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이1장 12-13
대면하여 말하는 기쁨
안재경 목사 2011-08-21
온생명교회 [남양주시, 가운동] http://cafe.daum.net/osm.or.kr/
현대문명은 사람의 얼굴이 사라진 문명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특징 중에 하나가 소위 말하는 ‘익명성’입니다. 익명성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어떤 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특성’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름을 숨긴다는 말입니다. 인터넷상에서 가명으로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악플러들이 활동하는 것이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익명성이라는 것은 군중 속에 자신을 가리고 숨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이름이 그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름은 말 그대로 이름에 불과합니다. 도리어 우리는 이름 뒤에 숨어 버립니다. 이름을 숨긴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얼굴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아무리 자신의 얼굴을 잘 가꾼다고 하더라도 얼굴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매와 얼굴이 가장 중요한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성형열풍이 불고 있지만 정작 사람의 얼굴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근대 도시가 형성되면서 사람들의 관계는 철저하게 비인격적으로 변했습니다. 도시문화는 대부분의 만남이 일회적입니다. 한번 만나고 끝입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 만남이 인격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뻔뻔해집니다. 우리 민족이 아무리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제 옛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얼굴을 모릅니다. 고통받는 이웃의 얼굴을 애써 외면합니다. 특히 한국은 아파트 문화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웃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만 나오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웃은 얼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물건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이 아예 없는 것처럼 대합니다.
교회에서도 신자들은 서로에게 얼굴없는 존재들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시선으로만 서로를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공허한 인사말로 서로를 빗겨갈 때가 많습니다. 예배직전에 목사가 ‘지난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하는데 얼마나 형식적입니까? 그래서 ‘지난 한주간 얼마나 힘드셨습니까?’라고 인사하고 싶은데 그것은 너무 부정적이라서 그렇게도 못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얼굴을 대하는 문제, 살아있는 의사소통의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의 장로로서 신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대하여 말하는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나타내 보여주심
먼저 얼굴 중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에 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에 관해 우리가 뭘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라.” 그렇다면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꿈에 하나님을 보았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더냐고 물어보면 흰 옷을 입고 수염이 길게 나 있더라고 합니다. 지팡이를 짚고 있지 않더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꾼 본 그 분이 하나님이 맞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산신령이지요.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다른 고대근동의 신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고, 꿈에 나타나실 때도 있었습니다. 천사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적도 있습니다. 창세기 32장 31절에 보면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밤새 천사와 씨름했는데 나중에 고백하기를 자기가 하나님의 낯을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고 감격적으로 고백합니다.
구약시대에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모세입니다. 모세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는 복을 누립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모세의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2장 6절부터의 말씀인데요.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라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신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임
놀라운 사실은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로 노래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불리웁니다. 시편 42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비춰주시는 것으로 노래했습니다. 시편 80편 기자는 시작부분과 끝부분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비춰달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이런 고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로 하여금 그 백성에게 선포하라고 하신 복의 문구를 통해 이미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공예배 끝날 때에 받게 되는 강복선언이 바로 그것이지요.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 얼굴빛을 비쳐 주셨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신명기 5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면한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적인 어떤 체험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공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공예배는 너무나 형식적이기에 그런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서 특별집회에 참석한다든지, 산기도 간다든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묵상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공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서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낯을 뵈옵는 복을 누립니다. 공예배때 하나님을 낯을 뵈옵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나타남
예배 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낯을 뵈옵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어떤 얼굴입니까? 그리스도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받아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말하고 있는 이유는 모세의 얼굴과 비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립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독특한 해석을 하는데 모세가 장차 없어질 자신의 얼굴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광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의 얼굴은 모세의 얼굴처럼 빛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얼굴에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빛나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이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는 영원히 빛나는 광채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사로잡혀서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찬란한 세상 지혜에 눈이 멀어서 복음에서 빛나는 광채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광채를 통해 예수님이 모세의 직분사역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워졌던 모세보다 더 나은 자들이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듣는 자리에 섰습니다. 이것이 모세보다 못한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듣는 자리에 선 것이 말입니다.
현재 우리는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음
이렇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할 정도까지 되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너무나 희미합니다. 우리의 지식을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당시의 청동거울을 말합니다. 청동을 쳐서 늘여서 거울로 만들었기 때문에 요즘의 수은을 바른 거울과는 달리 형체가 분명하게 비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희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보았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손해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는가 보다 하고 뒤로 물러나 버립니다.
세상 모임들은 특정한 이익을 위해 모여서 교제합니다. 그래서 집단 이기주의라는 것이 성행합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유익을 위해서는 끝까지 목소리를 드높입니다. 그것이 다른 집단,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오는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낯을 뵈었기 때문에 서로를 주님 대하듯이 합니다. 주 안에서 모든 벽과 차별이 무너집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아직까지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를 만나서 심하게 질책합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온다고 하니까 그 식사자리를 떠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 앞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더불어 참되게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주장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유대인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2등급 백성밖에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방인들을 얼굴없는 자들로 취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대면하여 교제하는 복을 누립니다. 신자는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단과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말한 사도 요한은 본서를 마무리하면서 신자들이 참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얼굴을 대하여 말하는 것만큼 인격적이고 참된 복이 없습니다.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남편이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면, 자녀들이 부모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면 이것만큼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이 쓰는 편지가 아니라 속히 만나서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요즘 인터넷이 발전해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의사전달을 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수시로 채팅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서 특정한 장소에 가서 만나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로 얼굴을 대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화상통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만나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아주 미묘한 움직임까지 서로 나누면서 대화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교회와 신자들을 향해 편지로 쓸 것이 많지만 그 많은 이야기를 종이나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않고 대면해서 말하고 싶다고 합니다. 속히 보고 싶다, 이 말이 요한이 했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서가 가장 짧은 서신이 된 것입니다.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수 천마디 말이나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니까요.
살아있는 의사소통을 소망해야 함
본문에서 ‘대면하여 말한다’는 표현은 ‘얼굴 대 얼굴’이라는 표현인데 문자적으로는 ‘입 대 입’이라는 표현입니다. 얼굴 중에서 유독 입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히브리적 사고방식에서는 발설된 말에 모든 강조점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빛이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지만 분명하게 발설된 말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의사소통이 죽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있는 의사소통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 3서에도 보면 사도는 마지막 부분에서 동일하게 언급합니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주일이 지나면 어서 속히 다음 주일이 되어서 성도들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 좋은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주일이 되어서 만났는데 어서 속히 그 자리를 떠나고 싶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현대 사회는 얼굴을 잃은 사회입니다. 현대문화는 얼굴을 잃은 문화입니다. 최근에 어떤 미술가가 전시회를 했는데 사람의 얼굴을 전부 동물의 얼굴로 바꾸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현대의 익명성을 비꼰 작품들입니다. 우리가 얼굴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화장품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꾸어도 우리는 얼굴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 각자의 얼굴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대면하여 말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이 대면하여 말하는 기쁨은 이 땅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과 더불어 대면하여 말하는 기쁨을 마침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모두가 자기 얼굴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어린이 질문을 볼까요? 1번과 2번을 같이 묶어서 보겠습니다. ‘1번. 하나님은 사람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다, 맞습니까?’ ‘2번,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다, 맞습니까?’ 이 두가지 질문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보여준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언제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우리는 주일의 공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전혀 보지 못한 사람처럼 꿈이나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3번. 교회는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곳이기에 아직까지는 서로를 대하는 것이 (온전)하지 않지만 마지막 날에는 다같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볼 날을 소망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가 된다는 것은 혼자 수도하듯이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대면하여 교제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 왔다 갔는데 마음에 충만한 기쁨이 생기기보다는 마음이 더 공허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벌거벗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면무도회장이 된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자신의 벌거벗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회원이 되었다는 것은 서로를 주님처럼 받아 영원히 교제하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름아닌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낯을 뵈온 성도들이 서로 대면하여 같은 말을 하면서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는 곳, 그 곳이 교회요 천국입니다. 신자들은 아무리 아는 것이 없어도,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에게 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서로에게 줄 수 있는데 왜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리 어설퍼도 우리의 교제가 하늘에까지 이어질 것이니 신자의 교제만큼 복된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가장 어설퍼 보이고, 가장 비생산적으로 보이더라도 신자들의 교제는 얼마 전에 요란을 떨었던 G20 정상회담보다 더 중요합니다. 영원까지 이어지는 교제가 바로 성도의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대면하여 말하는 기쁨을 가면 갈수록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현대문화를 얼굴을 잃은 문화라는 관점에서 평가해 봅시다.
2.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을 본 것일까요?
3.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있을까요?
4. 시편 기자들이 구원을 하나님의 낯을 뵈옵는 것으로 노래했다는 것을 묵상해 봅시다.
5.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6. 우리는 교회에서 어떻게 서로의 얼굴을 대하나요?
7. 마지막 날에 신자들이 누릴 교제의 온전함을 묵상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하나님은 사람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다, 맞습니까?
2.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다, 맞습니까?
3. 교회는 성도가 서로 ( )하는 곳이기에 아직까지는 서로를 대하는 것이 ( )하지 않지만 마지막 날에는 다같이 하나님과 ( )하여 볼 날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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