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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사사기

삿 11장 1-4절(큰 용사 입다) - 허창수

by Preacher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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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1장 1-4(40)

큰 용사 입다

허창수 목사 18.02.04

동성교회 [창원시] https://https://cafe.daum.net/huhcs48/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습니다. 성경에 ‘큰 용사’라는 분이 몇 분 있습니다. 그중에 기드온도 ‘큰 용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불렀습니다(삿6:12). 기드온은 큰 용사로서 이스라엘을 7년 동안이나 괴롭히던 미디안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을 ‘큰 용사’라고 하였습니다(왕하5:1).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아람은 구원한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입다는 암몬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큰 용사’입니다.

 

그런데 입다의 출신성분 토대가 좋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길르앗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길르앗은 입다의 아버지 이름이라기보다는 길르앗에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입다의 아버지는 성경에 이름을 밝힐 만큼의 존경이나 유명세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나 봅니다.

 

입다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기생입니다. 기생은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비천한 창녀입니다. 입다의 아버지는 부인이 있고 아들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람을 피워 기생에게 낳은 아들이 입다 입니다. 입다의 출생은 매우 불행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2)고 하며 멸시하고 하물며 집에서 함께 살 수 없도록 쫓아냈습니다.

 

‘큰 용사’는 한 마디로 싸움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누구와도 싸우면 지지 않고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싸워야 할 사람과 싸우고 싸워서는 안되는 사람과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입다는 아버지의 아들들이 쫓아낼 때 얼마든지 싸워서 이길 수 있었지만 싸우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어느 교회에 모 장로는 사임을 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 다시 돌아와서 장로로 시무하게 해 달라고 목사를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사가 다른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는데 그 장로가 청빙하는 교회 장로들에게 찾아가서 목사를 청빙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여 목사는 다른 교회로 옮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큰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큰 용사는 싸워야 할 사탄 마귀와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지 말아야 할 사람과는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큰 용사 기드온에게도 첩에서 낳은 아베멜렉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삿8:31).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이 죽은 후에 형제 70명을 한 자리에서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 얼마 후에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삿9:6,3). 입다도 아버지의 아들들과 싸우면 얼마든지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의하면 기생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과 싸우지 않고 쫓겨났습니다.

 

입다는 돕 땅에 가서 거주하였더니 잡류가 모여 입다와 함께 하였습니다. ‘잡류’란 ‘무익한’, ‘쓸모없는’이라는 뜻으로 실패한자. 빚진 자, 억울한 자, 쫓겨난 자를 의미합니다. 입다와 같은 부모나 형제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사람들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이 입다에게 모여왔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아둘람 굴에 숨었을 때, 환난을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 잡류 400명이 모여 왔습니다. 다윗을 찾아온 잡류들은 다윗을 돕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600명이 되어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다윗을 따르고 다윗이 싸우는 자와 싸우는 훌륭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입다에게 모여든 잡류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입다를 중심으로 뭉쳐 막강한 능력 있는 군인이 된 것입니다. 그때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합니다. 길르앗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암몬 자손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장로들이 모의 의논하여 입다를 다시 데리고 와서 장관을 삼고자 했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입다가 막강한 군사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소문을 들어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와서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합니다. 입다는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고 말합니다(7).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워 이기면 당신은 우리의 머리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입다를 길르앗의 머리가 되게 하리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당시 왕이 없기 때문에 왕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가르치고 치리하고 다스리는 사사로 모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때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에게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9)라고 말하므로 확답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입다의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입다는 여호와께서 이기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이라고 말한 것은 여호와를 믿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비록 출신은 자랑스럽지 못했지만 믿음은 좋았습니다. 형제들이 쫓아낼 때도 그들과 싸우지 않고 쫓겨난 것도 역시 입다의 온유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기업을 받을 것임을 믿었습니다(마5:5).

 

그리고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미스바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아뢰었습니다(11). 다윗이 대적을 싸우기 위해서 나갈 때마다 여호와께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라고 물었던 것처럼, 입다도 암몬과의 싸움을 여호와께 아뢰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믿었던 다윗의 믿음이 입다에게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여호와께 아뢰이고 여호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입다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싸우기 전에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암몬 왕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합니다(13). 마치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하듯이 길르앗이 자기 조상들의 땅이라고 하며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느라’고 하며 지난 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올라 갈 때 에돔 왕에게 에돔 땅을 지나 갈 수 있도록 말하였으나 에돔 왕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에돔과 모압 땅을 돌아서 모압 경계를 따라 가는데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의 길을 막고 치려고 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입다는 민수기 21장에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길에 일어났던 일을 입다는 정확하게 알고 그 땅은 우리 땅이기 때문에 돌려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올라가는 역사적인 사건을 잘 알았습니다. 이때 입다가 그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몰랐더라면 ‘그래 그 땅은 너희 땅이 맛구나’ 라고 하며 그 땅을 돌려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날 한국교회가 어떠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 한국교회가 일본의 신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질 뻔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경남노회가 3년 동안 ‘일본기독교 한국장로교단 경남교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남노회에 속한 주의 종들이 일어나 싸워 다시 한국교회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래서 경남(법통)노회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길르앗)이 살고 있는 땅을 돌려달라고 하는 아모리 족속은 모압과 암몬 자손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해서 동침해서 낳은 자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암몬과 모압은 롯의 아들 에돔의 후손들이고, 이스라엘 자손은 야곱의 열 두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때 롯의 자손인 모압과 암몬 자손들이 길을 열어 주지 않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돌아서 지나가는데 아모리 족속이 길을 막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쩔 수 없어 아모리 족속을 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땅을 돌려 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입다가 암몬 왕에게 지혜롭게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3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라고 말합니다. 더욱 재미있는 말은 ‘너희가 섬기는 신 그모스가 네게 준 땅이라면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은 우리 땅이지 어떻게 너희 땅이냐’고 말했습니다(24).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너희에게 돌려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입다의 확고부동한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입다는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모리 족속을 물리치고 빼앗은 역사를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도 그 땅을 빼앗기 위해 다툰 일이 없었거늘 네가 어찌하여 그 땅을 달라고 하느냐’고 하며 우리가 거주 한지 300년이 넘도록 찾지 아니하였다가 이제 돌려달라고 하는 것은 합당하냐고 따졌습니다(25,26). 그러나 암몬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결국은 입다는 암몬 자손과 싸우고자 했습니다.

 

암몬과의 싸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암몬은 군사가 막강한 반면 길르앗은 암몬을 대적할 만한 군사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다에게 도와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입다 역시 암몬을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암몬 자손에게 나아갈 때에 여호와께 기도를 했습니다.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하며 기도 하였습니다. ‘서원’이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것을 바치겠다는 맹세나 서약입니다. 서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므로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케 해줄 것을 소망하면서 서원을 하였습니다. 입다는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31)라고 서원하였습니다. 인신 제사를 드리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고대에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제사가 아니며 이교적 관습이었습니다.

 

입다가 이러한 인신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할 수가 있었던 것은 입다가 자라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데서부터 아버지의 가르침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쫓겨나 이방인들의 땅에서 이방인들이 자기 자녀들을 불을 통과하게 하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누구든지 자기 집 문에서 제일 먼저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암몬과의 싸움은 이겼고 승리하여 집으로 돌아올 때 제일 먼저 무남독녀인 자기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영접하는 것입니다(34). 그때 입다는 자기 옷을 찢으며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며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변개할 수 없었기에 서원을 이행해야 하는 참담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입다는 사랑하는 딸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그 후로 입다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말년을 불행하게 살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하는 것은 입다와 같이 잘못된 신앙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장년공과 공부를 예배 전에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장년공과 공부가 사라졌습니다. 구역예배도 공과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장년공과 공부를 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한 주간 예배 한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는 시간은 불과 30분 정도입니다. 설교는 성경을 풀어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설교를 절에 염불처럼 명상하며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졸다가 설교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성도는 입다와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흥회(사경회)를 통해서 성경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성경을 배우고자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자본주의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돈이 소리를 치고 권력이 난무합니다. 말씀에는 귀를 막고 듣지 않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입다처럼 우리도 큰 잘못된 신앙에 빠져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입다처럼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배워서 말씀대로 살아서 끝까지 변함없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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