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6장 25-27
큰일을 하기 전에
안효관 목사 2018-03-18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노인이 몸보신을 위해 칠면조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노인이 키우던 그 칠면조를 훔쳐가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도 노인의 아들들은 ‘그깟 칠면조 한 마리?’라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아들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칠면조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둑맞았다는 사실이다. 칠면조를 찾아라.’ 그렇게 말하는데도, 아들들은 그 말에 신경 쓰지 않고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번에는 낙타가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아들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버지께 물어옵니다. 그 때 노인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칠면조를 찾아라.’ 낙타를 잃어버렸는데 칠면조를 찾으라는 아버지의 그 말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에는 소중히 기르던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 때에도 노인은 아들들에게 ‘칠면조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에 강도가 들어 재산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칠면조 때문이다. 칠면조를 빼앗아 가도 괜찮다고 그놈들이 알게 되었기에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이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교훈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조금 의미는 다릅니다만, 우리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그냥 아무렇지 내버려두면 나중에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작다고, 그래서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되는 나쁜 버릇 하나가 조금씩조금씩 커지면 나중에는 땅을 치고 후회할 큰 범죄자가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작은 일을 초기에 다스리지 못하면 나중에 그것이 엄청난 태풍과 같은 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에서 칠면조를 잃어버렸을 때 ‘칠면조를 찾으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처음 도둑이 들었을 때 그 도둑을 잡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도둑이 들었을 때 그 도둑을 잡지 않고 내버려두면 ‘저 집은 도둑질을 해도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서 계속 도둑들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처음에 단단히 단속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뭘 하든지 처음이 참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하느냐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듯이,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시작하느냐 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나머지 단추들도 제자리를 찾아 바르게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사 시대 기드온에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400년 동안 노예생활하던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와 가나안 정복에 나섰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있던 그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땅을 각 지파에 분배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약 16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지도자는 사라졌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시고 건져 주셨습니다.
그 사사 가운데 한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받은 직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악을 행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의 압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7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7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의 압제 아래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제가 일제의 압제 시대에 살아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를 받았던 35년의 세월보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의 압제에서 고통당했던 때가 훨씬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디안의 압제 아래 놓였을 때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에 올라가서 산에다 웅덩이와 굴을 파고 거기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 파종을 하면 미디안 사람들이 올라와서는 농작물 곁에다 진을 치고 앉아서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고, 겨우겨우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다 빼앗아가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축을 기르면 그것까지도 다 빼앗아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증언합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사사기 6:6)
그런 상황에서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기드온은 300명의 정예용사를 이끌고 가서 미디안 군대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 침공해 들어와 있는 미디안 사람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메뚜기 떼같이 많았다.’ ‘사람과 낙타의 수가 무수해서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았다.’(사사기 6:5, 7:12) 가히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사들이 침공해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줄을 쥐고 누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미디안 군사와 싸우러 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불과 300명이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러 갈 사람 모이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약 3만 2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숫자가 너무 많다고 줄이라고 하시더니, 결국 300명만 있어도 된다고, 그 숫자만 데리고 가라고 하셔서 300명을 데리고 가서 미디안을 쳐서 무찌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을 치러 가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드온은 원래 미디안과 맞서 싸울 만큼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으로부터 사사로 부르심을 받을 때 그는 남의 눈을 피해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밀을 타작하는 곳은 넓은 마당이나 들판입니다. 그리고 밀과 함께 섞여 있는 검불을 제거하는 일은 바람이 잘 부는 언덕이나 구릉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반면 포도주는 낮은 지역의 땅에 큰 구덩이를 파서 포도주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포도즙을 짭니다. 그러기에 포도주 틀이 있는 곳은 낮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바람이 잘 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이 바람도 잘 불지 않는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한 이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을 타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밀을 타작하고 있다는 것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곡식을 모두 빼앗길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기에 몰래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는 기드온을 찾아가 ‘네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기드온이 보인 태도를 보아도 그는 용감한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듣는 순간 기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사사기 6:15) 기드온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만한 어떤 자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가문으로 보아도 미약한 므낫세 지파에 속한 사람이고, 자기의 집안에조차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자기 스스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심지어 지금 메뚜기 떼와 같이 어마어마한 숫자의 미디안 사람들이 침공해 있는 상황에서 그 미디안 사람과 싸울만한 그 어떤 힘이나 지도력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드온을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가서 메뚜기 떼와 같이 많던 미디안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만한 자격도 없고 용기도 없다고 말하던 그 기드온이 어떻게 300명을 이끌고 가서 미디안 군대를 쳐서 무찌르는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너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에 네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그 말씀에 용기를 내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고 마음 먹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날 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는 7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내야 합니다. 그리고는 높은 산성에다가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낸 그 나무를 가지고 그 제단에서 7년 된 그 수소로 번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에서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왜 그런지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밤에 종 열 명을 데리고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날 온 동네에 난리가 났습니다. 누가 감히 이런 일을 벌였느냐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난리를 피운 이유가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의 신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알을 ‘폭풍우의 신,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비와 폭풍우를 주관하는 신이기에 바알에 의해서 농작물이 풍년이 들기도 하고 흉년이 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아세라는 가나안 백성들이 섬기는 최고의 신인 엘(El)의 아내이자 바알의 어머니입니다. 때로는 바알의 아내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아세라 역시 풍요와 복을 주는 신으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아세라의 특징은 나무로 만든 신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바알신은 제단으로 존재하고, 아세라는 제단 곁을 지키는 나무 조각상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기드온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의 침공 때문에 아주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풍요를 안겨다 주는 신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더욱 끔찍하게 섬겼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그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다면 이제 그들에게 풍요의 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궁핍하게 살고 있는데, 자신들에게 풍요를 주는 신을 파괴해버렸으니 그 마을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제거했기에 자기들은 꼼짝 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의 말씀에서처럼,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린 기드온을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만큼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분노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때에 ‘두려워서 감히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몰래 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거해야만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사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미디안 군대를 자기들의 땅에서 쫓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을 구석구석에 존재해 있는 바알과 아세라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미디안 군대가 이스라엘 땅에 침공해 들어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미디안을 자기들의 땅에서 쫓아내는 것도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이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지금 미디안 군대를 쫓아낸다 한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에게서 손을 거두지 않으시는 한 미디안 군대는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알과 아세라를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가리켜 ‘네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드온이 살던 오브라라는 마을에서 섬기고 있던 바알과 아세라는 분명 그 마을 소유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을 소유인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관리하는 사람은 기드온의 아버지였습니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옵니다.
기드온이 밤에 종들을 데리고 가서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아침 마을에는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이 정성스럽게 섬기던 신당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기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사라짐으로 인해서 더욱 큰 궁핍과 가난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찾아내 죽이자고 흥분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금방 그 주인공이 기드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26절 말씀처럼, 아세라 목상을 찍어내고 그 나무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그 번제를 드린 장소가 ‘산성 꼭대기’입니다. ‘산성 꼭대기에서 번제를 드렸다’는 말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를 찾아가서는 기드온을 당장 죽이겠다고 노발대발했습니다.
그 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바알이 정말 살아 있는 신이라면 자신의 제단을 파괴한 사람을 가만 나두겠느냐?’ 그러면서 오히려 기드온 편을 들어 줍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물러가고 맙니다. 이 사실로 보건대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바알의 제단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기드온의 아버지가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관리하는 총책임자였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함으로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첫 번째는 아버지는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불태워버린 기드온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요아스만은 기드온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관리하는 총책임자였다면, 누구보다도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한 기드온에게 화를 내야 마땅합니다. 자기가 관리하는 것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전적으로 기드온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기드온은 가장 든든한 아군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와 싸우러 갈 때에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막강한 미디안과 싸우러 갈 사람을 모집할 때 아무도 기드온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기드온은 곧 기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를 쓰신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그와 함께 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모습은 자신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버지는 자기편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데 가장 앞장 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미디안과 싸우러갈 때에, 막강한 무기로 무장한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그 미디안을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가봐야 분명 전쟁터에서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편이 되어줄 수 없는 아버지가 자기편이 되어 준 것처럼,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도 아무도 용기를 내어 함께 하지 못할 상황이지만 그 상황이 분명 바뀔 것입니니다. 기드온은 그런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기드온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입니다. 온 마을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린다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해 보니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기드온은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밤에 몰래 가서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기드온의 생명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에게 정말 용기를 주는 일입니다.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3만 2천 명도 많다고 하시면서 사람을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실 때,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음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모두 돌아가라’고 외쳤습니다. 만 명이 남았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숫자도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결국 300명만 남기셨습니다. 그래도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 300명만을 데리고 미디안 군대와 싸우러 갑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메뚜기 떼에 비유된 미디안 군대와 싸우려면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합니다. 3만 2천 명이 많은 것이 아니라, 그에 갑절을 가져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군대의 숫자를 줄이고 줄여서 300명만을 데리고 가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만을 데리고 가서 미디안과 담대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니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깊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그런 깊은 은혜의 체험을 하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결단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고 담대하게 그 사명의 길을 가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감에 있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제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불신앙과 내부의 적을 남겨두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큰일을 감당함에 있어 먼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게 하시고, 불신앙적이고 제거해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내면을 성결하게 하고, 바른 믿음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첫 번째 점령지인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앞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할례를 행하게 하셨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적군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신 후에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하셨고, 가나안 땅 점령을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뭔가 큰일을 함에 있어 먼저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 준비는 어떤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 앞서 무기를 준비하고 군사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 내면의 적부터 제거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결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드온을 도우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준비하는 그 과정 속에서 말입니다.
'구약 -------------------- > 사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삿 6장 11~18절(기드온의 믿음) - 김준범 (0) | 2023.07.04 |
---|---|
삿 6장 11-16절(기드온을 부르신 하나님) - 이백민 (0) | 2023.06.29 |
삿 6장 11-18절(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 안효관 (0) | 2023.06.22 |
삿 7장 2-8절(하나님께서 쓰시는 용사들) - 배혁 (0) | 2023.06.16 |
삿 7장 2-8절(기드온 삼백 명) - 강대식 (0) | 2023.05.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