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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사기

삿 6장 11-18절(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 안효관

by Preacher 202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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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6장 11-18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안효관 목사 2015-11-2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여러분, ‘얼짱 각도’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을 때 자신의 얼굴을 가장 예쁘게 나오도록 찍는 각도를 얼짱 각도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옆면은 45도 각도로 하고, 얼굴보다 15도 정도 위에서 찍는 것이 얼짱 각도입니다. 카메라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듯이 찍고, 눈을 지긋이 지켜 뜨고, 얼굴은 약간 기울여 찍는 것이 얼짱 촬영법입니다. 사람마다 얼굴의 좌우 대칭이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얼굴은 정확하게 좌우대칭구조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얼굴의 왼쪽과 오른쪽이 다릅니다. 그래서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을 때와 오른쪽 얼굴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을 때, 그 모습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얼굴이라 하더라도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얼굴이 더 작아 보이기도 하고, 더 가름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쪽에 카메라를 놓고 위를 향해서 찍으면 콧구멍이 크게 나옵니다. 반대로 위쪽에서 아래쪽을 향해 사진을 찍으면 아래에서 찍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됩니다. 손의 위치를 어디에 놓느냐 하는 것도 얼짱 사진을 찍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똑같은 얼굴이지만, 사진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예쁜 얼굴이 되기도 하고, 밉상스런 얼굴 사진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진을 잘 찍으면 얼굴에 있는 점도 가릴 수 있고, 별로 자신 없어 하는 부분은 감추고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부각해 나타나도록 사진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물이 그렇습니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물건이든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추하게 보이기도 하고, 날카롭거나 부드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 안에 화분을 하나 갖다 놓아도 이러 돌려보고 저리 돌려 보면서 가장 예쁘게 보이는 쪽이 어디인지를 찾아서 위치를 잡습니다.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와 각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건 비단 우리가 보는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이나 성품도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라 보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보기에 괴팍하고 고집불통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왜 저래? 사람이 아주 못됐어! 완전 고집불통이야!’ 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을 다르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 참 순진해,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감이 있어.’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의 같은 성격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고집불통이라고 그래서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같은 사람의 같은 성격을 보면서 마음이 한결 같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내가 바라보고 싶은 각도에서만 그 사람을 평가하려 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옛날의 모습을 가지고 오늘의 그를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를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나라는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서 엄청난 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나라는 힘이 없었습니다. 주변의 강대국이 침공해 들어오면 그대로 당해야 했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시대에 일본군들에 의해서 식량을 강탈당하고 심지어 일제 말기에는 대동아전쟁에 쓸 군수자금과 물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쌀과 곡식뿐만 아니라 모든 쇠붙이까지 다 빼앗아간 것처럼, 그의 나라도 꼭 그와 같았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추수한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소나 양 등을 키우면 그것들 또한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다 빼앗기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시절에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그 나라에는 그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상황에 한 젊은이가 침략국의 군인들이 두려워 몰래 숨어서 곡식을 탈곡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추수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다 빼앗길 것같은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 몰래 숨어서 추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살던 당시 그 사회는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불법이 판을 치고, 거짓이 난무했습니다. 그 때 한 의로운 사람이 나타나 죄악을 버려야 한다고, 거짓을 버려야 한다고 외치지만 아무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한 젊은이가 사람들 몰래 곡식을 탈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온 나라가 그렇게 적국에 의해서 침략을 당하고 수탈을 당하는데 젊은 사람이 저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탈곡을 하다니!’ 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죽 하면 그렇게 하겠어. 비록 겁쟁이이긴 하지만 그 청년이 그렇게 하는 것 이해할 수 있어.’ 라고 조금 더 너그럽게 생각해 주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래도 그 사람 대단하네. 곡식을 모두 약탈당하지 않고 자기 먹고 살 것은 숨겨놓고 탈곡할 수 있다니.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일세.’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청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그 청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지 우리는 그 청년이 처한 상황을 다 알 순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탈곡할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남겨놓았는지도 알지 못하고, 몰래 숨어서 탈곡하는 그 청년의 마음이 어떤지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청년이 한 몇 가지 행동만을 가지고 그 청년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청년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큰 용사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 청년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이 살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미디안을 사용하셨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와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파종을 할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까지 불러들여서 곡식을 파종한 한 논과 밭을 다 짓밟아버렸습니다. 아예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래 농사를 지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예 장막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 땅에다가 장막을 치고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감시를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몰래 농사를 지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소나 양이나 나귀 등도 남기지 않고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이스라엘 땅에 들어온 그 침략자들이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사사기 6:5절에서는 ‘메뚜기 떼 같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예 농사를 짓지도 못하게 하고, 몰래 지어놓으면 그것까지 빼앗아 가버리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농사만 짓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침략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참히도 괴롭혔습니다.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침략자들의 괴롭힘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사기 6:2절의 기록에 의하면 침략자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집에서 살 수가 없어서 산에다가 웅덩이와 굴을 파놓고 거기에 들어가 숨어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산 세월이 무려 7년이나 되었습니다. 7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상황을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먹고 살기 고달픈 정도가 아니라, 언제 침략자들의 손에 붙잡혀 죽을지 모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언제 침략자들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지옥과 같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드온은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밀을 타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몰래 숨어서 타작을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기드온은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밀을 타작할 때에는 언덕 위에서 합니다. 바람이 잘 부는 언덕 위에서 밀을 타작해야 쭉정이를 바람에 날려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포도즙 틀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포도즙을 만들 수 있는 큰 그릇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을 잘 다진 후에 그 땅에서 포도즙을 짰습니다. 커다란 틀을 만든 후에 거기에다가 수확한 포도를 다 담아놓고서 발로 밟습니다. 그러면 포도들이 으깨어지면서 포도액이 나오는데, 그것을 한 곳에 모아서 가죽부대에 담습니다. 으깨어진 포도에서 나오는 포도액을 모으기 위해서는 포도즙 틀은 가장 낮은 지대에 만듭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손실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밀을 포도즙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잘 통하는 높은 언덕에서 타작을 하면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자신이 밀을 타작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낮은 지대인 포도즙 틀에서 타작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은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 등 침략자들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렇게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서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는 기드온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을 부르는 첫 마디가 ‘큰 용사여!’라는 말이었습니다. ‘큰 용사’라는 말은 ‘능력 있는 용사’라는 뜻입니다. 룻기 2:1절에서는 같은 말을 ‘유력한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재산과 덕망, 그리고 큰 세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기드온이 실제로 그 지역에서 그렇게 큰 용사, 재산과 덕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겠습니까? 본문 15절에서 기드온은 자신을 ‘지극히 약하고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결코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지역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미칠만한 덕망을 갖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큰 세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조차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내세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약하고 가장 작은 자인 기드온을 찾아오셔서 ‘큰 용사’라고 불러주셨겠습니까? 분명 그는 작은 자입니다. 약한 자입니다. 그리고 미디안 사람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나중에 기드온은 정말 큰 용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스라엘 전역에서 미디안 군대와 싸울 군사를 모집하는데, 3만 2천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숫자도 많다고 하시면서 최종적으로 300명만을 데리고 가서 미디안과 싸우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그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메뚜기 떼와도 같이 많은 미디안 군대(사사기 7:12)와 싸워 이깁니다. 그 때 기드온의 모습은 정말 큰 용사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자일뿐입니다. 약한 자이고 자신보다 큰 세력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입니다. 큰 용사라고 불릴만한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큰 용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현재 모습을 보시고 큰 용사라고 불러주신 것이 분명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불러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부르시면서 이어 하시는 말씀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너는 큰 용사라는 말입니다. 자기 가문에서 극히 약하고 자기 아버지 집에서조차 가장 작은 자인 기드온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기드온은 분명 큰 용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약한 자라도 크게 쓰임 받을 수 있고, 작은 자라도 큰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작고 초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처갓집 양이나 치고 있던 무명의 목동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와 함께 하마.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따라 모세는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낸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도 아주 약한 자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새의 집에 가서 이새의 아들들을 하나하나 만나봅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의 눈에 큰 아들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될 만한 위엄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사무엘 앞에 불려오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이새의 생각에 ‘내 자식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뽑는다면 막내 다윗은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는 사무엘 앞에 부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가장 약하고 부족한 다윗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고, 그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도 권세 있고 학식을 갖춘 사람을 뽑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시하는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세계를 복음으로 변화시키실 큰 꿈을 갖고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들은 결코 큰 용사들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사람들입니다. 무기력한 사람들입니다. 할 줄 아는 게 고기잡이 외에는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고, 세계를 변화시킬 큰 꿈을 꾸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19-20절에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결코 큰 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그리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를 향하여도 ‘큰 용사’라고 불러주십니다. 우리가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가 되면 우리도 큰 용사입니다. 능력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큰 용사들입니다. 거대한 세력인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용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작고 약한 기드온을 향하여 ‘큰 용사’라고 부르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비록 작고 약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정말로 큰 용사로 쓰임 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보실 때 언제나 우리의 지금 모습만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보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약하고 가장 어린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이유도 그의 속사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다윗은 왕이 될 만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여리고 연약합니다. 감성이 풍부해서 시도 잘 짓고 노래도 잘합니다. 악기도 잘 다룹니다. 그런 다윗은 어려서부터 감성적이었고 여린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순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에게서 위대한 능력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형들을 제쳐두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드온도 비록 자기 가문이나 집안에서는 가장 연약합니다. 침략자들의 눈이 두려워서 몰래 숨어서 탈곡을 해야 할 정도로 두려움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드온의 모습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큰 용사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향하여 ‘큰 용사’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에는 부족한 것이 참 많습니다. 연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쓰실 때에는 나를 큰 용사로 쓰십니다. 내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거나 그런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쓰실 때에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 쓰시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큰 능력을 주셔서 크게 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용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을 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쓰신다면 나는 큰 용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뿐만 아니라, 그런 동일한 시각으로 형제와 이웃을 보아야 합니다. 비록 내 주변에 있는 그들이 지금을 별로 볼품이 없고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사라고 부르신다면 우리도 그를 용사로 보아주어야 합니다. 그에게서 허물이 보이고 약점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거룩한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형제를 대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 주변에 있는 사람 가운데 우리가 무시하거나 멸시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형제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나도 소중할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도 동일하게 다 소중합니다. 우리가 그런 시각으로 내 형제를 볼 줄 안다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리 보여집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아름다운 것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볼품없게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시각으로 그를 보느냐에 따라서 그를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는 때로 내가 보고 싶은 각도에서 그 사람을 보고서 그를 좋지 않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때로는 나의 감정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런 우리의 잘못된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말입니다.

 

어제 만난 그 사람을 오늘은 다른 모습으로, 더 좋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바꿔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꿔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십시다.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지금을 비록 작고 부족한 것이 많을지라도 내 안에서 ‘큰 용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허물 많은 그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랑스런 사람으로 그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작고 연약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큰 용사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큰 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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