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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삼서

요삼 1장 1-15절(진리와 사랑 안에 거하라) - 차용철

by Preacher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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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삼1장 1-15

진리와 사랑 안에 거하라

차용철 목사 2013.03.11.

 

<序言>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의 세번째 편지입니다. 분량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초대교회 복음 전파사의 일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합니다. 이 서신은 디오드리베의 악행을 지적하기 위해 친구 가이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문안 인사(1-2절), 가이오에 대한 칭찬과 권면(3-8절),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의 실례(9-12절), 끝맺는 인사(13-15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문안 인사 (1-2절)

 

①자신을 장로라고 했습니다.

 

1절에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편지를 기록한 자신을 '장로'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장로'는 기록자인 요한 자신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장로'(長老)는 헬라어로 '프레스뷔테로스'(πρεσβυτεροs)인데 이는 히브리어 '자켄'을 번역한 말입니다. '자켄'은 원래 '턱 수염'에서 유래된 말로서 구약시대에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하다가 잠차 일반 백성들을 지도하는 특정 계층으로 제도화 되어 갔습니다 (벧전5:1). 신약시대에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제일 먼저 사용했는데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서 교회의 교육적 행정적 전반적인 일을 하는 영적 지도자들에 대해 사용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적으로 교육과 행정을 담당하는 지도자들에 대해 사용하는 말이나 실제적으로는 교육을 담당하는 자를 목사라 하고 행정을 담당하는 자를 장로라고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언급할 때 사도권을 변증하기 위해 '사도'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요한은 실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도권을 전혀 의심받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친밀감을 주기 위해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임을 나타내는 '장로'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②가이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1절에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참으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를 한다고 했습니다. 수신자는 요한이 사랑하는 가이오였습니다. '가이오'(Gaius)는 당시에 흔한 이름으로서 그 뜻은 '기쁨' '환희'입니다. 이 가이오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 선교여행에서 그리이스로부터 마게도니아를 지나 드로아까지 동행했던 더베의 가이오인데, 나중에 사도 요한이 버가모의 첫 감독으로 임명한 사람입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참으로'(εν αληθεια)는 '진리 안에서'(in the truth)라는 의미입니다. 진리(αληθεια)는 모형(모조품)과 반대 개념인 '실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진리'라는 용어를 예수님에게도 적용했고 (요14:6) 하나님 말씀에도 적용했습니다 (요16:13). 요한이 본 절에서 말한 진리는 전자나 후자 중 하나를 생각하고 한 말일 수도 있고 둘 다 생각하고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가이오를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로 여긴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에 있어서도 사실에만 입각하지 말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어떻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에 유익할까?' 생각하며 말해야 합니다.

 

③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간구하노라'(ευχομαι)는 하나님께 '기도하다' '바라다' '빌다' (wish)라는 의미입니다. '범사'(παντων)의 기본형(παs)는 '온' '모든' '전체의'(all things) 뜻입니다. '잘 되고'(ευοδουσθαι)의 기본형(ευοδοω)은 사업에서 '성공하다' '번영하다'(mayest prosper)는 뜻이고, '강건하기를'(υγιαινειν)의 기본형(υγιαινω)은 몸이 '건강하다'(be in health)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말은 모든 생업이 잘되고 몸이 건강하기를 기도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근거는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다음에 '네 영혼이 잘됨 같이'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영혼'(ψυχη)은 문자적으로 '혼'으로 많이 해석되는 단어이지만 기본적으로 '목숨' '생명'이란 뜻으로서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진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10:11, 요일3:16). 가이오는 영적 생명 곧 신앙적인 삶이 강건했습니다. 그에 따라 몸도 건강하고 사업도 잘되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이 영적으로 잘되면 몸과 생업이 반드시 잘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욥이나 바울이나 예수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영혼이 잘된다고 해서 건강과 생업이 잘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역자들이 볼 때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건강과 생업도 잘되기를 기도하고 축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신앙상태가 강건해야 사역자들이 기뻐하고 축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같습니다 (마6:33).

 

2. 가이오에 대한 칭찬과 권면 (3-8절)

 

①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했습니다.

 

3절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형제'(αδελφοs)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상호간에 부르는 호칭이지만 본문에서 요한이 사용한 의미는 당시 선교를 목적으로 각지를 여행하는 순회전도자들이나 각지에 있는 기존교회들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위해 사도들이 보낸 목회사역자들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로서 사도 요한이 동역자 개념으로 사용한 단어입니다. 사도 요한이 파송한 사역자들이 예루살렘교회로 와서 요한에게 보고하고 온 교회 교인들 앞에서 증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수신자 가이오에 대한 증언이 있었습니다. '가이오'(Gaius)는 앞에서 말한대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선교여행에서 그리이스로부터 마게도니아를 지나 드로아까지 동행했던 더베의 가이오로서 나중에 사도 요한에 의해 버가모의 첫 감독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증언을 들고 그에 대해 칭찬했습니다. 진리(αληθεια)는 앞에서 말한 대로 모형(모조품)과 반대 개념인 '실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요한은 그 용어를 자주 예수님과 (요14:6) 하나님 말씀에 적용하여 사용했습니다 (요16:13).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밖으로는 박해가 있었고 안으로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와 같은 미혹하는 이단 세력이 극성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그에 대한 교리를 지킨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바로 전하고 그 말씀을 세우고 그 말씀대로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가이오는 생활에서나 사역에서나 그 진리를 붙잡고 그 진리 안에서 행했습니다. 물론 기이오에게 배운 교인들도 그렇게 행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진리가 무너지는 시대를 당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고급이단들 때문에 진리를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저급이단들에도 쉽게 넘어갑니다. 초대교회 때의 이단들은 성경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논리를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등은 인정하나 '아들'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논리가 다른데 그것을 이해하고 반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과 비슷한 분인지, 하나님과 같은 분인지, 예수가 하나님이 창조한 분인지 하나님에게서 나온 분인지, 예수가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지 육체가 된 것인지 등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이단들은 성경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논리입니다. 예를 들면 교주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혹은 구원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때에는 박해와 핍박 때문에 진리대로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풍요와 자유 때문에 진리를 쉽게 양보합니다. 돈 때문에, 학교 때문에, 직장과 사업 때문에, 사람과 관계 때문에 양보합니다. 초대교회 때처럼 로마제국의 정권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압니다.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내려가 전통을 이은 이집트의 콥틱처치(Coptic Church) 그리스도인들처럼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일제시대나 공산치하 때처럼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고문을 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금 손해 보는 정도입니다. 공부 조금 못하고 돈 조금 못 벌고 사람들에게 조금 인정받지 못하는 정도입니다. 그냥 우리가 결심하면 지킬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별 어려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아서 육적으로도 잘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진리를 너무나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 목사님들이 가르쳐 온 성도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교훈도 지키지 않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교 고신측 목사님들은 성도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세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유럽교회가 쇠퇴하고 미국교회가 퇴보한 것은 이성주의와 물질주의, 합리주의와 향락주의 영향으로 이 기본적인 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 성도들이 철저히 지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은혜가 넘칩니다. 진리를 지키지 않고는 개인 신앙도 유지되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도 확보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고 단절될 수 밖에 없습니다.

 

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기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녀'는 요한이 가르치고 양육했던 성도들에 대해 부모의 심정으로 대하는 표현입니다. 요한이 사는 목적과 사역하는 목적이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고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산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기쁜 일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오늘날에도 목회 사역자들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볼 때 가장 기쁨을 얻습니다 (갈4:19). 하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②나그네에게 사랑의 실천한다고 했습니다.

 

5-6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고 했습니다.

 

당시 사도 요한이 파송한 사역자들이 예루살렘교회로 와서 요한에게 보고하고 온 교회 교인들 앞에서 증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수신자 가이오에 대한 증언이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 내용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그네 된 자들'은 복음 전도자 곧 순회 전도자를 말합니다. 당시에 복음 전도자들이 교회를 방문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그런 사람들을 잘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9-10절에 나오는 디오드레베는 당시 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자인데 그를 주축으로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그네된 전도자들을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회 공동체가 나그네된 전도자들을 대접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도 가이오는 전도자들을 잘 대접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한 일이었습니다.

 

5절에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고 했는데 '신실한 일'(πιστον, faithfully)은 '믿음있는' '믿음있게'의 뜻입니다. 가이오가 찾아오는 전도자들을 잘 대접한 것은 믿음으로 행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이거나 대접받는 사람들에게 대가를 원해서이거나 성품적으로 착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한 것입니다. 당시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보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잠잘 곳이나 여비가 없었습니다. 가이오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그들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③나그네에게 합당한 전송을 하라고 했습니다.

 

6-8절에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순회 전도자들의 증언을 듣고 가이오가 순회 전도자들을 잘 대접한다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들을 전송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대가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속적인 철학자인 소피스트들은 돌아 다니면서 세상 진리를 가르치고 대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 진리가 그들이 전하는 세상 진리와 같은 취급을 받으면 안 되겠기 때문에 복음 전도의 효과를 위해 복음 진리를 전하고 사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그들에게는 여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을 계속해서 도우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도 세상 원리로나 율법의 명령이나 주의 명령으로나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자신이 복음의 효과를 위해 사례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선교와 목회사역을 위해 물질로 필요를 채우는 자들을 주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고전9:1-15). 그들을 돕는 것은 복음 진리를 전하는 복음 전도자를 돕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일 곧 복음 진리를 전하는 일에 동역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복음 진리를 전하고 교회를 세워 나갑니다. 오늘날에도 선교사와 목회자를 통해 그 일해 가십니다 (엡2:20, 계2:1, 1:20). 그래서 그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됩니다 (마10:40-41). 하나님은 복음 진리를 받은 자들이 그들의 사역을 위해 필요를 제공하기를 원하십니다 (마10:10-15). 그래서 그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속성인 것입니다 (마25:33-40).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을 돕는 자들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신약시대에도 사도들이나 순회 전도자들을 돕는 자를 칭찬하였습니다 (바울, 요한).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역자들의 필요를 채우고 도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역자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역자들에게 배운 자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도 배운 자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기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4절). 사역자들은 그 돕는 자들로 인하여 더욱 헌신하게 됩니다 (빌2:17, 30).

 

3.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의 실례 (9-12절)

 

①디오드레베는 악행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9-10절에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고 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가이오와 같은 교회에 있는 자로서 사요 요한의 지도를 잘 받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였습니니다. 공명심으로 가득 찬 자였습니다. 자신이 교회의 헤게모니를 잡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으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이어받은 요한이 자신의 교회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의 지도에 반발했습니다. 첫째, 사도를 악한 말로 비방했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요한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요한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지어 내어 요한을 비방했습니다. 둘째, 형제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교회가 순회 전도자들을 접대하고 지원해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요한의 가르침을 단호히 거부하고 순회 전도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셋째, 형제들을 맞아 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 쫓았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 순회 전도자들을 돕는 자들에게 돕지 못하도록 금했고 심지어는 요한의 가르침을 받는 세력을 배제시키기 위해 그들을 교회에서 내어 쫓기까지 했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전도자들을 돕는 자들에게 그 선행을 금하게 하고 축출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하여'(κωλυει)와 '내어 쫓는도다'(εκβαλλει)의 헬라어 시제가 현제시제로서 계속해서 그 악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의 악행은 고의적이고 계속적인 범죄로서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힘든 죄악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악한 일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그 교회에 가면 그 악행을 꾸짖고 교회 앞에 드러내어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디오드레베 같은 악행을 본받지 말고 선행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선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속성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선을 행하려 합니다 (벧전3:21, 행23:1).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말씀(계명)을 순종하려 합니다 (요일2:5-11). 그런 점에서 순회 전도자들을 도우려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욕망을 위해 그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자를 비방하고 그 일을 하는 자들에게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하는 자들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그렇게 말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고의성을 가진 범죄로서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가이오에게 그같은 일을 본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②데메드리오는 인정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12절에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준말인 '데마'로 이해되는데 (골4:14, 딤후4:10, 몬1:24) 요한이 후에 빌라델비아교회의 감독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그는 이방인 출신으로서 요한이 가이오가 속해 있는 교회에 본서를 가지고 간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요한이 볼 때 신앙과 사역에 있어서 그 신실성이 인정할 만 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바라고 했습니다. 첫째, 뭇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를 보는 모든 이방 사람이 그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진리에게서도 인정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씀대로 행해서 말씀에 의해서도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께도 인정받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셋째, 우리에게도 인정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요한 공동체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도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를 그처럼 신실한 자로 천거하는 이유는 가이오가 순회 전도자를 돕는 일을 계속 하도록 권면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가이오가 디오드레베의 악행으로 인하여 순회 전도자를 돕는 일이 어려운 상황이겠지만 데메드리오와 함께 그 일을 계속 해 나갈 것을 주문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과 사역을 하는 공동체에는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많은 반면 데메드리오 같이 신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세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판단하여 신실한 자들을 따라 옳은 사역을 해 가야 합니다.

 

4. 끝맺는 인사 (13-15절)

 

13-15절에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본서의 편지를 보내면서 더 쓸 내용이 많이 있지만 속히 직접 대면하여 말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직접 가이오가 속해 있는 교회에 속히 가서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묻어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이오가 속한 교회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여러 친구가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요한 공동체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이오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서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 변함없이 가이오의 선행에 동참하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개인적으로 요한의 문안 인사를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결언>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며 그 일을 위해 수고하는 사역자들을 도우려 합니다. 그런 바른 시각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려 할 때는 이뜸 되기를 좋아하는 욕망을 가진 자들의 주도적인 방해로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세를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롬12:2)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마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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