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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이사야

사 61장 1-3절(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그 분) - 안효관

by Preacher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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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1장 1-3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그 분

안효관 목사 2019-12-2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33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미국에서 최고의 전문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신경외과 주임의사가 된 흑인이 있었습니다. 벤 카슨(Ben Carson, 1951-)입니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두 아이가 머리나 몸이 붙은 채 태어나는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1987년 뒤통수가 맞붙은 샴쌍둥이를 무려 22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손’ ‘기적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선물 받은 손』이라는 자서전을 썼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늘의 내가 된 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손은 하나님의 선물이니 그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그의 걸작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공연되었고,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늙고 병약하였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을 마쳤을 때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여자육상 100m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라고 불리며 이목을 끈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리피스 조이너(Griffith Joyner, 1959-)입니다. 그녀가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였고, 그 가운데 미국 NBC방송의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그러자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으로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1906-1965)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태극기를 걸고 우리에게 ‘석별의 정’이라고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 사인’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애국가를 작곡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애국가를 완성했습니다. 훗날 애국가가 불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애국가는 내 작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감을 조국의 백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네 명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네 사람의 이야기에서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한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람들처럼 그렇게 위대한 어떤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그렇습니다. 우리가 벤 카슨처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샴쌍둥이 수술에 성공하지 못했어도, 그리피스 조이너처럼 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어도, 하이든처럼 웅장한 곡을 만들지 못했어도, 또 안익태처럼 한 나라의 국가를 작곡하는 엄청난 일을 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먹고 마시는 작고 사소한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고, 메시아가 오심을 통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읽으신 말씀입니다.(누가복음 4:16절 이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갈릴리 회당에 가셨을 때 오늘 본문인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 4:21) 메시아를 예언한 말씀이 예수님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아가 오시면 하실 몇 가지 일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돌아온 이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당한 이후 참으로 끔찍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나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 남의 나라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다시금 고향 땅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편 137:1) 이방인들의 압제 속에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마음 놓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죽도록 일을 해도 손에 쥐어지는 것은 별로 없고, 점점 나이만 먹어가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을 하고, ‘노래를 불러서 우리를 기쁘게 하라.’고 노리갯감 취급을 합니다. 나라 잃은 설움, 포로생활을 해야 하는 고달픔에 그들은 몰래 바벨론 강변에 모여서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눈물을 기억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70년이 지나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에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시인은 또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편 126:1-2)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마치 꿈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입술로는 그 큰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기쁨과 설렘과 감격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는데,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너무나도 암담했습니다. 여전히 사회는 불의와 모순, 경제적인 불평들과 온갖 분쟁이 난무했습니다. 꿈을 안고, 기쁨과 설렘의 마음으로 돌아온 그들의 현실은 그들에게 다시금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혼돈과 불평등의 사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메시야를 통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실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라는 말은 사람들로 인해서, 특별히 세상의 권력자들과 압제자들로 인해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하면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졌습니다. 희망과 설렘과 기쁨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불평등과 가진 자들의 압제 때문에 한 시도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찢기고 상한 사람들을 메시아가 고쳐주실 것입니다. 상처 난 것을 싸매주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갇힌 자에게는 놓임을 선포할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직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혀 있는 것처럼 살던 포로들에게 놓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또 다른 압제가 그들을 억눌렀습니다. 사회적인 불평등이, 불의를 일삼는 사람들의 권력이 그들을 포로생활 못지않게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시면 그런 사회적인 불균형과 불평등, 그리고 불의한 자들에 의해서 억눌린 것에서 자유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죄의 굴레와 속박에서도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귀중한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으로 우리 인간을 억압하던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풀 수 없었던 사탄의 결박을 풀어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는 말은 간단하게 말하면 희년을 선포하신다는 뜻입니다. 희년이 무엇입니까? 희년은 모든 것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해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남의 집에 종살이를 해야 했던 사람도 아무런 조건 없이 풀려나 자유인이 됩니다. 남에게 팔았던 땅도 아무런 조건 없이 되돌려 받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빚을 지었다 하더라도 모두 탕감받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우리를 그렇게 회복시켜주십니다. ‘여호와의 보복의 날’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복수해 주시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힘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내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압제 속에서 착취를 당해도 가슴앓이만 할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셔서 내 대신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 내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느끼는 슬픔, 극복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는 절박한 감정상태를 말합니다. 죄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해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사망의 그늘 아래에 앉아서 절망의 고통을 느껴야만 했던 사람들,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런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재를 뒤집어쓰고 극심한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화관을 씌워주십니다. 근심으로 인해 마음이 눌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신다.’는 것은 기쁨으로 찬송하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얼굴과 행동에까지 드러날 정도로 기쁨의 찬송을 부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내 주변의 힘든 상황이나 불평들 때문에, 또는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로 인해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 분들 계십니까? 메시아이신 우리 주님은 그런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찢어질 듯 아픈 내 마음을 싸매주시고 어루만져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혹 우리들 가운데 죄에 눌려 신음하며 사는 분들 계십니까? 주님은 그런 우리 죄를 깨끗하게 씻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내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분 계십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 그런 내게 찾아오셔서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도록 우리의 손을 꼭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절망 중에 흐느낌조차 사치일 정도로 힘든 분 계십니까? 주님은 그런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시고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 품 안에 거하면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서 샘솟듯 솟아납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하늘의 평강이 내 마음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절망의 탄식이 기쁨으로 변하고, 슬픔의 통곡이 기쁨의 찬송으로 바뀝니다. 메시아이신 우리 주님은 그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메시아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우리의 찢어질 듯 아픈 마음을 싸매 주시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죄를 씻겨 하늘 백성을 삼아주신 것입니까? 왜 깊은 절망에서 건져주시고 기쁨의 찬송을 부르게 하십니까? 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왜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메시아,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는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신다.’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의의 나무인데,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우리가 억눌리고 압제당하고, 죄의 종노릇하느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너무 큰 절망과 깊은 슬픔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존재들인데, 우리는 이런저런 상황과 핑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태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말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우리에게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살도록 하시려고 우리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십시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보다도 나의 만족을 더 추구하며 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힘입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보다 내 힘든 삶이 해결되는 것에 더 관심 갖지는 않았는지요. 내 상처 나고 찢겨질 듯 아픔 마음을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시기를 바라면서, 그래야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만 생각하며 살진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속에 드러내는 것에는 무감각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크니이두스의 망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니이두스는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바로 왕을 위해 한 망대를 지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의 명을 따라 망대를 건축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벽의 한 돌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역청으로 그것을 가린 다음 겉에는 금으로 바로 왕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바로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일한 것처럼 가장해 놓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건축물의 외벽에 칠해진 회반죽이 떨어져 나가 결국에는 자신의 이름과 공로가 미래 세대에 길이길이 남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크니이두스 망대와 같은 짓을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닌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그리고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내가 칭찬받고 싶어 하고 내가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녀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내 것으로 가로 채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잘 압니다. 옛날에 임금님을 태우고 다니는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당나귀가 임금님을 태우고 거리에 나서면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 당나귀에는 임금님을 태운 역할에 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으로 치장을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더 환호성을 지릅니다. 어리석은 당나귀는 백성들의 그 환호성이 자신을 향한 환호성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임금님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임금님 없이 자신이 백성들의 환호성을 다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임금님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당나귀는 당장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하심 아래 머물 때에만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에만 우리에게도 영광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하나님을 내동댕이치는 순간 우리는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작은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의 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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