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사사기

삿 9장 1-6절(내 이름은 아비멜렉입니다) - 안효관

by Preacher 2023. 5. 17.
728x90
반응형

삿9장 1-6

내 이름은 아비멜렉입니다.

안효관 목사 2016-02-07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나중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젊은 나이에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지혜롭게 나라 일을 잘 하는 것을 보고, 바로 왕은 그에게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주어 결혼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에서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낳게 됩니다. 첫아들을 낳자 요셉은 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의 뜻은 ‘잊어버린다.’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잊어버린다.’는 뜻을 가진 므낫세라고 지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동안 힘들었던 모든 과거의 기억들,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이제 다 잊어버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아니 이제 국무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지난날의 모든 고통과 힘든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41:51절에서 요셉이 자기의 첫 아들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여러분, 요셉이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될 때까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제 막 열일곱 살이 지났을 때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노예생활이라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요셉이 팔려간 그 집은 바로 왕의 시위대장의 집입니다. 애굽에서도 상당한 권력가의 집입니다. 당시에 권력자들은 노예를 굉장히 많이 두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노예들 가운데 요셉은 비록 나이가 어리고 곱게 생기긴 했지만, 굉장히 많은 노예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에 누울 때까지 죽도록 일만해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요셉 역시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점차 인정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주인인 보디발의 눈에 띠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긴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주인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그 집에 가정 총무가 되어 어느 정도 육체적으로 힘든 것을 면할 때 즈음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요셉은 그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버립니다. 그럼으로 해서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요셉은 어쩌면 노예생활보다 훨씬 더 힘든 생활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힌 전직 고위공무원의 꿈을 해석해주는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주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 과정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갈 때 그 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전혀 낯선 땅 애굽에 와서 스무 살도 안 된 그 어린 나이에 매일같이 죽도록 일만해야 했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고통의 기간이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평생 죽도록 일만하다가 죽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같이 일만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더군다나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때에는 그것을 뿌리쳤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감옥에 갈만한 짓을 해서 감옥에 갔다면 혹시 모를까, 죄도 짓지 않았는데 감옥에 갔을 때 요셉의 마음속에 억울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억울함과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감옥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모든 과정을 겪은 후에 이제는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도 꾸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난 날 겪었던 모든 괴로움과 고통, 힘든 것들은 다 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준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겠지만, 자신을 미워하고 그래서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에 대한 미움은 잊을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일도 해보지 않았던 자신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와서 죽도록 일만 해야 했던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의 고통이나 치욕도 다 잊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당했던 억울한 일들도 다 잊었습니다. 이제는 다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것을 다 잊게 될 정도로 지금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둘째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습니다.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은 ‘창성하다, 풍요로워졌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애굽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 이름을 ‘창성하다’는 뜻을 가진 에브라임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올 때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평생 죽도록 일만 하다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에서 해방된 정도가 아니라 애굽 전역을 관리하는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최고의 가문인 제사장 가문의 사위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아들을 둘씩이나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많이 낳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가문이 창성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성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식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짓진 않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고, 그 아이에게 어떤 복이 임하기를 원하는지 하는 부모의 마음을 담아 아이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성경 시대에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 이름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의미를 담아 그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지어주었겠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버멜엑의 아버지는 유명한 사사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미디안을 물리친 용감한 사사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7년 동안이나 압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이스라엘 상황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집에서 생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 속에다가 웅덩이나 굴을 파고서 거기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눈에 띄면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미디안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상책이기 때문에 멀쩡한 집을 놔두고 산속에 웅덩이나 굴을 파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농사를 지을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몰려와서 농사를 지어놓은 것을 다 빼앗아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미디안 사람들과 아말렉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와서는 토지의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남겨두지 않았다.’(사사기 6:4)고 말입니다. 심지어 양이나 소나 나귀와 같은 짐승들도 다 빼앗아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굶어죽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보내주셨습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도 미디안 군대가 ‘메뚜기 떼와 같이 많다’고 표현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에 침공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미디안 사람들인데 그렇게 많은 숫자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있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300명만 데리고 가서 미디안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300명만을 데리고 가서 미디안 군대와 싸워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민족의 영웅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려달라.’는 것입니다. 당신 같이 위대한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아니 당신의 가문이 대대로 왕족이 되어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 물론 기드온은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사사기 8:2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40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친 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땅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를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사사를 보내셔서 그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주셨을 뿐입니다. 사사는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쓰시기 위해서 사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과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변 나라들은 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왕정국가들이었습니다. 왕이 통치를 하면 그 왕이 나중에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왕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신(神)처럼 되어버립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랬습니다. 애굽도 바로라고 하는 왕이 거의 절대적인 힘을 가진 권력자였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추앙을 받으면서 거의 신적인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통치하거나 사람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왕이 되시는 사회를 건설하시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기드온은 그런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어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 다음에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한 뒤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여러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아들 하나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기드온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는 뜻을 가진 아비멜렉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앞서 요셉의 이야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에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그냥 의미 없이 짓진 않습니다. 분명 그 이름에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의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이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기드온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에 분명하게 거부했습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왕이 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께서 왕이시기 때문에 자신은 왕이 되지 않겠다고 아주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서 그는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기드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사기 8:24절 이하에 보면, 자신이 왕이 되기를 거절한 후에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것 가운데 금귀고리를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으로 추대하고 싶었으나 기드온이 왕이 되기를 거절하고 대신 금귀고리를 달라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기들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가운데 금귀고리를 기드온에게 줍니다. 그렇게 해서 기드온이 백성들에게 얻은 금귀고리가 무려 1,700세겔이나 됩니다. 한 세겔은 11.4g입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백성들에게서 얻은 금의 무게는 약 5,200돈, 거의 20kg에 육박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입니다. 기드온은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의 성읍으로 가져가 보관하였습니다. 에봇은 원래 대제사장이 입는 조끼와 같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그것을 입고서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봇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대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금으로 그 에봇을 만들어 자기가 사는 마을에 두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성소였던 실로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고 하면서 기드온이 사는 성읍으로 가서 그 에봇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가 살고 있던 성읍에 그것을 두어 백성들이 그리로 찾아오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에봇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인 실로에 찾아가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임에도, 기드온은 사람들이 그 에봇이 있는 자기의 고향으로 찾아오는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 앞에서는 자신이 왕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신이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마치 왕이 된 것처럼 백성들이 자신을 칭찬하고 칭송해 주는 것을 기대하고 즐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기드온이 점차 자신이 왕과 같이 추앙을 받게 되자 아예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아들을 낳고서 ‘네 아버지는 왕이야!’ ‘너는 왕의 아들이야!’ 그런 뜻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런 유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전부이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우리는 때로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치워버리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유혹이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내가 왕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싶은 마음을 안고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고, 내가 누리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을 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내 삶의 자리가 견고해지고, 사회적인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우리는 그런 유혹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네가 왕이야!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야! 네가 네 주변의 사람들을 다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그런 유혹 말입니다.

 

기드온도 그랬습니다. 기드온이 처음 사사로 부르심을 받고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하실 때에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은 기드온의 대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사사기 6:15)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큰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랬던 기드온인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미디안을 무찌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왕이 되어달라는 요구는 거절했지만, 거절한 이후 점점 자신이 왕처럼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에봇을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게 했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내 아버지는 왕이야!’라는 뜻을 가진 아비멜렉이라고 지으면서 은근히 자신이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그런 유혹을 받고서 그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유혹을 받고 있고, 우리도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드온이 죽고 난 후에 그의 가정에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왕이야!’라는 뜻을 가진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자기 형제 70명을 모조리 죽이고 맙니다. 물론 그 중에 단 한 사람만 목숨을 건졌습니다만,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인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형제들을 다 죽이고, 자신이 세겜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비멜렉이 3년 동안 왕노릇하다가, 결국 그 아비멜렉도 세겜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끔찍하게 죽고 맙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70명 가운데 요담이라는 아들 하나만 남고 모두가 죽임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기드온의 집안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은 기드온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비멜렉이 어려서부터 아버지 기드온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왜 내 이름이 아비멜렉이예요?’ 그럴 때마다 기드온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사실 네 아버지인 나는 왕이 될 사람이야. 그래서 네 이름이 아비멜렉인거야.’ 그러면서 지난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아비멜렉은 ‘이담에 크면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반드시 왕이 되고 말거야.’ 아마도 그런 생각을 누누이 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자신이 왕이 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욕심이 작을 때에는 잘 모릅니다. 그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을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이 내 안에서 자라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그 욕심의 노예가 되고 그 결말은 사망이라는 비극을 낳고 맙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나는 그렇게 욕심이 많지 않아!’ 라고 생각하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드온은 정말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기드온인데 그런 기드온도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었고, 그 결과는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런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자주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나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내 욕망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십니다.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우리 안에는 아직도 ‘아비멜렉’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고, 아비멜렉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아직도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