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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일서

요일 4장 7-12절(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 - 이준원

by Preacher 202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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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4장 7-12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

이준원 목사 2015.2.4.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이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시리즈를 하면서 주인은 무엇이고 종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종이 된다는 것, 그러니까 노예가 된다는 것에 대해 겁을 먹을 수도 있는데,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종이 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관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전에 그런 적이 있고 수많은 설교자들이 그렇게 말을 가르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드러나야 할 가장 소중한 덕목들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나야 할 미덕 중 하나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삶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봅니다.

 

영생에 대하여 말할 때 대개 어디에 초점을 둡니까? 주님과 함께 사는 세월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된다는, eternal 하다는 영생의 길이를 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생이 영원히 계속되는 삶만을 말한다면, 지옥도 영원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의 핵심은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은 마치 산소와도 같습니다. 산소가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없어지지만, 사랑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 세상이 지나면 방언, 예언, 지혜, 지식, 성경 읽기, 전도 등은 다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실 천국에 무슨 전도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땅에 있는 동안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그곳에 우리와 함께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죽음을 넘어 영생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유일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빛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요일 2:9-11, 새)

 

어둠이란 빛의 결핍입니다.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입니다. 건물 내부를 어둡게 하려고 한다면 어디 가서 어둠을 사오거나 검은 천으로 건물을 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불을 끄면 됩니다. 어둠의 나라가 그렇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누구나 혼자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갑자기 정전이 되어 어두워지면, 주변은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는 모두 자기가 혼자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옆 사람을 더듬어 찾게 됩니다. 낮에는 어디든지 못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묘지에도 꽃을 들고 찾아갑니다. 그러나 밤에는 묘지에 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서워서 그렇습니다. 죽은 자는 낮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입니다. 묘지는 낮이나 밤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우리로 하여금 밤에는 무섭다고 느끼게 하여 묘지에 가기 싫게 하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전형적인 어둠의 모습입니다.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라고 하는 사람은 어둠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 혼자만 잘 믿으면 된다.”라고 하거나, “누구누구 꼴 보기 싫어서 나는 교회에 안 가고 혼자 집에서 예배드리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둠에 속한 사람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은 하면서, 즉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라고 말은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요일 1:7, 새)

 

여기 보면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 사귀는 사람이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빛,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 신앙생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왜 우리가 굳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빛에 속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된다고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서 하겠다”는 것은 빛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조금 전 2:10 말씀을 보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믿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올무가 되어서 서로 걸고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끼리 다투고, 노회에 가면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안건을 놓고 싸웁니다. 교계 지도자들도 서로에게 걸려 넘어집니다. 문제와 오해가 끊이지 않습니다.

 

물론 빛에 속한 사람도 가끔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찔러주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넘어진 상태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씀하는데, 우리가 죄를 안 짓습니까? 짓습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은, 지속적으로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금방 일어나고 맙니다. 그리고 서로 용서하며 사랑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 빛 가운데 행하고 다른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올무를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계속 올무를 놓고 걸어도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것을 용납하고 용서하며 빛으로 인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빛 가운데 행한다면 문제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사람 모두 어둠 속에서 행할 때입니다.

 

왜 다툼이 일어납니까? 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토록 용서하지 못합니까? 어둠 가운데 행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빨리 깨닫고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와야 합니다. 그럴 때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2. 구원의 증거

 

여러분, 나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압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정말로 영접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그 동안 <새가족반>과 <생명의 삶>을 하면서 수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새가족반>에서 “오늘 밤이라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생명의 삶>에도 처음 오신 분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제가 보기에 방탕한 삶을 살거나, 죄 가운데 있거나,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안 했거나,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 중에서 ‘예,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확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그 답은 정말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분들에게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믿는 사람이 왜 그렇게 사세요? 지금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정말로 자기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삶인가요?” 이렇게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삶은 엉망이면서 내 머리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확실히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담배 안 피우는 것, 술 안 마시는 것, 전도하는 것, 그 밖의 사역들을 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러한 삶의 모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구원의 증거는 따로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정말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7-8절)

 

내가 하나님께 속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너무 간단합니다. 사랑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사도 요한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요 5:24, 새)

 

이렇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을 보내신 분,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 즉 정말로 자신이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요일 3:14, 새)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삶은 엉망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음란하고 방탕한 삶을 살면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교회를 오래 다니며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 말씀에 의하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가?’ 이것을 보면 됩니다. 내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닌데, 정말로 구원받았다면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다고 말씀합니다. 죽음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이 구원받은 것인데,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말은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이쿠, 나는 형제자매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그럼 내가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인가? 큰일 났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그냥 조금 사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일 3:15-16, 새)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은, 사랑을 조금 못하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너무 부족해서 사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움은 곧 살인입니다. 살인자의 안에는 영생이 거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것도 한두 번 어쩌다 미운 사람이 생기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용서하지 않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그런 미움이야말로 구원을 못 받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어떻게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형제자매를 미워하며 마음의 살인을 계속해서 저지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불가능한가 하면,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안에 계신 사람이 그렇게 계속 미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계속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 안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못 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고 직분을 가지고 있고 기도를 많이 하고 온갖 사역으로 섬기고 전도를 많이 해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여러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입니다. 사랑이 곧 생명입니다. 사랑에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사랑을 하느냐, 미워하느냐?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3. 은사와 사랑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사랑은 분명히 성령의 열매입니다. 물론 여기에 열거된 다른 것들도 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곧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은사는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이어서 하라고 주신 선물이고,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모두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즉,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열매로서의 “희락”은 그저 좋은 일이 생겨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잘 안 되지만 그는 너무 사업이 잘됩니다. 그럴 때도 같이 기뻐해줄 수 있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희락입니다. “충성”도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신실함을 말합니다. 이렇듯 성령의 열매는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성령의 열매를 구하는 대신 은사만 구합니다. 은사들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며 열심히 사역을 해야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들의 은사로 그들을 알리라’가 아니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16-21)

 

여기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주여, 주여”라고 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야말로 구원의 증거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합니다.”라고 말은 하는데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한 사람의 영적 성숙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은사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선물과도 같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람들은 나무를 멋지게 꾸미며 많은 장식을 달아 놓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나무 위에다 진짜 선물들을 매달아놓기도 합니다. 값비싼 시계, 반지, 보석 등을 나무에 달아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나무는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됩니다. 며칠 전만 해도 그 나무에 값비싼 시계나 보석이 매달려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며칠 후에 그 나무는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무에 매달려 있는 선물만을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물이 곧 그 나무의 질을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은사가 곧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열매로만 나무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과가 열렸다면 좋은 사과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주 좋은 사과나무에도 멋진 장식들을 매달아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좋은 사과도 열리고 비싼 장식도 달리게 됩니다. 열매와 은사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무의 일차적 사명은 장식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가 좋아야 합니다. 우리가 은사를 받지 못한 데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데에는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사과나무에게 “저쪽 나무에는 아름다운 장식들이 달려 있는데 왜 너에게는 아름다운 반지가 안 달려 있니?” 하고 물으면 사과나무는 “죄송합니다. 아무도 제게 예쁜 반지를 달아주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왜 사과를 맺지 못했니?”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는 온전히 보존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혀서 불에 던져집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제 몫을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열매, 무엇보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없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너는 왜 사랑을 안 하고 왔느냐?”라고 물으실 때 “아무도 나에게 사랑을 안 달아주었습니다.”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사랑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제자인 표시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긴 사도 요한은 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일 3:23, 새)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정말 믿은 사람이라면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요한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9-12절)

 

똑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것이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랑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은사는 받았는데 열매가 없었던 사람들이 성겨에 많이 나옵니다. 사사기의 삼손은 큰 힘을 받은, 즉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육신에 매인 사람이었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도 은사를 받아 예언했지만, 그 역시 육체를 따라 살다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전 13:1-2, 새)

 

사랑이 없이 방언을 하는 것은 시끄러운 소음일 뿐입니다. 예언을 하고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헛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사랑의 중요성을 정말 알고 있습니까? 정말 알고 있습니까? 이 사랑의 중요성을 정말로 깨달아야만 성령님께 대하여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은사도 좋고 예배도 좋고 기도도 좋고 말씀도 붙들어야 되고, 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option이 아닙니다.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사랑을 option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며 섬겨도 좋고 내가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에 속했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빛에 속했으며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왜 목장으로 모이며 그토록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강조합니까? 우리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이 왜 그렇게 합니까? 꼭 가정교회가 아니더라도 셀 교회도 좋고, G12, D12, 두 날개, 소그룹도 다 좋습니다. 왜 그렇게 모이고 서로 사랑하자고 하는 겁니까? 생명이 달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만히 놓아두면 잘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가 목장으로 모이고 그러는 것이, 자꾸 나를 거기에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라도 나를 거기에 붙들어놓아야 합니다. 그냥 풀어놓으면 우리는 가서 딴 짓이나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자꾸 나를 거기에 붙여놓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사랑해보고, 용서가 안 되어도 용서해보려고 애쓰고, 눈물로 기도하며 섬겨보고, 그러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 기도

-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일이다. 사랑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형제자매들을 사랑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내가 싫으면 적당히 피하고, 그저 혼자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교회만 그저 왔다 갔다 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생명이 걸린 일이다.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것과 관련되어 생각나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함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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