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2장 15-25
낙천적인 신앙
손병호 목사
화평성결교회 [의정부시] http://whttp://www.hpehc.org
삼하12:15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설교자: 손병호목사
낯선 남자와 만날 때 자신에게 웃음을 준 남자에게 호감을 갖고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LG 경제연구원에서 회사가 불황이나 구조조정 같은 어려움이 있을 때, IQ 좋은 사람, 머리가 똑똑한 사람보다는 EQ 감성지수가 높은 직원이 힘을 발휘한다는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이 동료와의 좋은 관계로 맺으며 슬기롭게 잘 풀어 나가고 이직율로 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기업들이 유머감각이 있는 직원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유머는 긴장을 풀어주고 여유를 갖게 해 줍니다. 어떤 부인이 있었는데 남편만 만나면 말끝마다 “당신이 뭘 알아요?” “당신이 뭘 아는데?” 하면서 시비를 걸고 남편한데 늘 달려들던 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인에게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응급실로 실려와 있으니 빨리 와달라는 전화였습니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이미 남편은 죽어서 하얀천으로 뒤집어 쓰고 있었습니다. 허구헌날 남편을 구박했던 부인은 더 이상 구박할 수 없는 남편을 보니 서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데, 남편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는 하얀천을 슬그머리 내리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나 아직 안죽었어!” 그러자 깜짝 놀란 부인은 울음을 뚝 그치면서 남편에게 소리를 버럭질렀습니다. “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웃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사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을 때, 자연이 웃음을 잃어가고 여유가 없으니까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목숨걸고 하는데 이러한 때일수록 반전할 수 있는 힘인 웃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낙천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어려움을 만나도 웃음과 긍정의 힘으로 잘 극복해 나갑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견디기 너무 어려운 고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다윗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 앞에서 진정한 낙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이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나가는를 살펴보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배경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간음죄를 저질렀고 임신을 했습니다. 그리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우리야 장군을 교묘한 방법으로 죽게 했습니다. 우리야가 죽자 다윗은 그의 아내 밧세바를 차지하였고 그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치셔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15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사실 밧세바에게서 낳은 그 아이가 죽을 것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12장 14절에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이가 죽으리라고 하는 메시지를 다윗은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아이를 위하여 간구하되 금식하였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다윗의 어떠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까?
1. 다윗은 현실인정하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볼 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게 있고 바꿀 수 없는 불변의 것이 있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전도대상자자 주께 돌아오는 것 바꿀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당장은 그가 불신앙적이고 마음이 강팍해져 있어요 그러나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전도할 때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다 당장은 그가 불신앙적이고 강팍해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요? 그래야 내가 더 눈물로 기도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바뀌어질 수 있는 것이 있지만 어떤 것은 바꾸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있단 말입니다. 기도해도 안되고 금식해도 안되고 아무리 떼를 써도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이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 아이를 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포기해 버려야 합니까? “맘대로 하세요 죽이시든지 살리시던지....뜻대로 하십시오!” 그래야 할까요?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왜요?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죽고 난 다음에 다윗이 한 고백입니다.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어려움을 만났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에전에 저희집 큰 애가 기억으론 6살 때 였던 것 같은데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기침을 아주 심하게 콜록콜록 하는 거에요 먹은 것을 다 토할 정도로 기침을 심하게 해서 아내가 이러다 천식으로 진행되면 안될 것 같으니까 오늘은 좀 병원에 다녀오라고...그런데 제가 그날 병원에 안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이 아이를 만져 주시면 된다’라고 하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이 속도 모르고 자꾸 병원에 갔었어야 한다는 시비를 걸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럼 우리 만원빵 하자고...기침이 안멈추면 내가 만원을 내고 멈추면 당신이 내라고. 제가 만원을 위해서 기도하였더라면 전 문제가 있는 사람이죠. 하나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더니 시간이 좀 지나서 기침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무조건 기도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병원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긍휼을 여기는 분이심을 믿기에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기도해도 안될 것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거절당할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긍휼이 여길자이심을 믿고 기도해야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며 일주일을 금식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는데, 신하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 “네 죽었나이다” 이 때 다윗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오늘 말씀의 포인트입니다.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아이가 죽자, 다윗은 “왜 데려갔습니까? 일주일을 금식을 기도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봤는데, 이토록 금식기도한 것이 무슨 소용이랍니까?”이렇게 원망하고 좌절한 것이 아니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주일 동안 씻지 않았기에 깨끗이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발르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먼저 하나님께 경배하였고, 그리고 난 다음에 명하여 음식을 차리게 하고는 맛있게 먹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낙천적 태도를 곁에서 지켜본 신하들이 이상한 거에요 아이가 다 죽어갈 때는 따라 죽을 것처럼 일어날 생각도 않고 먹지도 않고 하더니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일어나 목욕하고 예배하고 맛있게 밥을 먹다니...“드디어 올 것이 왔구만. 너무 충격을 받으셨나봐” 이에 다윗의 대답입니다.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은 현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돌아오게 하고 싶다고 해서 돌아올 수 없기에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물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바꿀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적인 낙천적인 모습이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다윗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목욕재개를 하고 먼저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을 때 어떻게 죽었느냐. 장례절차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따지지 않았고 먼저 하나님께 먼저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를 잃은 슬픔이 큰데...일주일동안 금식기도 하느라 피골이 상접해 있었으을 텐데. 좀 쉬었다고 나중에 해도 되는데...왜 다윗은 먼저 예배의 자리로 나아갔을까요?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려가셨지만 생사화복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은 여전히 경배를 받아 마땅하시다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주목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설교만 듣는 시간도 아니요 찬양만 하는 시간이 아니에요. 예배는 하나님께 써비스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프로그램도 아니고 부흥의 방법도 아닙니다. 다윗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예배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하셨던 것은 다윗에게는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삶의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번에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상식이 있지 않습니까? 배아래 물로 채워져 있는 선박복원력의 핵심인 평형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평형수의 역할이 배가 좀 기우뚱해도 복원력을 갖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번 세월호는 2030톤의 복원수를 채워야 하는데 4분의 일가량인 580톤 밖에 채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화물적재량인 1077톤보다 2배 가량인 2144톤을 실어서 운송료 6,200만원을 더 벌려했다는 거예요. 화물을 두배로 싣기 위해서 채워야 할 평형수를 4분의 1로 줄여버리고 475명의 고귀한 생명을 담보로 목숨을 건 운항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살행위를 한 것 아닙니까? 이런 상식 밖의 일을 처음부터 했겠습니까??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평형수를 줄여왔겠죠. 10분의 1 줄이고 8분의 1, 5분의 1, 줄이고...그러다 4분의 1만 채우고 다니다가 대형사고가 난 것 아닙니까? 인간의 욕심이 낳은 대형참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잡아주는 평형수가 있습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쟎아요 좀 흔들리는 때가 있어도 평형수가 제대로 채워져 있으면 이것이 다시 복원력을 발휘합니다. 이 평형수 역할을 해주는 하나님과 관계를 기본이 되는 힘이 바로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는 교회의 평형수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존재 이유 중 중요한 이유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위기입니다.
미국에서 911쌍둥이빌딩 참사가 날 때는 그 주 주일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었대요 그런데 이번에 세월호 사건 때 한국교회는 모여드는 것 같지 않아요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무기력하게 오래동안 보고만 계십니까? 이상한 상상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왜 이 땅에 고난이 있는지, 왜 이러 사건들이 있는지 성경에 답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지요.
느헤미야 리더십을 보게 되면 백성들이 바렐론 70년 포로생활 끝에 돌아와 보니 예루살렘 성은 무너졌지요. 성문이 불타고 곳곳이 다 무너져 있는 거예요.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조상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탓하지 않구요. “내 탓입니다. 내 죄 때문입니다. 내가 무너진 이 성벽을 재건하면 됩니다.” 이러한 책임의식을 가진 느헤미야 한 리더로 인하여 다시 재건되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원로 목사님 20여분이 자신들의 종아리를 때리면서 회초리기도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누구의 탓으로 돌이기 전에 내 탓이요, 내가 책임 지겠습니다. 세상 나라는 해경을 해체한다 사람을 바꾼다...조직을 바꾸어야 한다. 난리가 나고 있는데 교회는 아무런 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면 되지 않지요.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예배를 무너뜨린 것은 내 탓입니다. 내가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회복되면 됩니다. 이런 분이 진정한 리더아닙니까? 그러면 위기극복은 아주 쉬운 것 아니겠습니까? 돌아와야 합니다. 기본에서 벗어나 있는 신앙, 퇴보하는 신앙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얼마든지 은혜를 주십니다. 예배를 시작으로 일상으로 돌아온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다윗이 그렇게 울며 불며 기도했는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훌훌 털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통해 누구를 주십니까? 솔로몬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그 불의한 여인, 다윗이 불의한 일을 저질러 숨진 그 아이의 엄마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이 태어나도록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라는 것입니다. “여디디야”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라는 거에요.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던 그 눈물의 기도를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다 할 수 없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 아닙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십니다. 인간의 죽고 사는 것, 축복과 저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분 앞에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가장 최선인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 다 무너진 현실 앞에서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겠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기본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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