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 --------------------/신명기

신 32장 10-14절(자기의 눈동자 같이) - 안효관

by Preacher 2023. 7. 16.
728x90
반응형

신32장 10-14

자기의 눈동가 같이

안효관 목사 2018-09-0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을 때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사면초가(四面楚歌)입니다. 이 말의 유래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나옵니다. 춘추전국 시대에 진(秦)나라가 멸망한 후 초(楚)나라의 항우(項羽)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천하를 다투면서 5년 동안이나 전쟁을 했습니다. 초나라의 항우나 한나라의 유방이나 오랜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쳐있던 전쟁 4년째가 되던 해 가을이었습니다. 항우가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가족들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을 맺었습니다. 홍구(鴻溝)의 동쪽은 초나라가, 서쪽을 한나라가 가지기로 한 것입니다. 휴전협정을 체결한 후 항우는 약속대로 동쪽으로 철수를 시작했는데, 유방은 협정을 위반하고 항우를 공격해 왔습니다. 결국 다시금 항우와 유방이 해하(垓下)에 진을 치고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의 군사는 10만 명인 반면,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의 군사는 모두 6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군사의 숫자가 여섯 배나 많은 한나라의 군사가 초나라의 군대를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말았습니다. 초나라의 군사들은 한나라의 군대에 포위된데다 군량마저 떨어져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나라의 군사들이 초나라의 군사들을 심리적으로 동요시키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당시 초나라를 중심으로 한 남방의 노래를 초가(楚歌)라고 하는데, 감상적이고 애잔하여 구슬프기 짝이 없는 노래였다고 합니다. 고향에 부모와 처자식을 두고 온 초나라 군사들은 그런 구슬프고 애잔한 고향의 노래를 들으면서 향수병에 빠지게 되었고, 사방에서 그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초나라의 항우는 자신의 군사들이 모두 한나라에 항복한 줄 알고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항우는 싸움에서 대패를 하게 되었고, 계속 쫓기다가 오강(烏江)에 이르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인 초가(楚歌)가 들려온다는 말로, 사방이 적들에 둘려쌓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태를 뜻합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그런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거친 광야의 한복판에 혼자 버려진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삶의 길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습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가족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가면서 밤늦게 숙소를 찾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차마다 내비게이션을 갖고 있어 초행길이라도 별로 힘들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데, 예전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어 미리 지도를 보고 가야할 길을 공부한 후에 자동차를 운전해야 했습니다. 이분도 가족들을 데리고 밤운전을 해야 하기에 지도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초행길인데다 캄캄한 밤인지라 지도 공부한 것이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이 맞겠거니 하고 앞만 보고 열심히 가는데, 뒤를 보니까 자기 차 뒤에 다섯 대 정도의 차가 뒤따라 오더랍니다. 그래서 ‘아, 내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계속 가는데, 가다 보니까 어떤 유원지가 나오고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돌려 다시 나오는데, 자기 뒤에 따라오던 다섯 대의 차들도 모두 방향을 돌려서 또 자기 뒤를 따라 오더랍니다. 뒤에 오던 다섯 대의 차들도 모두 자기처럼 길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앞에 가는 차만 따라가면 된다.’ 싶어서 따라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혹 그런 경험 없으십니까? 차를 운전하다가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관찮습니다. 다시 돌려 나오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가 그런 경험을 하게 될 때에는 참으로 막막합니다. 때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캄캄한 밤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주위가 온통 낯선 것들뿐이어서 내가 제대로 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합니다.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저 주저앉고 싶을 뿐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가다가 그런 상황을 만나면 그래도 서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 그런 막다른 골목 앞에 서면 외로울 뿐만 아니라, 마음에 두려움이 휘몰아쳐옵니다.

 

여러분,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때로는 그런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를 도와줄 손길이 아무도 없는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가 부른 일명 ‘모세의 노래’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신명기 32:2절부터 시작되어 43절까지 기록된 이 긴 노래는 지난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회상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 속에 살면서도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가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요단강 앞에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면서 모세의 마음은 마치 어린아이를 강가에 내놓은 어머니의 심정 같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광야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욕심에 끌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삶을 살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교훈하는 노래를 지어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모세의 노래’ 앞부분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0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지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배반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왔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도 그들을 포기하거나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면 이 고백은 모세만의 고백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곧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감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백처럼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 광야는 황무지입니다. 황무지인 광야는 주위를 둘러보아도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밤에는 몸을 꽁꽁얼게 만드는 추위가 있을 뿐입니다. 간혹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광야는 우리 인생으로 말하면 막다른 골목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과도 같은 황무지에서, 아무도 없고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만 멀리서 들려오는 그 광야에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이스라엘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바로 그런 곳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독감과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을 바로 그 때 - 바로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며 지켜주시는 손길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 인기척도 없는 광야의 절대 고독의 순간에 그 고독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이요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마감할 즈음인 이 때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독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보니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고독하고 외로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였던 것입니다. 왕이 행차할 때면 주위에 수많은 군사들이 왕을 둘러싸고 호위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렇게 자신들을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눈동자같이 지키고 계셨더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살았는데, 그 40년 동안의 삶은 수없이 많은 절망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은 한 순간도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을 만나 주시고, 그들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곁에서 한 순간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들을 인도하셨건만 왜 그들은 그걸 알지 못했습니까?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방법은 특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고 해서 모든 것이 평화롭고 언제나 만사가 다 형통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보호하시는 방법을 본문 11절에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연단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독수리는 새들의 왕입니다. 용맹하고 강한 날개를 자랑하는 공중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독수리가 그렇게 새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강한 훈련 때문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를 밀어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끼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해서 날개를 힘껏 저어봅니다. 날개에 힘이 없는 새끼 독수리들은 힘껏 날개를 저어보지만 이내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새끼의 날개에 힘이 다 빠져서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추락하게 되면 재빨리 그 강한 날개로 새끼를 받쳐서 새끼가 죽거나 부상을 입지 않도록 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새끼들은 계속 힘찬 날개짓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다가 떨어지면 또 어미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안전하게 받쳐서 둥지로 데려갑니다. 그런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새끼들도 날개에 힘을 얻게 되고 어미 독수리처럼 강하고 튼튼한 날개를 가진 하늘의 왕자들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40년 동안 살아왔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평탄하고 아무런 걱정이 없는 그런 삶으로 인도하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 하는 심한 갈증을 느껴야 했고,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파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때로는 전쟁과 질병 때문에 여간 큰 고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40년 동안 그들의 삶은 한 마디로 험난한 고생의 현장에서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그들을 고통 가운데 방치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 마실 물이 없거나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그게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강한 민족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들을 연단하여 강한 독수리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연단하셨는데,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강하고 아름다운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마냥 우리에게 좋은 길과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목마르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프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에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사업은 잘되는데 내가 하는 일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빚을 지게 하실 수도 있고, 부도의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십니다. 건강을 잃게 만드실 수도 있고, 때로는 자녀를 통해서 아픔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아내나 남편을 통해서 마음 아픈 일을 경험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행복하고 단란했던 가정에 큰 근심의 먹구름이 드리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독수리가 새끼를 강하고 튼튼한 독수리로 만들기 위해서 사랑하는 새끼를 둥지에서 내어 밀치는 것처럼,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가시거나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시는 순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연단을 잘 이겨내면 우리도 강한 십자가의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연단과 훈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강한 십자가의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군인이 훈련을 잘 받아야 좋은 군사가 됩니다. 고된 훈련을 잘 견뎌야 좋은 군사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훈련을 잘 받으면 좋은 십자가의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신 덕분입니다. 때로는 환난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고독과 외로움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훈련의 작품이 지금 우리들의 이 모습입니다.

 

여러분! 삶이 힘들 때, 그리고 어려움이 삶에 밀물처럼 밀려올 때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사랑의 방법임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7) 하나님께서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금보다 더 귀하여,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견디기 힘든 그런 상황으로 내몰면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이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참으로 혹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포기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할 때도 있습니다. 너무 견디기 힘들고 지칠 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셔서 고통 가운데 방치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0절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동자 같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눈이 어떤 곳입니까? 눈은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고, 가장 약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관입니다. 조그마한 이물질만 들어가도 상처 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약한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눈썹도 있고 눈꺼풀도 있고 눈물도 있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많은 것으로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약하지만 정말 귀한 것이 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을 가리켜서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마태복음 6:22-23)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마만큼 눈은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약하디 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소중하게 다루시고 가장 소중하게 취급해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광야로 내몰고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질병과 전쟁터에 내팽개쳤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눈동자 같이 소중하게 생각하셨고 조금이라도 다칠까봐 염려하시면서 그들을 보살펴 주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려서 연단시키시는 것처럼 냉혹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약해지거나 이스라엘을 소중하게 않게 다루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나 소중했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눈동자같이 소중하게 인도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이 뭐가 잘났다고 그들을 그토록 끔찍이도 귀하게 여겨주시고 눈동자처럼 지켜주셨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충분한 조건을 갖춘 민족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강한 민족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40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철저하게 가난하고 없는 자로 살아왔습니다. 주권도 없었고, 자유도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소중하게 여김 받을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토록 소중하게 인도해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말고는 다른 어떤 이유로도 ‘눈동자 같이 소중하게 여기시며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유는 우리가 잘 나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부유하고 남들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깊고 넓고 긴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원수되었던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셨던 그 귀한 사랑을 다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크기 때문에, 너무나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8-19)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속에서 주어진 놀라운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평하고 원망해도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인도하시면서 40년 동안 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인도함을 받은 것은 그들에게 어떤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광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3-14절에서는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사랑으로 연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질 가나안 땅의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광야에서 연단 받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주어질 놀라운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40년의 연단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 간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어떤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연단학교를 졸업해야만 합니다. 축복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광야와 같은 길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눈동자 같이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연단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야 삶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연단받은 그런 삶의 길을 오늘 우리도 걷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연단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시고 너무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으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불평하고플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를 당신의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연단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단을 통해서 보다 더 강하고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성숙해져 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힘든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를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가 막다른 골목과 같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더라도 바로 거기가 하나님의 연단의 장소임을 깨닫고 이겨 나가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막다른 골목같은 우리네 삶의 끝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져 주십니다. 그 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십시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