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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장 20-24절(기쁨을 주러 오신 그리스도 [대림절4]) - 안효관

by Preacher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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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6장 20-24

기쁨을 주러 오신 그리스도 [대림절4]

안효관 목사 2020-12-20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여러분, ‘내 삶에는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지?’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늘 기쁨만 가득하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너무 자주 우리가 원치 않는 고통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중에 울부짖기도 하고,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울부짖고 기도한다고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앤드류 마리아가 쓴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이라는 책에 ‘고통받는 신’이라는 제목의 짧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교도인 인디라가 힌두교의 스승인 구루(Guru) 마키르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떤 신을 섬기고 어떤 종교를 믿어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구루 마키르는 인디라를 데리고 온갖 신들을 모셔 둔 만신전(萬神殿)으로 들어갔습니다. 구루가 앞서 가다가 한 신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그 신상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이 바그다 신일세. 이 신은 인간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기로 언약하시는 분이시네.” 인디라는 고개를 흔들더니 다른 신에게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조금 더 가다가 다른 신상이 나타나자, 구루는 신상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습니다. “이분은 요파 여신이네. 인간들에게 고통을 면하는 여러 방법을 일러 주시는 분이지.” 이교도 인디라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며 다른 신을 소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윽고 둘은 실물 크기의 십자고상(十字苦像) 앞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인디라가 호기심 가득 찬 눈길로 십자가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이 신은 어떤 분이기에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겁니까?” 구루가 대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일세.” 그 말을 들은 이교도 인디라는 측은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조용히 바라보았더니, 문득 깨달음을 얻고서 구루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구루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인디라, 자넨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구먼. 아까 본 두 분 신은 고통을 없애 주겠다고 언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가 않아.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을 택하다니, 대체 어찌된 노릇인가?” 이교도 인디라는 구루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통을 없애 주겠노라고 하는 신은 어리석은 신입니다. 고통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통을 완전히 없애 준다는 약속은 그야말로 환상일 뿐입니다. 고통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신은 인간을 겁쟁이로 만들 따름입니다. 고통을 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사람이 고통을 피하는 그 순간, 고통은 열 배로 커져 덤벼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신은 친히 고통을 당하신 분인지라 인간에게 고통을 이해하게 만들고, 그래서 고통을 이겨내게 해 줄 겁니다. 고통의 신비가 일단 이해되면, 비록 현세라 해도 기쁨과 평화가 넘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들은 구루 마키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 말이 진리네, 우리 함께 가세. 나도 그리스도인이 될 생각이네.”

 

물론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는 우화의 성격이 짙을 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서 고통을 제거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게 만들어줍니다. 죄악의 성품을 갖고 사는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고통이 시작된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이후 우리 인간에게는 고통이 형벌로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와 함께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고통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죄악이 남아 있는 한 고통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후에야 고통은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죄가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늘 그 고통으로 인해 힘든 삶만을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통이 있는 곳에는 분명 힘듦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듦과 아픔 가운데서도 우리는 종종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인이나 악인이나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햇빛을 비춰주심 같이,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비를 내려 주심 같이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에게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함께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에게 하늘의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리고 2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누리는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우리 마음에 있는 기쁨을 가져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 마음에서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것이 기쁨이 충만하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전제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기뻐할 때 우리는 곡하고 근심하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의 일차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신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다락방 설교를 하십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3-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마지막 부분인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더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까지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가신다고 말씀하시자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때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 잠시 동안 힘든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신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안달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칠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눈엣가시와 같은 예수님을 제거하게 위해서 오래 전부터 음모를 꾸며왔고, 그들의 음모가 실행될 날이 가까워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다음 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당신의 앞날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진지하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자기들의 음모가 자기들이 뜻하는 바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들의 뜻대로 되었다고 기뻐할 때 제자들은 애통해할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처절한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시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결코 아닙니다. 그 애통과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실 것이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 곁을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애통하고 근심이 되는 것은 마치 여인이 해산을 앞두고 근심하고 고통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끝나면 새 생명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해산한 여인뿐만 아니라 온 집안에 기쁨이 찾아온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그런 기쁨의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기쁨은 고통이 사라지는 곳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함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해산의 고통처럼 고통을 겪어내야만 드디어 기쁨의 때가 찾아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고통의 때를 만나면 우리는 그 고통의 때를 견디어내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아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통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도 부활로 이겨내셨듯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통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부활로 이겨내는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 비록 해산의 고통을 겪겠지만, 새생명의 탄생으로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고통 역시 반드시 해산의 기쁨을 맛보게 될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올해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전염병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고,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게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분명한 것은 이것도 극복할 날이 분명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코로나를 이겨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안에 하늘의 기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극복함으로 기뻐하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 누구나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도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기쁨, 세상이 뺏아갈 수 없는 기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그런 기쁨은 내가 소유하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을 받아 소유하는 것이지, 내가 갖고자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런 기쁨을 갖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께서 그런 기쁨을 주십니까?

 

하늘의 기쁨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실 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요한복음 16: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셔야만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슬픔이요 근심이요 애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는 것은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실 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어려운 때에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고,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고,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기도 했고,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불에 태워져 죽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인들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사도행전 5:41)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채찍질을 당하고, 더 나아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오히려 예수 때문에 핍박받고 능욕당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채찍을 맞는데 기뻐하고, 감옥에 갇히는데 기뻐하고, 목숨에 위협을 당하는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은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함으로 그들을 둘러싼 위협적인 환경, 마음과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어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까?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기쁨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내 삶에 계속된 문제 때문에 도저히 기뻐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남들만큼 돈을 벌지 못해서 기뻐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코로나로 인하여 삶이 부자연스럽고 일상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우울해지고 기뻐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환경이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내 인간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기쁨이 보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성령충만을 기도하십시다. 내 마음에 예수님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하십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주님과 헤어짐 때문에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주님을 만날 때에는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우리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때로 고통 속에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서 힘겹게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고통과 문제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실 때 모두 사라질 일시적인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일시적인 이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계속 고통과 근심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고통 가득한 세상에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옥죄이는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닙니다. 오직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의 고통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힘든 삶의 자리에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자리에 오셔서 내 손을 붙잡아 주시도록 나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응답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십니다.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 고통 속에서도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더 나아가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품에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고통이 찾아와도 그 고통을 십자가로 이겨내신 주님으로 인해 고통을 이겨내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아무리 큰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나를 맡김으로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음을 알기에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극복하지 못할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고통의 세상에, 문제의 세상에 하늘의 기쁨을 안고 찾아와서 그 기쁨을 가르쳐주시고 그 기쁨을 선물로 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 탄생의 소식 알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소식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은 고통 가운데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 기쁨도 고통을 통과한 기쁨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셔야 하는 가슴 아픈 하나님의 고통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고통이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의 상황이 고통스럽고 힘들다 하더라도, 아무리 우리의 삶에 힘든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서 기쁨을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고통의 보자기를 걷어내면 그 안에는 기쁨이라는 선물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큰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기쁨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고통만 바라보지 말고 그 안에 있는 하늘의 기쁨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그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기쁨을 보게 하실 것이고, 그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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