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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데살로니가전서

살전 5장 16-18절(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성도) - 이준원

by Preacher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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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5장 16-18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성도

이준원 목사 2012.11.18.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들어가는 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매년 추수감사절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정말로 감사하십니까? 마음에 감사가 넘치십니까? 추수감사일이 되면 가족들이나 성도들 또는 주변의 아는 분들을 초대해서 함께 만찬을 나누곤 하는데, 올해도 그런 계획이 있으십니까?

 

오늘도 점심 때 특별히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게 되는데, 집에서도 그렇게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기뻐하며 감사해야 할 날에, 오히려 음식을 만드느라 힘들어서 짜증이 나고 불평과 원망이 쌓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성분들이 그렇습니다. 전혀 안 도와주는 남편 때문에 짜증이 나고, 하나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소파에 누워 계속 먹어대며 풋볼이나 보는 아들 모습 때문에 화가 납니다. 교회에서도 함께 음식을 준비하며 나누는데, 힘들어서 짜증이 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런 마음도 듭니다. ‘괜히 Thanksgiving Day 같은 건 누가 만들어서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냐?’

 

여러분, 정말 그러십니까? 지금 뭔가 마음이 불편해서, 아니면 상황이 좋지 않아서, 아무리 추수감사절이 되었어도 감사할 게 없고 오히려 화가 나거나 괴로우십니까? 아니면 그 다음 날인 Black Friday에 뛸 준비를 하느라 체력을 기르고 계십니까? 과연 감사라는 것은, 감사할 것도 없는데 억지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1. 감사의 명령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글씨를 써서 액자에 넣어 걸어두기도 합니다. 외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짧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실 상식을 벗어나는, 정말 말이 안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6-18절)

 

여기 세 가지 명령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두 번째인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순종하기가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기도하는 것은 의지에 해당되는 것이니까 조금 노력하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교회에 나와 예배하라, 이런 것은 얼마든지 노력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이나 감사와 같은 감정은 명령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이 슬픈데 기뻐하라고 명령한다고 기뻐집니까? 지금 내 마음이 낙심되고 절망스러운데 감사하라고 명령한다고 감사가 됩니까?

 

지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서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가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더 울 것 아닙니까? 지금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에게 가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면 “장난 해?”라고 눈을 부릅뜨며 화를 낼 겁니다. 사실 슬픔이나 절망이나 낙심과 같은 마음은 내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힘들어서 그 결과로 생긴 감정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명령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명령으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며 슬퍼하는 유족을 향해 “울지 마라. 믿음의 사람은 울지 않는다. 아버님은 천국에 가셨다. 슬퍼하고 우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품에 안긴 것을 알지만,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우리가 슬플 때는 슬퍼하고 기쁠 때는 웃을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마음 상태입니다. 슬픈데 자꾸 기뻐하라고 하고 그러면, 그것은 감정을 조종하며 조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감정이 조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감정을 조작하려 들면 아주 큰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면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말이 안 된다고 느껴지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여기에는 엄청난 메시지가 숨어 있구나.’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것을 발견하려고 나아가면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은 결코 감정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결코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그렇게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또 광신자들이 있습니다. 찬양할 때 북을 이상하게 둥둥 쳐서 가슴이 뛰게 만들고 흥분시키게 만드는 것이나, 촛불을 켜놓고 조명을 이상하게 해놓아서 몽롱한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뭔가 신령한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조작입니다.

 

참된 신앙은 절대로 감정을 조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감정을 중요시하지만 조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들고 나와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힘들면 그대로 나와야지, 슬프면 슬픈 대로 나와야지,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괴로운데 기뻐하라고, 그래야 믿음이 있는 거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영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영적 태도의 문제이고 영적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도, 역시 영적 태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기쁨과 감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영적 태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감사는 영적 태도와 방향성의 문제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쁨과 감사는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영적 태도와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감사는 상황이 좋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영적 선택이다.

 

사람들은 뭔가 일이 잘되거나 자기 뜻대로 풀려 가면 감사하다고 느낍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통 사람의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보면, 일이 잘 안 되면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그런 식으로 상황을 보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상황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영적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분들이 이것을 ‘모든 일에 대해 다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잘될 때든 안 될 때든, 다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조금 후에 부를 찬양 곡의 가사처럼, 어떤 것에도 감사하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영어로 하면 'Give thanks for all things.'가 아니라, ‘Give thanks in all things, in all circumstances’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일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긴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감정 조작이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서 감사할 것을 찾아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그것 때문에도 무조건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벌어지는 어떤 일이라도 그 속에서 감사거리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기에 감사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씀하는 감사명령입니다.

 

여러분, 삶을 살다 보면 수많은 일들이 우리 삶 속에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들 중에서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 그것이 사실은 한 개가 아니라, 그 안에 많은 것들이 합쳐진 상태로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주 복합적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안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좋은 요소들도 섞여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안 좋은 요소들도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보십시오. 나에게 내려진 평가는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평가한 고위직 사람들 중에서 안 좋은 평가를 내린 사람들이 더 많았겠지만, 그 중에 나에 대해 아주 좋게 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거기에 딱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가 그렇게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것들 중에서 그저 한두 가지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이 붙들려서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받고 그것에 맞추어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마다 붙드는 게 다르니까.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 몇 가지를 붙들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마음의 평강과 기쁨과 행복과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인생이 끝없는 쓰레기 처리장이나 하수처리장 같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축복들은 제쳐놓고, 그저 깨어진 것, 아픈 것, 상한 것만 붙들고 그것만 처리하다가 인생을 다 허비해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쓰레기처리장이나 하수처리장처럼 살아갑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곳 근처에 하수처리장이 있었는데 시설은 멋져 보였지만 늘 악취가 났습니다. 아무리 잘 꾸며 놓아도 하수처리장은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면 결국은 평생 헐떡거리면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 속에서 그런 것들만 붙들고 안타까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한국 속담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좀 심각한 증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 자체만 보면,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지 많은 나무는 열매도 많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가지가 많으면 열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열매와 축복을 주시는 통로인 가지들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가지가 많으니 당연히 바람에 많이 부딪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가지에 달릴 열매는 못 보고 바람만 봅니다. 그만큼 사람은 낙관적이지 않고 부정적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며 힘들어 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힘들어 한다면, 대개 그런 것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거부하는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을 거부하라고 명령합니다.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자꾸 부정적인 것을 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이 수도 없이 많은데도, 있는 것 수십 가지가 아니라 딱 한 가지 없는 것만 보면서 괴로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인간의 죄 된 본성을 향해 오늘 말씀은 신앙적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있는 것은, 기도하며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못 보고 있어서 그렇지, 찾아보면 아직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차고 넘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적 태도와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신앙이란, 죄 된 본성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붙드는 것입니다. 신앙은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것들,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고 감사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근처 쇼핑몰에도 있는 백화점인 제이씨페니(JC Penney) 백화점을 아시지요? 제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JCPenney 백화점은 J. C. Penney라는 사람이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름의 JC가 뭔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Jesus Christ가 아니라, James Cash입니다. 자기 이름에 cash(현금)이 들어가 있으니 돈을 안 벌 수가 없습니다. cash를 긁어모은 것입니다.

 

<평생감사, 실천편>에도 이 사람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월급으로(주급이나 시간당이 아니라) 한 달에 $2.27를 받고 점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며 고생하다가 자기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40대 때 주식회사로 전환했는데 1929년에 주식 파동과 대공황이 발생했고 그때 잘못 판단을 해서 엄청난 돈을 잃었습니다. 그 후 그는 낙담하고 고민하며 실의에 빠졌고 그때 대상포진을 앓게 되었습니다. 밤마다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으로 너무 아팠습니다. 잃어버린 것들, 실패한 것들에 대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54세의 나이에 병실에서 뒹굴며 그렇게 고통스럽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병원 채플에서 찬송하며 기도하는 예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그때 그것을 들으며 영적으로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그때 일을 생각하며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철저히 어둠의 동굴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빛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찬란한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서 제 삶은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붙잡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여 그가 은퇴할 때는 1,600개의 점포와 연간 4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날 무엇을 붙잡은 것인가가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때 무엇을 붙잡았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있습니다. 나중에 그가 은퇴한 목회자들을 위해 100채의 집을 지어서 바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봉헌식에서 그가 한 인사말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됩니다. 페니가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때 그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아직도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참다운 복이 온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가 발견한 빛은 감사의 관점 전환이었습니다. 다 잃어버린 줄 알고서 다른 것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관점이 바뀌면서, 자기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한 달에 $2.27 받고 시작했을 때에 비하면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데 내가 왜 지금 이러고 있는가!’ 이것을 그는 발견한 것입니다. 이 발견이 그를 살려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명령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감정을 조종하고 조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영적 선택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상황은 동일하지만 해석이 달라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해석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집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감사의 상황이 주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오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이든 감사하기를 선택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결단이 감사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가 감사하기를 선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감사는 우리 삶을 걸고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며 약속이다.

 

신앙에 있어서의 감사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삶을 걸고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이며 성취입니다. 그냥 상황이 좋으니까 감사하고 기뻐하는 상황에서 오는 감정의 흐름이 아니라, 우리 삶을 걸고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고 끝이 아닙니다. 그 뒤에 뭐가 붙어 있습니다. 뭡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원하시는 바가 있으셨습니다. 혹시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고 영이시니까 아들이 죽을 때 우리처럼 고통스럽지 않으셨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양보해서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이것은 하나님의 불명예입니다. 아들이 그런 끔찍한 죽임을 당한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얻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의 삶과 얼굴에 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얼마나 기다리더라도, 나는 너희 인생에 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상황을 보고 슬퍼하고 힘들어 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것은, 그냥 힘드니까 내가 당연히 할 수 있는 나의 권리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때로는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계속 잡혀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죄입니다. 성경이 명령하는 것은, 지금 슬픈 상황에서 기쁜 감정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감정 조작입니다. 감정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무너집니다. 슬플 때는 슬플 수 있고,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기쁠 때는 춤을 출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지금 그렇게 억지로 감정을 끌어 올리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거기에 맞추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정의를 그렇게 내리라는 것입니다. 때로 나는 아플 수도 있고, 실패하여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되는 게 없다고, 불행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들더라도, 내 삶을 그것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 삶은 원래 이렇게 재수가 없어. 내 삶은 원래 되는 게 없는 삶이야. 내 삶은 원래부터 외로운 삶이었어. 내 삶은 원래부터 이렇게 힘든 삶이었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있지만, 그러나 결국운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며, 나는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는 결단을 내리며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명령입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기분이 지금 기뻐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는 감정이라면, 너무 힘들다면, 지금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인 줄 알고 그냥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내게서 떠나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럼 떠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런 감정들은 떠나라고 명령하십시오. 왜 그렇게 합니까?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분하고 억울합니까? 나가라고 명령하십시오. 두렵고 고통스럽습니까? 열등감이 들고 피곤합니까? 나가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떠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해도 안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라!” 했는데 안 되니까, ‘가만, 그리스도가 빠져서 그러나?’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날지어다!” 그런데도 안 되면 또 다시 ‘나사렛이 빠져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라!”고 하는데, 그래도 안 됩니다.

 

그럴 때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의 감정은 사실처럼 보이지만 감정은 속임수입니다. 절대 그때 느끼는 감정에 근거해서 내 삶을 확정지으면 안 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지나갑니다. 절대 그 감정에 머물러 있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면서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너를 향한 나의 뜻이 기쁨이고 기도이고 감사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면, 그런 감정은 지나가고 기쁨과 감사가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약속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상황이 주는 감정에 근거해서 결정하지 마십시오. 내 삶은 그런 상황과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가는 말]

 

이 미국이 지금은 많이 세속화되고 여러 종교들이 들어와 있지만, 원래는 그런 성경적 신앙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미국에는 많은 절기들이 있습니다. 부활절, 성탄절, 또 귀신 놀음을 하는 할로윈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만이 미국의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이 나라의 기초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영국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청교도들이 많은 곳으로 떠났는데, 그 중 네덜란드로 갔던 126명이 63일간의 항해를 통해, 메이플라워(Mayflower)라는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을 벌러 온 것도 아닙니다. 그 땅이 힘든 곳인 줄 알고 왔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며 예배하겠다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 바로 겨울이 닥쳤습니다. 오두막을 짓고 사는데 얼마나 혹독한 겨울이었는지, 그 해 겨울이 지나고 그들 중 1/3이 넘는 44명이 죽었습니다. 봄이 되었는데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 땅의 원주민 인디언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되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고 씨도 주었습니다. 그것을 뿌려 농사도 지었습니다. 많은 기록들에 의하면, 그때 농사가 잘되어서 가을에 풍작을 거두었고,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3일 동안 축제를 벌인 것이 첫 번째 Thanksgiving Day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연구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실은 그렇게 풍작을 거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별로 농사가 잘되지 않고 그저 조금 거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도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축제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에 대해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말로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니까 이것은 추수에 대한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대개 곡식을 거두는 10월에 해야지 왜 11월 말에 합니까?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Thanksgiving Day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2년 뒤 메사추세츠 주지사인 윌리엄 브랫포드(William Bradford)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당시 30대 초반에 불과한 사람이었는데, 주지사로서 칙령을 내렸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곡식을 내려주셨고, 사냥감이 많은 땅과 물고기가 많은 바다를 주셨다. 야만적인 원주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셨고, 흑사병과 각종 질병으로부터 지켜주셨으며, 또 양심을 따라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행정관인 나는, 그대들 순례자들 모두, 그대들과 아내들과 어린 자녀들이 화합처에 함께 모이고, 오전 9시와 12시 사이, 주후 1623년, 곧 그대들 일행이 이 터전에 상륙한지 제 3년 11월 29일 목요일에, 그대들의 목사로부터 말씀을 들으며 축복을 받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을 선포하노라.”

 

그러니까 Thanksgiving Day는 추수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그것을 포함해서 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린 날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지만, 첫 발을 내딛으면서 첫 방향을 감사로 잡은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비록 절반 가까운 사람들을 땅에 묻었지만, 착한 원주민들을 보내셔서 살려주시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셨으니 감사하다는, 이런 감사의 조건을 찾은 것입니다. 상황이 좋아서 감사하기로 한 게 아닙니다. 비록 혹독한 상황이라도 감사로 바꾸어주실 것을 우리는 믿는다고 방향을 그렇게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땅에 첫 발을 내딛은 날을 생각하며 Thanksgiving Day를 정했습니다. 이 나라는 그런 방향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 사는 우리도 이때뿐 아니라 사실은 매일이 Thanksgiving Day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정신으로 매일 살아야 합니다. 잘 찾아보십시오. 분명히 감사할 수 있는 것을 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삶의 태도와 방향을 그렇게 잡아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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