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1장 2-12
애곡하라
정승안 목사 2015.11.15.
베를린선한목자교회 http://www.mogza.com
저는 유년시절 부모님의 고향인 완도에 조용한 바닷가에서 살았습니다. 주로 하는 일이라고는 아이들과 산으로 들로 바다로 뛰어다니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은 부둣가에 매어있는 배위를 뛰어다니는 일입니다. 배위에서 놀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일은 배를 매어 놓은 밧줄을 절대 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생각없이 줄을 풀어 버리면 처음에는 제 자리에 가만히 떠 있는 것 같았던 배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부두와는 멀어져 버리고 바다 한복판으로 떠밀려 갑니다. 배에는 노가 있기는 하지만 키를 두 개나 더해도 남는 커다란 노여서 노를 젖는 일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당황해서 평소 수영실력을 믿고 바다로 뛰어들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배는 저만치 가버리고 가깝게만 보이던 부두는 실제로 너무 멀리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살이에서 갑자기 곤두박질치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그동안 잘살았던 시절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요엘 선지자는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온 유다 백성들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큰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1장5절을 볼 때, 유다 백성들이 요엘 때까지는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유다 백성들은 포도주에 취할 정도로, 단 포도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을 정도로 평안하고 풍족하게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결코 평탄하게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재앙이 유다를 덮쳐 올 것입니다. 그 재앙은 다름아닌 메뚜기 재앙압니다. 이 재앙이 얼마나 엄청난가 하면, 나이많은 노인조차 과거에 이런 재앙을 겪은 기억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땅에 이처럼 듣도보도 못한 재앙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족속들 조차 겪어본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재앙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다 백성들이 마치 장난기 심한 어린아이들처럼 배를 매어 놓은 밧줄을 제 마음대로 풀어 버린 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너희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아라. 그러나 율법의 끈 만큼은 풀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가나안 땅에 그들을 매어 놓는 끈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매어 놓는 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마음껏 장사할 수 도 있었고 농사지을 수 도 있었습니다. 집을 지을 수도 취미생활을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만큼은 파괴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율법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시키면 그 동안 누리던 모든 축복의 걷어가실 것을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해 오셨습니다. 요엘선지자가 외칩니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1:2)
요엘 선지자는 경험 많고 지혜로운 늙은 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당신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할 일을 내가 말하겠소, 또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들어보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을 말해 줄테니 이리들 오시오, 어린이들도 오시오 이 되어질 일을 아이들이 커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이 또 커서 그들의 자식들에게 말해줘야 할 놀라운 일들을 내가 이야기 하겠소”.
이렇게 몰려든 사람들에게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는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였습니다. (4절) 사람들을 잔뜩 불러다 놓고 긴장시킨 후에 하는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저나 여러분은 메뚜기 때의 무서움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메뚜기하면 잡아서 놀던 장난감정도로 기억되지 무서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메뚜기재앙으로 온 유다를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다 쓸어뜨려 버리겠다는 이야기입니다. 6절입니다.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메뚜기에 대해서 이렇게 잘 표현한 부분은 아마 드물것입니다. 이 족속은 강하고 무수한데, 특히 어금니가 특징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어금니에 한번 걸리면 아무리 굵은 나무도 남아날 길이 없습니다. 마치 사자의 어금니 같으며 어떤 어금니 보다 강하고 무서운 이빨 인 암사자의 어금니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팟종은 뭐고 늣이나 황충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 가지로 자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네 가지는 모두 메뚜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네 종류의 메뚜기가 아니라 메뚜기의 성장단계를 말한다고 합니다. 어린것부터 나이든 메뚜기까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볼 때 황충이 한번 팟종이 한번 이렇게 해석하는 것보다는 수 차례에 걸친 메뚜기 때의 재앙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메뚜기때가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1:7) 반복적인 재앙의 최대 피해는 바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나무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주시는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너희를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밑에 쉬게 하겠다” 는 말씀은 곧 ‘내가 너희를 평강가운데 지키며 풍성한 삶을 살게 해 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다른것은 몰라도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만큼은 가나안 땅에 꼭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 떼가 이처럼 소중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전부 갉아먹어서 말갛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소재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이고 전제는 포도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곡식이 없고 포도주가 없는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을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예배드릴 처소도 마련할 수 없고 찬양을 드릴 수 도 기도할 수 도 없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교회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탈 차비도 없는 지경입니다. 정말이지 참담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엘선지자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실것과 철저한 파멸이 닥칠 것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1:8)라고 말합니다. 왜 애통하고 슬퍼해야합니까? 그동안 누리고 있었던 행복과 기쁨이 곧 슬픔과 근심으로 들이닥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논이나 밭에서 풍성한 수확을 얻을 때 기쁨을 느끼는 법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지금까지 잘 살았습니다. 밭에는 항상 무언가 얻을 것이 있었고, 포도 나무나 무화과나무뿐 아니라 석류나무,대추나무, 사과나무같은 여러 과일 나무들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지금까지 유다 백성들은 특별한 고생없이 살아왔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는 법이 없었고 밭에서는 밀과 보리가 생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이런것들이 전부 없어져서 모든 기쁨이 사라지는 때가 온다는것입니다. 도데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까지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이에대해서 선지자는 그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태도에서 찾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이 귀찮았습니다.
율법의 구속을 받지않는 다른 족속들은 거짓말도 하고 속임수도 써가면서 장사하니까 수입이 몇 배씩 되고, 결혼도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 아내가 몇 명씩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그 끈을 풀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공부할 것도 많고 즐기고 싶은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끈을 확 풀어 버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까지 다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는 왔다갔다 하면서 자기 욕심대로 삽니다. 이제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공정한 경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늘 궁핍한 가운데 헌금을 해야했고, 시간에 쫒기면서도 주일마다 교회에 매여 있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장사하고 주일까지 장사해서 돈을 버는데, 나는 장사도 못하고 헌금까지 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일주일 내내 공부하고 일요일에 특히 더 많이 공부하는데, 나는 성가대하고 청년 부 한다고 책상에 한번 못앉습니다. 그런데 이 지겨운 끈을 살짝 놓으니까 이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하고 경쟁해 볼만 해졌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멀리 와버린 후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최고 위험한 상황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끈이 풀리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끈만은 놓으면 안됩니다. 이 끈만은 붙들어야 사는 길이 열립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말씀에 매어있는 상태에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말씀에 매여있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부도 안되고 연애도 안되고 확실히 놀 수도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크고 어려운 숙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하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어있는 조건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축복의 선물인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변할 정도로 하면 안됩니다. 장사를 해도 하나님과 나와 관계가 변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혼할 상대자를 고르고 연애를 하는것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변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공부를 해도 내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대로 끈을 풀어 버리면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말로는 교인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거짓말도 잘하고 잘 속이며 남의 돈도 잘 떼어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런 사람들이 더 잘 사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그가 탄 배가 떠내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가 정말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모든 것을 잃고 목숨 하나 딱 건질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백성이라면 배와 함께 물에 휩쓸려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의 끈을 풀어 버린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손보시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잘 사는 것은 절대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성공하는 것은 절대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가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죄인취급하는 설교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습니다.”라는 설교를 해도 아무도 내가 떠나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이 움켜 쥐고 있는 그 소중한 것이 과연 어떻게 될것인지에 대해 공격받지 않으면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던 사람들이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아이가 조금 다쳤다고 하면 굉장한 일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 법석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체벌하는 것조차 두고 보지 못할 정도로 민감합니다. 주식에 조금 오르고 내리는 일들에 울고 웃고 합니다.
죄에 대한 설교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해도 반응이 없던 사람들도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었다는 사실에 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시큰둥하던 사람이 자녀가 대학시험에 떨어지면 온 동네가 떠내려 갑니다. 또 애지중지 사 모은 주식의 주가가 폭락이라도 할라치면 애통해하며 통곡합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분해서 우는 겁니다. 유다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미리 정신차리라고 아무리 외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농사 잘되고 있는데 다른 수입이 착착 잘 들어오는데 무서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선지자가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죽어버린다고 하니까 충격을 받습니다. “밀과 보리가 다 없어진다”고 하니 깜짝 놀랍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여주고있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는 원리가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끈을 풀고 삽니다. 그리고 배가 어디로 흘러가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믿는 사람들은 끈을 풀면 안됩니다. 끈에 매인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공부 해야 하고, 성경 읽으면서 장사 해야 합니다. 죄인지 아닌지 애매한 경우에 부닥칠 때마다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확인해 가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인의 풍성한 삶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생활의 풍성함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뒤따라오는 선물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믿음을 잃게 될 때에는 그 선물들을 잘라 내서라도 바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물질의 풍요는 축복인 동시에 시험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데도 겸손한 사람은 그것을 축복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지만, 물질적인 풍요 때문에 교만해진 사람은 시험에 걸려든 것입니다. 승진했는데도 여전히 겸손하게 기도로 매달리고 말씀을 붙드는 사람은 승진을 축복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지만, 승진했기 때문에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고 교만해진 사람은 바다 한복판으로 떠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은 우리에게 큰 시련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 시련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또다른 시련으로 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까지 계속해서 어려움이 닥친다고 말합니다. 한번 어려움이 닥쳐서 지나갔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됩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세상과 타협할 때 가장 무서운 점은 그렇다고 해서 어려움이 곧바로 닥치지는 않는 다는데 있습니다. 곧바로 어려움이 닥치면 정신을 차릴텐데 얼마간은 괜찮은 상황이 지속됩니다. 그러나 예배에는 벌써 그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배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눈물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찬양에서도 생명력이 느껴지거나 회복시키시는 성령님의 위로를 느낄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배를 무서워해야합니다.
사람들은 부도가 난다든지 담보 집힌 집이 넘어간다든지 해야 재앙으로 여기고 정신을 차리지 예배의 감동이 없어지고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는 잘 모르고 넘어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진짜 무서워해야 하는 재앙은 말씀을 듣고 싶은데도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찬송을 불러도 기쁨이 없는 이것이 더 무서운 재앙인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드리는 많은 예배가 아무 감동이 없이 드려지고 있습니다. 주일이니까 그냥 습관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 예배에 하나님의 음성이 어디있습니까? 기쁨이 어디있습니까? 눈물이 어디있습니까? 회개가 어디 있습니까? 감동이 어디있습니까? 이것은 경재적인 메뚜기 재앙보다도 더 무서운 영적 메뚜기 재앙입니다. 영적인 메뚜기들이 나와 내 가정을 계속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게 풍족한 21세기에 전 세계 세 명 중 한 명은 하루에 한 끼니도 먹지 못합니다. 자기 나라를 포기 하고 가방 하나만 들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난민이 됩니다 이제는 또다시 경제가 어렵고 살길이 막막하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멀어져 버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외면한 체 경제가 어렵다, 살길이 막막하다 하면서 애통하고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러한 어려움들은 계속해서 닥치고야 말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13-14)
맞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유다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앞에 모여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거민들을 “몰수히”모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인 사정 봐서 빼주거나 돌려보내지 말고 노인이나 젊은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전부 하나님의 전에 모여서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가 없어졌다고 부르짖지 말고, 밀과 보리가 없어졌다고 부르짖지 말고, 자신들 가운데 은혜가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가 소멸된 일을 두고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보다 분명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배가 막 떠내려가고 있는데 “누구 듣고 있으면 살려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좀 위험하거든요”하고 속삭이면 안됩니다. 옷을 벗어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마구 소리질러야 합니다. 체면 생각해서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면 아무도 안듣습니다.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라도 “위험!”이라고 써서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냉장고 위에 딸기 자석으로 붙여 놓고 날마다 들여다보면서 “하나님 도와주십시오!”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성령의 충만한 인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된다는 것입니다. 매어있는 줄을 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장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웃과 관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잃으면 몇 번 파산하고 고칠 수 없는 암 선고를 받는 것보다 몇 천 배 더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정직하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내속에 있는 것을 전부 내어놓고 부르짖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의로운 손으로 들어서 축복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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