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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창세기

창 43장 8-15절(나를 담보하는 용기) - 안효관

by Preacher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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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3장 8-15

나를 담보하는 용기

안효관 목사 2018-03-04

전주남성교회 https://https://www.nsc.or.kr/

 

아프리카에 위치한 ‘에티오피아’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 가운데 있는 아이들의 나라’를 연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은 가난하여 세계 많은 나라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그 에티오피아가 우리나라가 6.25전쟁을 치를 때 우리를 도와주었던 고마운 나라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80여 년 전인 1936년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은 에티오피아는 끝까지 저항해보지만, 27만 명이 목숨을 잃고 나라는 결국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982-1975) 황제<사진1>는 영국으로 망명을 합니다. 망명길에 올랐던 셀라시에 황제는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약하고 힘없는 에티오피아를 돕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황제는 영국에서 에티오피아의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5년 뒤인 1941년 황제는 독립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와의 결전을 벌여 승리하고,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그 후 UN이 창설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평화협의회에 참석하여 이런 연설을 합니다. “우리가 힘들 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와 같은 나라가 나오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약한 나라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셀라시에 황제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엔은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집단안보체제’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장 먼저 일어난 전쟁이 6.25전쟁이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셀라시에 황제는 한국을 도울 것을 주장했고, 에티오피아 역시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병합니다. 사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우리나라를 도울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로부터 독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군수장비 역시 열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황제는 황실 근위대 가운데 자원자 1,200명을 모아 ‘강뉴부대’라는 이름을 붙여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파병한 것입니다. ‘강뉴’라는 말은 에티오피아 말로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한다.’는 뜻과 ‘초전에 박살낸다.’는 뜻입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강뉴부대를 우리나라에 파병하면서 파병되는 군인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고 합니다.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그런 황제의 정신에 따라 강뉴부대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16개국의 참전부대 중에서 가장 용감히 싸웠던 부대였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군은 전투 현장에서 전사할지언정 포로는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에티오피아는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6,037명의 군인을 파병했고, 전쟁 중에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티오피아는 6.25전쟁 때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참전용사들은 월급을 고국인 에티오피아로 보내지 않고, 부대 안에 ‘보화원’이라는 보육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강뉴부대는 에티오피아로 돌아갔는데, 그 후 에티오피아에는 7년간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면서 수백만 명이 질병과 기아로 죽으면서 나라는 급격하게 쇠락하게 됩니다. 그런 어려운 형편을 틈타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시키고 에티오피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말았습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나라는 더욱 어려워져 오늘의 에티오피아 -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적 현실이지만, 우리는 살라시에 황제의 그 위대한 정신과 그들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들도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때에, 세계 평화와 질서를 지키겠다고 군대를 파견한 그 위대한 용기를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나라가 6.25전쟁에서 북한군을 물리치고 자유와 평화를 지킬 수 있었던 데에는 살라시에 황제나 강뉴부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용기,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줄 용기가 없이는 희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시대에도 누군가의 희생하는 그런 용기로 인해서 우리 사회에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고 아름다운 사회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그건 비단 거대한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일상 속에서도 우리들의 작은 희생과 희생하려는 용기를 통해서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의 모습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명 가운데 야곱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요셉과 베냐민은 야곱의 열한 번째와 열두 번째 - 즉 가장 늦게 태어난 아들들입니다. 요셉과 베냐민이 가장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두 아들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첫눈에 반한 사람이 라헬이었습니다. 그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이나 노동을 했는데,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라헬 대신에 라헬의 언니 레아를 먼저 야곱의 아내로 줍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다시 7년을 더 일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위해서 무려 14년 동안이나 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라헬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언니 레아가 6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레아와 라헬의 여종을 통해서 4명의 아들이 더 태어날 때까지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하나님께서 라헬을 긍휼히 여기셔서 아이를 낳게 하셨는데, 그 아들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리고 밧단아람에서 고향 땅으로 돌아오던 길에 라헬이 낳은 아들이 베냐민이었고, 그 베냐민을 낳으면서 산고 끝에 라헬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야곱으로서는 요셉과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에 형들은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요셉이 자신이 꾼 꿈을 형들 앞에서 자랑을 하는데, 그 꿈의 내용은 형들이 동생인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형들이 요셉을 더욱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형들이 양을 데리고 멀리 가 있는데, 형들이 잘 있는지, 양들도 잘 있는지 알아보라.’고 요셉을 형들에게 보냅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음식을 싸들고 형들을 찾아간 요셉은 형들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으며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가 꾼 꿈 때문이었습니다. 7년 동안의 풍년 후에 7년 동안 흉년이 들 것이라고 해석한 요셉은 그 지혜로움을 인정받게 되고, 나라의 전반적인 살림을 책임지는 총리로 발탁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 전역에 7년의 풍년 후에 7년의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먼저 찾아온 7년의 풍년 기간 동안에 흉년을 대비하여 양식을 충분하게 비축해 놓았고, 그로 인해서 연이어 찾아온 흉년을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굽이 아니라 그 주변 나라들이었습니다.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 흉년을 대비하여 먹을 것이 있는 반면 흉년을 준비하지 못한 다른 지역에서는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야곱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계속된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자, 야곱은 자기 자녀들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그곳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온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애굽에 노예로 판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번째 애굽 방문 때에는 양식을 구해 가나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도 흉년이 계속되자 다시금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야 했습니다.

 

두 번째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야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첫 번째 양식을 구하러 갔을 때 요셉의 형들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자기 동생 요셉인줄 모르고 자기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양식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데,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형들에게 이런 조건을 내세웁니다. ‘내가 너희에게 양식을 주긴 주는데, 너희가 우리나라를 염탐하러온 정탐꾼인줄 어떻게 알겠느냐?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너희가 말한 그 막내를 데리고 오면 내가 너희를 정탐꾼이 아닌 것으로 인정해 주마.’ 그러면서 양식을 가득 안겨 가나안으로 되돌려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애굽에 양식을 사러 가려면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데려가지 못하게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야곱은 12명의 아들들 가운데 요셉과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두 아들 가운데 요셉은 오래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고선, 아버지에게는 짐승들이 요셉을 잡아먹어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었다는 사실에 아버지 야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요셉을 잃은 그 슬픔을 그나마 달래주었던 아들이 베냐민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 베냐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베냐민을 애굽에 데려가야만 양식을 구해올 수 있다고 하는데도 아버지 야곱은 결사반대를 합니다. 막내 베냐민만은 데려가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딜렘마에 빠졌습니다. 양식을 구해오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만은 보낼 수 없다는 말씀하십니다. 양식을 구해오지 않으면 온 가족이 굶어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르고 베냐민을 데리고 간다면 양식은 구해올 수 있을지 몰라도, 요셉을 잃은 슬픔에다가 베냐민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걱정에 연로하신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방법은 오직 하나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선 사람이 넷째 아들 유다였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만 양식을 얻어올 수 있고, 그래야만 가족들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면서, 본문 9절에서 아버지에게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겠노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담보가 되겠다는 것은 자신을 담보로 베냐민을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베냐민을 안전하게 되돌려 데려오지 않으면 아버지가 자신에게 어떤 벌을 내리던지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베냐민의 생명 대신이 자신의 생명을 요구하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것이고,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자신에게 저주를 선언하신다면 그 저주를 달게 받겠다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가문에서 자신을 추방한다면 추방을 당할 것이고, 아들로서의 상속권을 박탈한다면 모든 상속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베냐민을 안전하게 데려올테니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그렇게 자신의 생명, 자신의 모든 것을 담보하면서까지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냐민을 데려가지 못하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구해오지 못하면 아버지를 비롯해서 자기 가족 전부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까지 잃을 순 없다고,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만 양식을 사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아들들 사이에 상당히 오랜 기간 그 문제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쉽게 허락만 했다면 애굽에 벌써 두 번이나 갔다 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 아버지와 아들들 사이에 베냐민을 놓고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과 아들들 사이의 그런 대치와 갈등을 종결지은 사람이 유다입니다. 유다가 자신을 담보하고 베냐민을 데리고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아버지 야곱이 허락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갈 수 있었습니다.

 

유다의 그런 희생과 용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애굽의 국무총리인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서 형들이 요구한대로 양식을 자루에 가득 담아 주고는, 집안 청지기에게 시켜 몰래 그 자루에다가 형들이 가져온 돈을 다시 다 자루에 넣어 줍니다. 특별히 베냐민의 자루에다가는 요셉이 소중히 여기는 은잔을 몰래 넣어놓았습니다. 양식을 사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형들이 얼마 못되어 요셉이 보낸 청지기에 의해서 검문을 받습니다. 요셉의 금잔을 훔쳐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은 결코 은잔을 훔치지 않았노라’고 항변하지만 자루를 하나씩 열어본 결과 그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베냐민은 국무총리의 은잔을 훔친 죄로 국무총리의 노예가 될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다시 나선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결코 의도적으로 그런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면서, 그 죄악의 대가로 모두가 노예가 되겠노라고 말합니다. 국무총리인 요셉은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노예로 남고, 나머지는 양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유다가 ‘만일 이 막내 베냐민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연로하신 아버지가 그 충격으로 분명 돌아가시고 말 것’이라고, ‘자식으로서 어떻게 아버지가 그렇게 충격을 받고 돌아가시는 것을 볼 수 있겠느냐?’고 국무총리를 설득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종으로 남을 테니 막내 베냐민을 돌려보내주시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아버지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요셉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제서야 자신이 그들의 아우 요셉임을 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의 형들과 요셉은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고, 그 이후에 아버지 야곱은 국무총리가 된 아들 요셉의 요청으로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민을 와 흉년의 시기에서도 아무런 양식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유다가 자신을 담보하겠다고 말할 때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보내지 않겠다던 베냐민을 보냄으로 양식을 얻으러 애굽으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베냐민이 노예로 붙잡힐 위기에 처했을 때 유다가 베냐민 대신 자신이 담보가 되겠다고 나섬으로 요셉의 마음을 움직여 형제들 사이에 극적인 재회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유다가 자신을 담보함으로 가족을 살리고, 화해를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유다가 자신을 담보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야곱의 가족은 흉년에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애굽의 국무총리 앞에서 자신을 담보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요셉과 형들 사이에 극적인 재회와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입니다. 죽이진 않고 노예로 팔았지만, 노예로 팔려와 애굽에서 살았던 그 비참한 삶을 되돌아본다면 형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넷째 형 유다가 자신을 담보하여 아버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동생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말하는 그 말을 듣고 요셉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해코지한 형들에게 보복 대신에 오히려 그들을 끌어안고 울며 화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의 자기를 담보하는 용기, 그것이 가족을 살리고 형제들 사이에 화해를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유다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담보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담보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담보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피가 땀방울처럼 흐를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가능하면 그 고난의 길, 십자가를 지는 고통의 길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당신의 원함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다 허무셨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하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2:14-18)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 된 인간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도 화목하며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담보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담보하시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심으로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담보는 곧 우리와 하나님 사이, 우리와 이웃 사이에 모든 막힌 담을 허무는 은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담보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담보함으로 우리가 받은 그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를 담보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를 희생하기 위한 용기, 내가 섬김으로 손해보고 힘든 일을 감내하겠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담보하는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뢰받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담보하려 해도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지 않으면 나는 담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를 담보해 달라고 요구해도 ‘나를 담보하겠다.’는 그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담보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가 아버지에게도 자신을 담보했고, 또 애굽의 국무총리에게도 자신을 담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런 신뢰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유다는 자신을 담보함으로 가족을 살리고, 형제들의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탄생하는 축복의 가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자신이 죽으면서 열두 아들들을 축복할 때 유다에게 이런 축복을 예언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기 49:10) 유다의 자손에서 왕이 태어나고, 그 유다의 자손에게 메시아가 나신다는 뜻입니다. 그 축복의 예언대로 유다의 자손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태어났고, 그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나를 담보하는 용기! 희생을 위해서 자신을 담보할 때 그 용기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늘의 복을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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