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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이사야

사 66장 7-9절(해산하게 하시는 하나님) - 안효관

by Preacher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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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6장 7-9

해산하게 하시는 하나님

안효관 목사 2014-09-28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 가운데 하나가 해산하는 일입니다. 귀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는 것만큼 고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고귀한 일이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대가로 여인에게 해산하는 고통이 주어졌다(창세기 3:16)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만,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나 해산은 고귀한 일임에 틀림이 없고, 해산하는 고통만큼 큰 고통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종종 해산하는 것을 비유로 하여 여러 가지 가르침을 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기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었고,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은 복음 안에 굳게 서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믿었고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어서 복음만 가지고는 구원을 이룰 수 없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복음 안에 굳게 서서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라디아서 4:19) 신앙이 성숙하지 않아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었기 때문에 복음 안에서 성숙한 신앙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복음과 믿음에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끝까지 고통과 수고를 감내하겠다는 뜻입니다.

 

해산하는 일은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때로는 해산하다가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그랬습니다. 밧단 아람으로 피신한 야곱은 거기에서 아내 4명을 통해서 12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4명의 아내 가운데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라헬입니다. 그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14년 동안이나 머슴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14년 동안의 머슴살이 결과로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라헬보다 먼저 야곱의 아내가 된 언니 레아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낳고, 레아와 라헬의 시녀 두 명을 통해서 4명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라헬에게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맨 나중에 야곱이 사랑하는 라헬이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렇게 밧단 아람에서 아들 11명과 딸 한 명 등 모두 12명의 자녀를 낳고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후에 라헬이 두 번째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베냐민’입니다. 그 때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벧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던 길에서 라헬이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난산으로 아들을 낳으면서 라헬은 무척이나 고생을 해야 했고, 아들을 낳은 후에 산파로부터 ‘당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베노니’라는 말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라헬은 마지막 아들을 낳으면서 자신의 생명이 거기까지라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 갓 태어난 핏덩이 아이가 어미 없이 자라야 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미 없이 자라게 될 아들을 생각하면서 ‘너는 슬픔의 자식이구나!’ 그런 뜻에서 ‘베노니’라고 불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그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노니’라고 그대로 짓지 않고, ‘오른손의 아들, 믿을만한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베냐민’이라고 고쳐 부릅니다. 그렇게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야곱의 막내 아들 베냐민을 낳던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라헬의 무덤은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만들어지게 됩니다.

 

아이를 낳는 일은 고통과 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론 그렇게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고 산모 역시 건강하게 해산한다면 그것만큼 큰 축복도 없습니다. 한 집안에서 아이가 탄생하는 것은 그 가정에 경사요 온 마을의 축제입니다. 오늘날도 그렇거니와 예전에는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큰 기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축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사야 1-39장까지는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던 시기를 전후로 해서 남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웃시아 왕 이후 급속도로 기울어져가는 유다 왕국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야만 왕국의 멸망을 피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던 중인 주전 721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북 왕국이 분열된 이후 200여 년 동안 북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거울삼아 남 유다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으면 북 이스라엘처럼 망할 수 있습니다. 웃시아 왕 때까지는 그래도 나라가 상당히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잘 하던 웃시아 왕이 부귀영화를 누리던 중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왕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이 해야 할 분향을 자신이 하려 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웃시야 왕은 나병에 걸러 별궁에 거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웃시아 왕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특별히 앗수르 제국이 막강한 힘을 가진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국제사회가 혼란에 빠집니다. 그럴 때 이사야 선지자는 왕들에게 애굽이나 앗수르 등 강대국들 편에 서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외칩니다. 그럼에도 남 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맙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남 유다는 비참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어야 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맙니다. 대부분의 성읍들은 불타 없어지고, 그들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겼던 예루살렘 성도 파괴되고,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파괴되고 맙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회복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주신 말씀이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인 40-6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40-66장까지의 내용은 주로 위로와 희망의 말씀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내용들이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희망을 외친 말씀 가운데 거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특별히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면서 ‘이제는 나라를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비천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꾼다면,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그 땅에 남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힘을 모아 투쟁하거나 독립전쟁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자기들도 먹고 살기 힘들고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포로지인 바벨론에서 독립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 힘으로 나라를 회복시키거나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마치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야 29:10)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70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예레미야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70년을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도, 그들은 그 말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절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앞날에 온통 고생과 치욕과 슬픈 일들만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고국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본문에서 ‘해산한다’는 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해산할 힘이 없습니다. 해산할 힘이 없다는 것은 자기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열왕기하 19장에도 비슷한 비유가 나옵니다. 남 유다에 히스기야가 통치하고 있을 때에 앗수르가 남 유다를 침공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침공해 들어온 앗수르를 대항할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전갈을 보냅니다.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열왕기상 19:3) ‘해산할 힘이 없다’는 말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항복하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어찌 항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싸울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앗수르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히스기야는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산할 힘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라를 회복시키거나 포로에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며.”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해산할 힘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무런 고통도 당하지 않고 해산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해산할 힘이 없는 여인이 힘을 들이지도 않고 아이를 낳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갖게 하셨다’는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말합니다. ‘70년이 차면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라를 회복시켜 주신다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를 갖게 하셨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회복에 대한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내가 아이를 갖게 하였은즉 해산하게 해 주겠다’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민수기 23: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사람은 때로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약속을 하고선 지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약속을 해 놓고는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해서 한 약속이라고 후회하고 그 약속을 철회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약속한 것을 꼭 지키고 싶지만 여건이 안 되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고, 때로는 약속을 지킬 능력이 안 돼서 약속을 어길 수도 있습니다. 아빠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90점 이상 맞으면 자전거를 사 줄게.’라고 약속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아빠의 약속을 믿고 아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중간고사에서 90점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약속한대로 자전거를 사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때마침 아빠에게는 자전거를 사 줄 돈이 없었습니다. 그 달에 아파트 할부금을 내야하고, 세금도 내야하고, 이것저것 들어간 돈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빠는 아이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미안하다. 꼭 사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자전거를 사줄 돈이 없구나. 나중에 꼭 사줄게.’ 그렇게 양해를 구했을 때 초등학생인 아들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해심이 많은 아이라면 ‘그래, 정말 아빠가 나에게 자전거를 사주실려고 했는데, 이번 달에는 급하게 쓰셔야 할 일들이 많아서 다음 달에는 꼭 사 주실거야.’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빠 거짓말쟁이야!’라고 토라질 것입니다. 아빠가 90점이 넘으면 자전거를 사 준다고 약속할 때 아빠는 정말로 아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90점 이상을 맞으면 자전거를 사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아이에게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원치 않게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고, 때로는 마음이 바꿔서 거짓말로 둘러대며 약속을 어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과 같지 않으십니다. 한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에 명예를 걸고 지키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실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때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는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세기 15:13-14) 그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40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기억하셨고, 약속하신대로 모세를 통해서 애굽을 징벌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될 때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애굽에서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었던 바로 왕은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재앙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이스라엘의 해방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큰 아들과 애굽 땅의 모든 가정들에서 큰 아들이 죽는 비참한 재앙을 겪은 후에야 마지 못해 이스라엘의 해방을 허락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 뒤늦게 후회하고 뒤쫓아온 애굽의 군대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약속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거든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풀려지지 않는 문제를 끌어안고 염려하고 불안해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아뢰어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힘으로 해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풀어주십니다. 고통 없이 해산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26-27)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높이려 할 때에는 높아지기는커녕 다른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에 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집사님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아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죽어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고 ‘왔느냐?’고 손만 흔들어 주신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집사님이 오시면 벌떡 일어나 맞아주시는데, 목사가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손 인사만 하는지 아십니까? 천국에 온 목사를 맞이하면서 반갑다고 일어서는 순간 목사가 그 예수님 자리를 앉아버릴까 봐서 그렇답니다.

 

우스개로 만든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합니다. 섬기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본받아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약속을 저버리는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남태평양 이야기』이라는 소설을 써서 1948년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미처너(James Michener, 1907-1997)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만찬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고등학교 은사님이신 여선생님을 위한 만찬에 참석하기로 선약이 되어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백악관에서는 120명의 유명한 학자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인데, 그 만찬에 참석하는 것보다 해나 커크 매튜스라는 65세의 은사님을 위한 조촐한 만찬에 참석하는 것이 노 선생님의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존슨 대통령에게 이렇게 글을 써 보냈습니다.

 

“소생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신 고등학교 때의 훌륭한 여선생님이 한 분 계신데, 그 어른을 위해서 베풀어질 만찬회에서 몇 마디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한 지 사흘 후에 백악관의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귀하의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소생이 백악관 만찬에 참석하지 않는다 해서 섭섭히 여기시지는 않으리라고 믿지마는, 그 고등학교 여선생님은 아마 크게 상심하실 것입니다.”

 

백악관의 만찬에 참석하는 것이 더 영광스러운 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광의 자리보다는 뜻 깊고 가치 있는 자리에 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약속에 신실해야 합니다. 내 이익이나 명예 때문에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해산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힘이 없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할 때 그것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지혜가 없어 내 앞에 있는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을 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가 풀려집니다. 해산하는 것과 같은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도 약속에 신실한 믿음으로 사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의 자리에 앉혀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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