) 바울이 로마서를 쓴 식으로 우리가 편지를 쓴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씩 자세히 풀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로마에 가서 편지를 썼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께, 로마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가족과 함께 방금 로마에 도착했고, 구경도 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쓴 편지를 여러분이 받으셨는데 이렇게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목사님이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3개월 동안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께’라는 말로 편지를 여셨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 몸속의 장기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그 깊은 사랑으로 편지를 썼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신학교에서 성경을 주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가서 바울을 실제로 만난다면, 그가 와서 어떻게 말할지 궁금합니다. 혹시 이렇게 말하지는 않겠습니까? “이거 보시오. 나는 당신이 해석한 그런 의도로 편지를 쓴 적이 없소.” 요즘 소위 성경을 잘 가르치는 분들에 대해 ‘말씀을 잘 쪼갠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게 자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정말 주님이 의도하신 제자 양육 방법인가 하는 것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제자를 길러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 양육 방법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물론 먼저 말씀을 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삶 공부도 듣고, 스스로 열심히 연구도 하고, 신앙서적도 읽고 다 하되, 그것은 미니멈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엇보다 그 중 하나라도 깨달은 것을 들고 나가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나도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고, 또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 가며, 또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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