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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일서

요일 4장 7-21절(사도 요한 2 - 사랑의 사도) - 이준원

by Preacher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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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4장 7-21

사도요한(2) 사랑의 사도

이준원 목사 2014.10.1.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https://www.kpccoh.org

 

1. 보아너게에서 사랑의 사도로

 

지난주에 우리는 사도요한이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더 이상 못하게 금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다 태워 죽여 버리겠다며 날뛰던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7-11절)

 

이 말씀은 곧 요한 자신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자기 안에 사랑이 없었고, 그러니까 하나님도 몰랐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불같은 성격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별명까지 받았던 요한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말을 하는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는지,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중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우리도 다 성격에 문제가 있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도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요한의 변화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토록 성격이 강하고 불같고 급하던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방법을 알고 그 사랑을 우리도 누려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2절)

 

요한은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영이시고 우리는 육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나의 친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는 것처럼, 친한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하는 이 한마디 속에 인간의 현실적인, 실존적인 고민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을 느낍니다. 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만날 수가 없으니, 그래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가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저 추상적인 사랑을 가지고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것으로 뒤틀리고 상처 많은 내면이 치유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요한은 아주 자신 있게 선포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뜻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해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된다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시니까 그분의 사랑을 잘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부터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어떤 때보다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진짜 사랑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표현들도 보십시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3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5절)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사랑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누리게 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주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19-21절)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경험하고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7절부터 시작된 오늘 말씀은, 처음부터 하나의 결론을 가지고 시작한 문장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자”입니다. 그래서 계속 그쪽으로 몰아가며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원하는 대답,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어떻게 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개념적일 수 있는 그 사랑을, 보이는 사람의 사랑, 구체적으로 내면을 만지는 사랑으로 누릴 수 있었습니까?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 중의 하나가 바로 요한계시록 1장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 쓴 책입니다. 그가 교회를 지키다가 핍박하는 자들에 의해서 잡혀 밧모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섬의 채석장 일꾼으로서 본토와 단절되어 지내다가, 교회가 박해와 변절과 배교로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자기 혼자 밖에 남지 않은 그 외로움과 아픔 속에서, 처절하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과연 여기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악은 너무 커 보이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과연 주님의 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의심이 다가오던 어느 날, 그가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주님의 그런 계시를 받았겠습니까? 기도하다가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승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았고 계시를 받아 적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본 게 아닙니다. 그냥 할 거 다 하고, 놀 거 다 놀고, 볼 거 다 보고, 그저 자기중심적으로 아무렇게나 사는데 갑자기 계시가 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께 기도하다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국 이것입니다. 우레의 아들이었던 사도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기도함으로 그 사랑을 받고 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했을 때 그가 하나님의 그 구체적인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경험되게 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세 가지

 

통로 육체를 입고 사는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과 마치 실제로 만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구체적으로 교제하고 그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신비적 체험

 

이것은 어떤 환상 가운데 소위 입신되어서 받는 겁니다. 마치 꿈을 꿀 때 생생하게 보는 것처럼 보는 겁니다. 그런데 꿈이 아니라 진짜 영적인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다 오기도 하고, 천국도 보고 오고, 하나님의 보좌도 보고 옵니다. 심지어 천사가 보여줘서 지옥도 보고 오는 기막힌 체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가짜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믿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서 같이 지내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성경적, 신학적 질문들을 다 던졌더니 주님이 다 대답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안 가고 스스로 목사가 되었는데, 완전히 이단의 괴수가 된 겁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가짜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물론 그런 특별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구체적 방법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신비주의적 환상이나 기적을 자꾸 강조하는 모든 종류의 모임은 다 문제가 있습니다. 신비한 현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건 괜찮지만, 그것만 너무 강조하는 것은 전부 다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적은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시면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을 받을 것을 계산해놓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잘 보셔야 합니다.

 

2) 지성소 예배

 

예배 가운데 이사야가 경험했던 것처럼, 깊은 예배로 들어갈 때 하나님의 임재가 옷자락으로 덮는 것처럼 우리를 덮고, 문지방 터가 요동하고, 천사가 날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내게 들려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예배 가운데 들어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놀랍게 나를 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라는 말 한마디에도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펑펑 울 때가 있습니다. 언제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몰랐나요? 다 아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 말 한마디가 마음을 때리고 눈물이 나게 만드는 겁니다. 바로 그런 것이 참된 예배, 지성소 예배입니다.

 

그런데 영적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똑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라는 한마디에 ‘그걸 누가 모릅니까? 거, 아는 건 좀 그만 말하고 모르는 걸 좀 말해보세요.’라고 반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지만 정말 지성소 예배 속에 들어가게 되면, 찬양을 부르는데 가사 한마디 때문에 눈물이 터져 나옵니다. 사실 눈물은 마음이 움직여야 나오는 겁니다. 마음이 안 움직이는데 나오는 눈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품할 때 나오는 눈물입니다.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아주 밝은 태양 빛에 갑자기 나갔을 때 눈물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것도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오는 눈물입니다.

 

그런 때를 제외하고, 눈물은 정말 마음이 움직여야 나오는데, 눈물이 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소 예배입니다. 또 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마음이 정말 답답했는데, 기도 가운데 내 마음이 차분해지며 평안을 얻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실제적 사랑을 경험하는 참된 지성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 영적인 기도

 

이것은 그냥 편안하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정말로 영을 집중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 물 같이 쏟아지면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기도가 아니라, 인간적인 기도가 아니라, 혼적인 기도가 아니라, 이러한 영적인 기도가 일어날 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사도요한이 이 세 가지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 번째인 영적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가장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경험한 영적 기도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사도요한이 경험한 영적 기도

 

1) 주님 품에 안기는 기도

 

이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소속감이 확인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에게 영적인 기도는, 사랑을 공급받는 채널이기도 하면서, 그것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온 것처럼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의 품에 안겼던 것 같은 그런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마다 주의 품에 안기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사랑이 통로가 됩니다. 지금 삶이 너무 힘들지만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리기만 하면 거기는 다른 세상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왜 눈을 감습니까? 눈을 감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어떤 마음을 갖고 왔든지 상관없이, 주님 앞에 와서 “주님...” 하고 부르는 순간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아버지의 품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소속감을 느끼며, 깊은 정서적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요한이 ‘그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말을 괜히 쓴 게 아닙니다. 그는 주님의 품에 안기는 순간 확실히 느꼈습니다. ‘나는 정말로 이분의 사랑받는 제자이구나.’ 처음에는 자신의 욕심으로, 정말 사랑에 굶주려서, 사랑을 받고 싶었고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안겼는데, 안기면 안길수록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낀 것입니다. 나중까지 요한은 그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때의 그 체험을 느끼며 나아간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영적 기도였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안아주시는 그 체험.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여자 집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기도만 하면 마치 제 친정아빠 품에 안기는 것 같아요.” 맞는 말입니다. 시아버지에게 안기기는 좀 어렵잖습니까. 물론 친정아버지가 어려운 분은 거기에 안긴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 기도를 하게 되면, 내가 “아버지...”, “주여...” 하고 부르는 순간 그분의 소속인 사람으로서 말할 수 없는 그분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것은 영적일 뿐 아니라 정서적이기도 합니다. 개념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실제적으로 마음을 터치하는 사랑으로 체험이 됩니다. 이러한 영적 기도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사랑을 경험하니까 나타나는 현상들 중 하나가,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7-18절)

 

“오늘 밤이라도 이 세상을 떠날 경우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십니까?”라고 질문하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느냐고 물으면,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심판이 두려운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지금 나의 삶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고 걱정, 염려, 근심, 두려움들이 많지만, 아이가 부모 품에 안기는 순간처럼,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두렵지가 않고 너무 좋은 겁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니까, 다 맡기고 그 품으로 들어가니까, 너무 고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사실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죽음의 저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을까봐,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지옥으로 보내실까봐, 하나님이 혹시 내 편이 아니실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기도를 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누릴 수가 있습니다.

 

2) 사랑의 통로가 되는(사랑의 관계를 세우는) 기도

 

두 번째로, 사도요한이 경험한 영적 기도는, 기도하면서 주님과 자신 사이에 사랑의 통로가 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주는 기도인데, 주님께 신뢰를 드리고 신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 소속된 정도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도 나를 믿어주시는 겁니다. 사랑의 가장 묵직한 표현이 뭡니까? 신뢰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아직도 잊지 못하는 제 어머니의 말씀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민을 가는 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못 간다고 했을 때 너무 힘들었습니다. 당장 고3이 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하니, 여러 가지로 힘들었고 마음이 아주 갑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학교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고 갔다가, 마침 친구를 만나서 공부도 안 하고 친구랑 같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가 다시 한 바퀴 돌아서 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힘들어할 때 어머니가 하루는 이상하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요즘 어떠니? 난 널 믿는다.” 저를 믿는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마음이 아주 와 닿았습니다. 그렇게 저를 믿어주신다는 그 말이 참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랑해’ 하는 것은 좀 상투적인 표현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녀에게 항상 ‘사랑해’라고만 하면 별 감동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영어로는 사랑한다는 것이 ‘I love you’이지만, 좀 다른 표현도 섞어서 사용해보십시오. ‘보고 싶었다. I missed you.’ 그런데 사랑 중에서 가장 묵직한 표현이 바로 ‘I trust you. 내가 널 믿는다.’입니다.

 

신뢰는 사랑의 아주 묵직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도 가운데 나타난다는 겁니다. 요한이 십자가 앞에 왔는데 그때 십자가 위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워하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러더니 또 자기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까.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을 때의 그 장면이 기도 때마다 떠오르는 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그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를 내게 부탁하셨다!’ 그것이 마음을 파고들어오는 겁니다. 자기를 믿어주신 겁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탁이었고, 또한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비전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목숨을 걸고 어머니 마리아를 돌봐드리며 나아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를 못하고 피해서 다니다가, 늦게 사역에 합류했고 결국 순교하지 못하고 유배지로 가서 죽었습니다.

 

기도 가운데 우리도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말하며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고 끝나는 기도만 한다면 그것은 낮은 수준의 기도이고 기도의 한쪽면만 알고 있는 겁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네게 부탁하는 이 일을 감당해줄 수 있겠니?”

“네가 나를 위해서 넓은 길이 아니라 이 좁은 길을 가줄 수 있겠니?”

“지금 굉장히 인내하기 힘든 일이 생겼지만 나를 위해 좀 더 참아줄 수 있겠니?”

“두려운 일이지만 나를 위해 한 번 나가주겠니?”

 

이런 말을 하실 때는 그냥 하시는 게 아니라 신뢰하시는 사랑으로 막 밀고 들어오시는 겁니다. ‘나는 너를 믿고 이 일을 맡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기도 가운데 이런 사랑을 누리고 느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저도 기도할 때마다 바로 이런 것을 느낍니다. 여러 가지 사역들을 지금 맡겨주셨는데, 특히 영혼 구원의 사명을 맡겨주셨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게 신비롭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나 같은 것의 도움이 뭐가 필요하시다고, 나를 이 일에 부르시나?’ 주님께서 이것저것을 하도록 맡기실 때마다,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너는 나를 위해 이것을 해줄 수 있겠니? 나는 네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끝이 아니라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혹시 네가 하지 못하더라도, 너는 내 아들이고 너는 내 종이다. 그래도 너는 할 수 있다.” 또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가지 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네가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그때는 내가 하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신뢰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그러한 영적인 기도, 사랑의 통로가 되는 기도,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누리고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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