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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잠언

잠 24장 10절(당신의 힘은 어디에 있나요?) - 안효관

by Preacher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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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24장 10

당신의 힘은 어디에 있나요?

안효관 목사 2020-02-02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여러분에게 먼저 짧은 동영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https://play-tv.kakao.com/v/300113355>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영상이 언제 적에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지난 2016년 6월 26일 밤 미국 이스트러더퍼드(East Rutherford)의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6 남미축구선수권대회인 ‘코파 아메리카’의 결승전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승부차기 영상입니다. 결승전에서 연장전까지 갔지만 0:0 무승부로 경기는 끝이 났고, 승부차기에 돌입했는데 먼저 찬 칠레의 첫 번째 골을 골키퍼가 잘 막아냈습니다. 이제 아르헨티나 차례이고, 첫 번째 골을 넣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첫 번째 키커는 주장 리오날 메시(Lionel Messi, 1987-)입니다. 그런데 그가 찬 공이 골대를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승부차기에서 2-4로 칠레에게 져서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메시는 우리 시대 최고의 축구선수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매년 그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 상을 6번이나 수상했고, 소속팀인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유니폼을 입고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8번 우승,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4차례 우승 등 총 28번이나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축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메시이지만 유독 월드컵이나 코파 아메리카 등 국제메이저대회에서 우승컵을 안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2016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 당시에도 메시가 국제메이저대회에서 우승컵을 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자신의 실축으로 우승컵을 안지 못했고 그라운드에서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 후 메시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의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의 국가대표 은퇴선언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거리였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라고 하는 마라도나는 메시의 국가대표 은퇴를 철회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고,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직접 메시에게 전화를 걸어 국가대표 은퇴를 철회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르헨티나 시골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메시에게 쓴 편지가 공개되면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비알레에 거주하는 요나나 푹스(Johana Fucks) 선생님의 편지글을 좀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리오넬 메시에게.

당신은 아마 이 편지를 읽지 않겠죠. 하지만 저는 오늘 축구팬이 아닌 한사람의 교사로서 당신에게 편지를 합니다. 저는 비록 교사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지금 영웅이 포기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대표팀 은퇴는 당신을 깍아내리는 이들에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승리에만 가치를 두고 패배를 통해 성장하는 것을 무시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에 당신이 넘어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이들에게 이기는 것만이 우선이고 유일한 가치라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인생의 목적을, 내 재능으로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희귀병을 앓는 당신이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며 성장했는지를 봐 왔습니다. 지금 당신이 은퇴하면 이 나라 아이들은 당신에게 배웠던 노력의 가치를 더 이상 배우지 못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처럼 졌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한다면 오늘도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당신을 이야기 할 때 얼마나 멋있게 축구를 하는지 얘기하지 않습니다. 단 한골을 넣기 위해 당신이 같은 장면을 수천 번이나 연습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당신은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벗어선 안 됩니다. 모든 팬들이 당신에게 승리와 우승만을, 트로피와 메달을 바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발 우리 아이들에게 2위는 패배라고, 경기에서 지는 것이 영광을 잃게 되는 일이라는 선례를 남기지 말아주세요. 진정한 영응은 패했을 때 포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영웅이라면 이길 때는 같이 이기고 질 때도 혼자가 아니라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때만큼은 리오넬 메시가 아닌 아르헨티나 그 자체라는 마음으로 대표팀에 남아줬으면 합니다. 결과에 관계없이 사랑하는 일을 하여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위대한 우승이 아닐까요? 진심을 담아, 비알레 초등학교 교사, 요아나 푹스”

 

여러분, 참 감동적인 글 아닙니까? ‘진정한 영웅은 패했을 때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진정한 영웅이라면 이길 때에는 같이 이기고 질 때에도 혼자가 아니라는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그러니 당신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때만큼은 리오넬 메시가 아닌 아르헨티나 그 자체라는 마음으로 대표팀에 남아줬으면 한다’고, ‘결과에 관계없이 사랑하는 일을 하여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위대한 우승이 아니냐?’는 글은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편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메시는 대표팀 은퇴를 철회하고 2년을 더 국가대표으로 활동을 하다 2018년에 대표팀에서 은퇴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스포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수없이 많이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고, 패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삶을 산다고 해서 우리에게 언제나 상승곡선과 같은 삶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고 하는 우리의 삶에도 때로는 넘어질 때가 있고, 때로는 힘에 겨워 주저 앉을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넘어지고 쓰러진다고 해서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실패는 넘어졌을 때 일어서지 않는 것입니다. 낙심될 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지 못하고 여전히 낙심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어 나오는 잠언 24: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의인도 넘어집니다. 의인도 쓰러집니다. 의인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불신앙이고,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넘어졌다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졌을 때 일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포기하고,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한 채 엎드러져 있는 것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악인이나 그런 것이지, 의인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12제자에 뽑혔을 뿐만 아니라 세 명의 제자들만 참여했던 자리에도 늘 동행했습니다. 또 주님을 향해서 어느 누구도 고백하지 않았던 멋진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6)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게 붙들려 가시기 전에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마태복음 26:33)고,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노라.’(마태복음 26:35)고 거듭거듭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계실 때 한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제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자기 스승을 그렇게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심문을 받으시던 도중에 몸을 돌려 자신을 부인하는 그 베드로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누가복음 22:61)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고도 갈릴리 호수로 고기잡이나 하겠다고 떠나버린 베드로를 주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그를 다시 복음의 사명자로 불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실수했을 때 그를 나 몰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굳게 다짐하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베드로를 책망하시거나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런 베드로에게 다시 용기를 주어 복음의 사역자로 설 수 있게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게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종종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면서 언제나 한결같이, 변함없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언제나 믿음의 가치를 따라 믿음의 지조를 지키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대로 늘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이 늘 한결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바라만 볼 뿐 그것을 이루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때로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랐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면서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을 위해서 더 귀하게 쓰리라는 다짐을 가지고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귀하게 쓰임받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했는데,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취업을 해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복 받는 것이야!’라고 자랑하고 싶은데 오랫동안 노력해도 취업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여 우리가 늘 찬송하는 것처럼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 그런 가정을 만들고 싶은데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게 건강 주시면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든 할 것만 같아 건강을 주시라고 기도하는데도 몸은 여전히 병들도 나약한 채 살아가야 합니다. 자식들이 잘 되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잘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자식들에게 복을 주셨노라.’고 자랑하고 싶은데, 예수 안 믿는 집 애들이 더 잘 나가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헛되이 살아온 것입니까? 예수 잘 믿으면 실패도 없고, 실수도 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잘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큰 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다복하고 풍요를 누리는 복된 삶, 우리가 바라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이 좋고 하나님만 섬기던 욥에게 큰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욥을 찾아와서 ‘네가 뭔가 죄를 지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벌을 내리신 것 아니냐?’고 질책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아니 심지어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의 자식이 한날 한 시에 죽은 것입니까? 욥이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그 많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게 하셨습니까? 욥이 하나님께 미움을 받아서 그의 몸에 악성종기가 나고 건강을 잃어 고생하는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의인이라고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라고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도 아니고, 의인이라고 해서 어려움이 피해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벌을 내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요나와 같이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해서 신명기 28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복 대신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삶을 포기하거나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패배자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환란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환란 날’이라는 것은 어떤 외적인 환경에 억압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의지나 의도와 상관없이, 또 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그것과 상관없이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스스로에게 환란이나 어려움이 닥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탄하고 순적한 길을 가길 원하는데, 어느 순간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어려움이 닥칩니다.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이 내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그것이 가정의 일이든, 직장이나 일터의 문제이든,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든 말입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내게 찾아와서 나를 짓누르는 것이 환란입니다. 그것을 거부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환란의 때는 찾아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게 환란의 때가 찾아오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을 대처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네가 만일 환날 날에 낙담하면’이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낙담한다.’는 말은 ‘스스로 낙심한다. 스스로 움츠려든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마음상태를 단속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환란의 때를 맞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대처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산과 같은 커다란 환란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스스로 낙담하지 않고 ‘이것도 내가 이겨낼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충분히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작은 문제 앞에서 ‘나는 도저히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어!’라고 스스로 포기해버리면 그 작은 문제조차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낙담’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어떤 문제나 어려움 앞에서 스스로 낙담하면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문제나 어려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고 스스로 낙담해 버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환란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네가 만일 환란 날에 무기력하면 너의 힘이 작은 것이다.”(NKJV)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을 힘 있게 살아가느냐, 아니면 무기력하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환란이 닥쳤을 때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믿음이 힘이 있는 믿음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평안할 때가 아니라 환란의 때요, 고난의 때요, 어려움이 닥쳤을 때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스스로 포기해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평소에 강한 사람처럼 산다 하더라도, 평안할 때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산다 하더라도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그 기쁨의 노래를 잃어버린다면 그는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축구선수 메시를 생각해 보십시다. 메시는 정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축구선수입니다. 그는 전 세계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영웅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축구 영웅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비난의 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책하며 축구계를 떠났다면 그는 결코 영웅일 수 없습니다. 비록 일시적으로 국가대표를 떠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지라도, 한 초등학교 교사의 편지처럼 ‘영웅은 이길 때에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질 때도 있음을 알고, 그 때에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한 경기에서 졌다는 이유로 포기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패배자일 것’입니다. 영웅은 아무리 힘든 시기라 하더라도, 그 어떤 비난과 조롱이 그를 괴롭힌다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다시 일어서서 뛰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오늘 본문은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환란’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언어로 ‘차라’입니다. 그리고 ‘미약함을 보임이니라’라는 말은 ‘차르’입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차라’와 ‘차르’라는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여를 써서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잃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라는 환란의 때가 우리에게는 ‘차르’라는 우리 자신의 미약함, 힘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극복하기 힘든 고난의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때로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잠언 24:16절의 말씀처럼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환란이라는 상황이 계속해서 나를 깊은 수렁 속으로 몰아넣으려 해도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내 앞길을 가로막고 낙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현란한 춤을 춘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를 쓰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다시 일어설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낙심해버립니다. 스스로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암송한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 우리가 약할 때 힘을 주시는 하나님, 내가 쓰러질 때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승이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 복음의 사명자로 쓰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쓰러진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을 붙잡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의 손을 붙잡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어나 다시 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닥쳐왔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다. 고난과 환란의 때일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어려움이, 실패가, 고난과 환란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힘들 때일수록 주님 손 꼭 붙잡고 다시 일어나 뛰어가십시다.

 

환란의 때에 낙심하여 포기하면 결국 마귀만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다시 일어설 우리의 힘은 내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사모하는 하나님께 우리의 힘이 있습니다. 힘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십시다. 그게 믿음의 힘입니다. 진정한 힘은 바로 그 믿음에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언 24:16) 다시 일어나 믿음을 경주를 계속해 가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꼭 붙잡고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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