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4장 1-4
우리가 만들어갈 공동체
안효관 목사 2015-02-01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 항공사와 외국 항공사를 넘나들며 국제선의 1등석 객실을 담당한 전직 스튜어디스인 일본인 미즈키 아키코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비행기에서 퍼스트클래스(1등석)는 일반 좌석의 3%정도에 지나지 않고, 운임은 일반석의 5배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 LA로 가는 비행기의 일반석 운임이 120만원이라고 한다면 퍼스트클래스의 운임은 약 600만 원 정도나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 상위 3% 안에 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퍼스트클래스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하면서 그들이 왜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관찰하고서 그것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글을 쓴 것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적인 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책의 제목처럼, 그들은 승무원이나 다른 사람에게 펜을 빌리지 않습니다.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고, 자신만의 필기구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메모는 실수를 줄일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두면 그것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됩니다. 그래서 ‘적자생존’이란 말도 있습니다.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은 신문을 가져다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신문을 보는 대신, 언제나 책을 읽습니다. 대부분이 독서광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합니다. 신문은 그 날 그 날 일어난 일들을 알려주긴 하는데, 일목요연한 정보나 지식을 제공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은 투박하고 묵직하지만 자신에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전기나 역사책 등을 많이 읽습니다.
세 번째로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은 말을 정중하게 하고 대화를 잘 이끌어갑니다. 한때 문제를 일으켰던 대한항공 부사장처럼 승무원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를 부탁할 때에는 ‘바쁜 중에 미안 하지만 무엇무엇 좀 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정중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대화의 전문가들입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물으며 대화를 계속 이어갑니다.
네 번째로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은 자세가 다르다고 합니다. 일단 자세가 바르고, 시선의 각도가 높고, 당당합니다. 행동거지에서 뭔가 위엄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은 같은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그 인맥이 나중에 자신에게 커다란 자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내에게 극진하다고 합니다. 늘 아내를 존중하고 아내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잘 듣습니다. 물론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라면 상무나 땅콩 회항과 같은 일들도 벌어지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은 뭔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공했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습관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은 분명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평번한 우리들과 뭔가 다른 모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뭔가를 이룬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의 심리 속에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은 분명 퍼스트클래스를 탈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어떻습니까? 신앙인 아닌 누군가가 신앙인인 나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한 후에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쓴다면 어떤 내용의 글이 나오겠습니까? 퍼스트클래스에 타는 사람들에게서 그들만의 특징을 발견했던 한 전직 스튜어디스처럼, 신앙인인 나에게서 신앙인만이 갖고 있는 뭔가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신앙인에게는 분명 세상 사람들과 다른 뭔가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3절에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각을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저는 이 말이 우리 신앙인을 특정지우는 가장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을 두려워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2장은 이렇게 말씀을 이어갑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세상 사람들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칭송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따라 살 수 없는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는 성도의 교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닮아갈 수 없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의 성숙한 신앙, 성숙한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우리를 보고 두려워하고 칭찬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하는 성령의 은사가 많은 것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는 것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고 칭찬받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서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다른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다주면서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게 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세상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도 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무소유로 산다고 하는 위대한 스승들도 다 돈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단지 그 욕심을 절제할 뿐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런 욕심들을 절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소유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재물에 대한 욕심, 돈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고 살아가는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세상 사랑들이 칭찬했습니다. 칭찬에 머문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며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두려웠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그렇게 하게 만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는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그 몸의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1: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말씀하고 있고, 골로새서 1:18절에서도 ‘예수님은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결코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교회에서 주인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목사도 교회의 주인이 아니고, 교회를 개척한 사람도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로 세우신 예수님만이 주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머리)으로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 때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내쫓고 그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서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에서 하나님을 음성이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싸움질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인간이 주인노릇하려 하니까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이기적인 욕심에 지배된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교회 안에 거짓된 모습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과연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여주었던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런 교회와 그런 성도들에게 칭찬하는 말들을 해 주겠습니까? 한국교회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이 주인노릇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부르심’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 가운데 살던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불러주셨다는 말씀은 세상으로부터 꺼내 주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비를 뽑듯 우리를 뽑아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제비뽑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교회 공동체 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사람들입니다. 성격도 다르고, 태어난 배경이나 자라난 환경도 다 다릅니다. 배움의 정도도 다르고, 삶의 습관이나 모습도 다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다른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한 공동체 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오늘 본문 3절에서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힘써 지키라는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불러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셨는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금 떼어놓으려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됨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도록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가 되었는데, 그것을 허무는 악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 악한 존재 앞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도 역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 본문 2절에는 그것을 네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됨을 지키는 방법의 첫 번째는 바로 그 겸손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서라도 내가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이 자신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히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겸손이 신앙인을 신앙인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더 많이 알고 내가 더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나는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교회는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똑똑하고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존중해 주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사람입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는 두 마리의 염소를 통해서 겸손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산 위를 걷다가 좁은 산길에서 두 마리의 염소를 보았습니다. 그 중 한 마리는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두 마리가 좁은 길에서 마주치면서 두 마리 모두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두 마리의 염소가 서로 팽팽하게 맞선다고 생각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위로 올라가려 하던 염소가 길가에 엎드리고, 내려오던 놈이 그 염소를 짓밟고 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엎드려 있던 염소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폭삭 엎드리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는 일이기에 겸손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야고보서 4:6) 교회는 결코 쉽지 않지만, 누군가가 나를 짓밟고서라도 건너갈 수 있도록 자신을 폭삭 엎드리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됨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맞서 싸우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을뿐더러 모두에게 손해가 되고 고통만 남게 됩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낼 수 있는 두 번째 요소는 온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온유가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온유라는 것은 내적으로는 깊은 이해심이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정중함입니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른 길에 서 있는 모습이고,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 또는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면 분노를 절제하고, 모두가 가만히 있을 때 분노하는 것이 죄악을 막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면 분노할 수 있는 것이 온유입니다.
결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이나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바르게 찾아가는 것이 온유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큰 소리를 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일에 먼저 나섰다가는 곤욕을 당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잠잠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손해를 보고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앞장 서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것,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지켜낼 수 있는 온유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의 자존심에 관련된 것일수록 더욱 잠잠해야 합니다. 그것이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은 교회 안에 너무 쓸모없는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서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꺾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말을 줄입시다. 목소리를 낮추십시다. 말을 줄이고 목소리를 낮춤으로 해서 내 안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성령의 깨우치시는 음성을 들으십시다. 그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내는 세 번째 요소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것은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때에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말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열매 맺혀지는 것이란 뜻입니다. 내 인내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내하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곧바로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세워질 때까지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그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조급함입니다. 현대인의 중병 가운데 하나가 조급증이라는 병입니다. 너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급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급함이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무서운 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신학자 중에 한 명인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조급함은 마귀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마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급함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조급함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주인이신 하나님과 보폭을 맞추며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습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한 곳에 머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한정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가라고 사인을 보내실 때까지 몇 날이고 몇 달이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이고,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너무 늦게 간다고 조급해 하지 마십시다. 조급하게 가다가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것보다 조금 천천히 가면서 천천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내는 네 번째 요소는 용납입니다. 사랑으로 용납해 주는 것입니다. 용납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뜻입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연약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허물과 실수투성이인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용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으로 용납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형제를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인간은 자꾸만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려 합니다. 그것이 죄를 가진 인간의 못된 습성입니다. 마치 자신은 깨끗한 것처럼, 자신은 죄가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만은 정죄가 없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께로 끌려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는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해 거기 모인 사람들은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기 위해서 손에 돌멩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후에,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여인 홀로 남았을 때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8:11) 우리가 볼 때 그 여인은 명백한 죄인입니다. 죄를 짓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타이르시고는 되돌려 보내십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이여야 합니다. 정죄하려 하지 말고, 기도하고 격려함으로 그가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정죄나 판단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참아 주고 용납할 때 그를 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그런 사람들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들기 위해서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으로 용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와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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