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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데살로니가전서

살전 1장 2-5절(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 이삼규

by Preacher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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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1장 2-5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삼규 목사 20170813

낙양교회 http://nakyang.onmam.com

 

살전 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위대한 설교자 스펄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전도자의 웅변에 달려 있지 않다. 만일 웅변에 있다면 전도는 사람이 믿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설교자의 학식에 달려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전도는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혀가 녹이 슬 때까지 전하고 허파가 다 소모되어 죽을 때까지 증거 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여 영혼을 변화 시키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할 때 필수적인 두 가지, 하나는 복음, 하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두 가지를 세상 사람들은 제일 우습 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하면서 우리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복음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때 능력 없이 말로만 받아들이든지 능력과 말로 받아들이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말로 다가오든, 능력으로 다가오든 메시지의 내용은 똑 같습니다. 그런데 능력으로 복음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새 창조라고 할 만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물론 능력 없이도 복음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렇게 능력 없이 받아들이는 자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입니다.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능력 없는 신앙

 

운동선수들의 경기 방식을 관찰해보면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 방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경기를 하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경기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경기입니다. 구기종목 운동은 그 나름대로 규칙이 있고, 공이 있고, 선수가 있습니다. 운동경기는 흥미를 유발하고 즐거움을 주며 시간을 요구합니다. 경기가 끝나면 서로 경쟁하던 팀들도 웃으며 경기장을 떠납니다.

 

프로 선수들은 팀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팀을 옮긴 후에 친정팀과 경기를 치르기도 하는데 오히려 친정팀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으로 공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운동 경기의 가장 좋은 점은 스스로 부과한 수고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경기는 무엇을 변화시키거나 무엇을 해결하는 일이 아닌 즐거운 활동에 불과합니다. 물론 국가 대표가 되면 국제대회에 출전권을 확보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도 있고, 프로 선수들은 연봉과 관련이 되어 직업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보통은 취미로 합니다.

 

이것이 경기장에 국한된 상황이라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런 정신이 성소까지 들어와 하나님과 신앙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짓는다면 어찌해야겠습니까? 교회 역시 경건한 말로 이루어지는 경기를 위해 경기장과 규칙과 장비를 갖추고 있고, 비전문가와 전문가를 포함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으로 경기를 후원하거나 직접 참석해서 경기를 돕기도 하지만, 그 삶과 인격은 신앙에 무관심한 많은 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구기 종목 운동선수들은 경기를 할 때 공을 사용합니다. 공을 가지고 운동을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용하는 공은 무엇입니까? ‘말’(언어)입니다. ‘말’이라는 공을 사용하여 경기를 합니다. 말로 기도하고, 말로 찬양하며, 말로 설교하고, 말로 전도합니다. 경기장에서 재빨리 말을 집어던집니다. 우아하고 솜씨 있게 말 하는 법을 배웁니다. 말재주로 좋은 평판을 쌓고, 경기를 즐긴 이들의 박수갈채를 보상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즐거운 종교 경기가 끝난 후에도 참석하기 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그 경기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삶의 기초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옛 원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똑같은 옛 아담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능력 없는 신앙은 인생에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은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든지 고체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무능한 신앙도 여러 가지 피상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지만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형식만 변할 뿐 유형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신앙 없는 사람이나 능력 없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나 행동의 동기는 똑같습니다. 둘 다 은혜를 입지 못한 비참한 자아가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기 악을 더 잘 위장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의 죄들은 전보다 세련되고 덜 거슬려 보여도, 그 사람 자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도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꾸미고 위장하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점에서 사실은 이편이 더 나쁠 수 있습니다. 이기심이 여전히 삶의 중심에서 엔진처럼 쿵쾅거립니다. 그 이기적인 충동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법’을 익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받기는커녕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심조차 받아본 적 없는 자아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능력 없는 신앙의 희생자입니다.

 

물론 능력 없이 말씀을 받아들인 자라도 울타리의 가지치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시 울타리이기 때문에 새 생명의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 지도자가 되어 당대의 신앙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끼치고 표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큰 시험의 격랑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일꾼을 세우느냐가 중요합니다.

 

능력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복음을 능력으로 받아들이면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삶의 기초가 옮겨집니다. 일련의 새로운 동기가 영혼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새롭고 다른 영이 믿는 자의 인격 안으로 들어와 존재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관심이 옮겨집니다. 더 이상 외적인 가치의 결실성을 믿지 않으며 겉모습의 기만성을 명확하게 파악합니다. 경험이 확장되면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점점 강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이런 생각에 동의하겠지만,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엄청나게 큰 간극이 있습니다. 능력 없이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탓에 진리가 요구하는 근본적인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모종의 변화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진리에 감동받아 지적인 합의나 감정적인 합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깊은 변화, 근본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피조물”이 바뀐 것은 맞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아닙니다(고후 5:17). 바로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복음은 새 생명과 관련된 것이며, 새 차원의 존재로 출생하는 일과 관련된 것입니다. 복음이 영혼을 중생(重生)케 하지 못한다면 구원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능력(能力) 없는 말씀은 핵심 내용이 빠진 말씀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진리에는 긴급한 경고가 있으며, 복음에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듣거나 느끼지 못하는 절박함과 단호함이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 동시에 듣는 모든 자를 향한 심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회개하는 자에게는 실로 좋은 소식이지만,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경고가 됩니다.

 

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성령의 사역은 뉘우치지 않는 세상에 죄와 의와 심판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고집스러운 죄인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길 원하는 죄인들에게 주시는 무조건적인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본질상 인간의 장래 운명을 결정짓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측면을 거의 간과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유일한 내용으로 선물의 요소만 내세우며, 변화의 요소는 그만큼 무시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동의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동의를 믿음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구원받을 자와 멸망할 자의 유일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일련의 종교적 마술처럼 여겨, 믿음만 있으면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릴 뿐만 아니라 천국 문을 여는 신비한 능력까지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멸망당할 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회개하는 죄인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이 구원의 만남을 경험한 자는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이 그를 변화시키고, 자아에서 그리스도로 삶의 기초를 옮겨주며, 방향을 새롭게 잡아 주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줍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일에는 도덕적인 상태가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회개하는 죄인의 선과 악을 씻어내고 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렇다고 법적인 처리를 통해서만 구원받고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구원에는 반드시 법적인 지위의 변화가 포함되지만(칭의), 실제적인 삶의 변화(성화) 또한 포함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변화는 표면적인 변화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인간 삶의 뿌리에 닿는 깊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뿌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변한 것이 아닙니다.

 

(동영상시청)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점에서 어떠하였습니까?

 

살전 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생각하며 항상 감사했고 기도할 때 그들을 기억하였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그들에게는 세 가지 신앙적인 특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①믿음의 역사(役事)

②사랑의 수고(受苦)

③소망의 인내(忍耐)

 

믿음, 사랑, 소망은 신앙생활의 3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반드시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은 수고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소망은 인내로 이룰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신앙의 3 요소를 지닐 뿐 아니라 그것이 말로만이 아닌 열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할렐루야!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데살로니가에 전해진 복음은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능력-duvnami"(뒤나미스)라고 하는 데 그 의미는 ‘힘, 세력, 능력, 역량’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권능’이라는 말과 ‘능력’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뒤나미스’ 즉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영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능력을 말합니다.

 

②성령-‘하기오스 프뉴마’ 능력의 출처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뒤나미스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③큰 확신-‘poluv"(폴뤼스)’는 ‘많은, 큰’의미이고, ‘plhroforiva(플레로포리아)’는 ‘확신, 완전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름다운 소문난 교회가 된 것입니다.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짐으로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말로만이 아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런 열매가 신앙생활 중에 맺히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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